22화. 바람에 스러지고, 눈에 남다.

지킬 수 없는 약속

by 붕어예요

의금부의 축축한 돌바닥 위로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횃불빛이 깜박이며 고문틀에 묶인 김동신의 그림자를

벽에 드리웠다. 피와 땀, 재가 뒤엉켜 시커멓게 번들거리는

그의 몸은 이미 부서질 대로 부서져 있었으나,

눈빛만큼은 꺾이지 않고 오만하게 빛나고 있었다.

곧 왕의 음성이 무겁게 전해졌다.

“김동신은 대역죄인으로 참형에 처하라.”


그 한마디는 천둥처럼 내려쳐

의금부의 공기를 가르며 번져갔다.

대신들의 어깨가 떨렸고,

고문을 집행하던 이들조차 잠시 손을 멈추었다.

한 시대를 잠식하던 거대한 그림자가

단칼에 베어지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모두 알고 있었다.

불길은 아직 완전히 꺼지지 않았다는 것을.


그 시각 김지헌의 집. 대문은 닫혀 있었고,

마당엔 얇게 내리 깔린 눈발이 바람에 휩쓸려 나부꼈다.

요는 숨조차 삼킬 만큼 무거웠다.

몇 날 며칠 칩거하며 문밖을 넘지 못한 김지헌은

불 꺼진 방 안에 홀로 앉아 있었다.

이미 자신의 끝을 예감하고 있었다.


‘나는 역적의 죄에서 벗어날 수 없다.

남은 이들을 과연 살릴 수 있는 것 인가...’


그때 거칠게 두드리는 소리가 고요를 깨뜨렸다.


“어명이요! 죄인 김지헌은 어서 나와 전하의 명을 받으시오!”


굳은 빗장이 풀리며 문이 열렸다.

차가운 공기가 들이닥쳤고,

내금위들이 무겁게 발을 옮겼다.

관원이 두루마리를 펼치며 낮게 읊조렸다.

김지헌은 두 눈을 감고 무릎을 꿇었다.

“김지헌은 연좌의 죄를 물어 참형에 처하는 것이 마땅하나,

아비의 죄를 소상히 고한 점을 참작해 그 목숨은 살려주되

유배를 명한다. 다시는 조정에 발을 들이지 못할 것이며,

후손 또한 벼슬길을 막는다.”


목소리가 마당 안을 메웠다.

김지헌은 천천히 눈을 뜨더니, 긴 숨을 내쉬었다.

손끝이 떨리자 두 손을 포개어 떨림을 감추려 했으나,

어깨 전체가 흔들렸다.

잠시 후, 결심한 듯 천천히 일어나 큰 절을 올렸다.


"전하, 성은이 망극하옵나이다..."


목소리는 갈라졌고, 그 끝엔 오열이 삼켜져 있었다.

처마 기둥 뒤에 서 있던 윤 씨 부인은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눈물이 차올랐으나, 그가 목숨을 부지한 것에 대한

안도의 숨도 함께 섞여 나왔다.


‘대감, 이제는 부부로서의 연도 끝이 나겠군요.

신첩은 어찌해야 합니까? 눈물을 흘려야 합니까...?

아니면 아버지의 억울함이 밝혀져 기뻐해야 하는 것 이옵니까?'


김지헌이 들을 수 없는 질문들을

윤 씨 부인은 혼자 가슴으로 삭힐 뿐이었다.

어쩌면 예견된 수순이었을까?


“윤 씨 부인은 역적 집안의 며느리이기는 하나.

전 좌의정 윤현조의 충절이 밝혀져

그의 명예와 신분이 복권된 바 친정으로 돌아가 은거하라.

이는 전하의 뜻이네.”


김지헌이 고개를 들어 윤 씨 부인을 바라봤다.

그리고는 짧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본인은 상관치 말고 서화와 함께 친정으로 돌아가

남은 여생을 살라는 김지헌의 마지막 부탁이기도 했다.

그 순간 윤 씨 부인의 눈물이 뚝, 떨어졌다.

그녀의 심장은 찢어지는 듯 아팠으나, 동시에 단단히 닫혔다.

같은 자리에서 내려진 두 개의 어명은

부부의 연을 영영 갈라놓았다.


죄인들에 대한 처결이 내려는지는 동안 궁궐 침전.

달빛이 스며든 창가 곁에서

왕은 손으로 이마를 짚고 앉아 있었다.

마지막 처결을 앞두고 그는 깊은 고심에 빠졌다.

방 안은 무겁고 차가운 공기로 가득했다.

홍내관이 조심스레 앞으로 나와 말을 했다.


"전하, 이제 대비마마의 대한 처결을 내리셔야 하옵니다."


왕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그는 천천히 손을 내리고, 홍내관을 응시했다.


"홍내관... 아무리 계모라 하여도 내 오랫동안

어머니처럼 생각하고 모셔왔네...

혹 내 효가 부족하여 이런 참극이 일어난 건 아닌지

자꾸만 자책을 하게 되는구나..."


그 목소리는 금이 간 거울처럼 갈라져 있었다.

홍내관은 머리를 깊이 숙였다.


“전하의 효심은 미물들조차 아는 바이옵니다.

이는 하늘의 장난일 뿐,

결코 전하의 잘못이 아니옵니다.”


왕은 창가로 눈길을 돌렸다.

달빛이 은빛 강물처럼 방 안을 흘렀다.


... 장난이라...”


그 한마디에 방 안이 더욱 무겁게 가라앉았다.

누구도 감히 먼저 말을 잇지 못했다.

긴 정적 끝에, 왕이 굳은 결심을 한 듯

홍내관을 바라보았다.


"홍내관, 지금 당장 도승지를 들라 하게 어마마마에 대한

처결을 내릴 것이다."


잠시 후, 도승지가 침전에 들었다.

도승지가 허리를 숙여 예를 갖추자

왕은 마음이 바뀔세라 서둘러 명을 내리기 시작했다.


"도승지, 내 어마마마의 처결을 내릴 것이다.

죄상이 너무나 참혹하여 씻을 수 없는 대죄 임은 분명하다.

허나 내 아들이 된 도리로서 그 목숨을 앗을 수는 없다.

이에 대비의 존호를 폐하고 온양행궁에 처한다.

행궁이라 하나 다시는 궐에 돌아오실 수 없을 것이다.

이 것이 임금으로서 그리고 아들로서 어머니께

내릴 수 있는 최고의 형벌이 될 것이니

내 죽을 때까지 어머니를 찾아뵙지 않으리라.

지금 당장 행궁에 처하라.”


잠시 뒤, 대비의 가마가 금군들의 호위를 받으며 궁을 떠났다.

대비는 흰 저고리와 흰 치마 차림에 머리는 단정히 쪽 지었으되,

머리에는 화려한 금장식이 아닌 은비녀 하나만 꽂혀 있었다.

대비가 아니라는 사실을 그 복식이 스스로 말하고 있었다.

횃불들이 바람에 일렁였다.

대비의 눈빛은 마지막까지 꺼지지 않는 원망으로 번뜩였다.


왕은 경복궁 자경전 뒤편 아미산의 정자,

경호정 난간에 홀로 서 있었다.

차가운 바람이 소매와 곤룡포를 흔들었고,

눈송이가 흩날리며 어둠 속에 사라졌다.

아래로는 대비의 가마가 궐문을 지나 멀리 흘러가고 있었다.

왕은 난간을 꽉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눈물이 차올라 시야가 흐려졌다.


... 효와 정의... 과인은 둘을 다 가질 수 없구나.”


그의 낮은 목소리는 달빛에 스며,

스스로의 가슴을 찌르는 칼날이 되었다.


그 시각 차가운 밤공기 속에 종각의 종소리가

뭉근히 퍼져나갔다.

윤재는 말 위에서 두루마기 자락을 움켜쥐었다.

바람에 휘날리는 흰 눈발이 옷섶에 달라붙었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대제학 대감께서 유배에 처하셨다...

그렇다면 서화 낭자는...’


심장이 요동쳤다.

손아귀에 잡힌 고삐가 땀으로 젖을 만큼 힘이 들어갔다.

가문의 반대도, 조정의 압박도 그의 머릿속에서 사라지고,

오직 한 사람의 이름만이 가슴을 쳤다.


‘서화...'


윤재를 말의 고삐를 재촉하여 서화의 집으로 향했다.

김지헌이 유배를 떠난 집은 깊은 적막에 잠겨 있었다.

안마당엔 눈이 소복이 쌓였고,

그 위로 바람이 불어 하얀 입자가 흩날렸다.

안채에선 희미한 등불만이 깜박이며

어둠을 지탱하고 있었다.


"서화 낭자! 서화 낭자 계시오?"


대문이 갑자기 두드려졌다.

문이 열리자, 두루마기에 눈발을 뒤집어쓴 윤재가 서 있었다.

급히 달려온 듯 숨결이 고르고,

두 뺨은 차갑게 상기돼 있었다.

서화는 마루에 앉아 있다가 놀라 일어섰다.


... 윤재 도련님?”


윤재는 대답도 잊은 채 곧장 그녀에게 다가섰다.

눈발이 어깨에서 흩어지며 떨어졌다.


“대감께서 유배에 처해졌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마음이 가만히 있질 못하여 이리 실례가 될 걸 알면서도

불쑥 찾아왔습니다. 낭자 무사하십니까?

혹여 화가 미치진 않았는지... 너무 걱정이 되었습니다...”


서화의 눈빛이 흔들렸다.

한순간 입술을 꼭 깨물고, 애써 담담히 말했다.


“도련님, 저는 괜찮습니다...

저와 어머니는 외조부님 댁으로 돌아가라는

전하의 명을 받았사옵니다."


윤재는 잠시 말을 잇지 못하다가,

마침내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잡았다.

차갑게 식은 손끝이 그의 뜨거운 손에 파묻혔다.


“서화 낭자... 낭자를 잃을 순 없습니다.

조정이 무엇을 말하든, 집안이 무엇을 꾸짖든...

제 마음은 변하지 않습니다.”


서화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낮게 속삭였다.


“도련님... 그 길은 너무 힘들 겁니다.

도련님께서 상처를 받게 되실게 두렵사옵니다.”


윤재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눈빛이 번뜩였지만 목소리는 절실히 낮았다.


“설령 세상이 모두 등을 돌린다 해도...

저는 낭자를 두고 물러서진 않을 것입니다."


서화는 그의 눈빛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뜨거운 결심이 그대로 전해졌다.


‘도련님께서는 끝내 나를 지키려 하시는구나.

그러나 그 결심은... 결국 자신을 불태우는 길일 터.

내가 먼저 손을 놓아야 한다...’


서화는 그렇게 다짐했으나,

떨리는 손끝은 끝내 그의 손을 놓지 못했다.

눈물이 터져 나오며,

그 둘은 어쩌면 지킬 수 없을지도 모르는

약속을 하듯 서로를 부둥켜안았다.

바람은 눈발을 흩날리며 마당을 채우고,

젊은 두 사람의 손과 어깨를 덮었다.


윤재는 서화를 부둥켜안은 채

오래도록 떨리는 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눈물이 옷깃에 스며들었고,

차가운 겨울밤 공기 속에서 두 사람의

체온만이 미약하게 살아 있었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이미 알고 있었다.


이 결심을 이루려면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 있다는 것을.

윤재는 서화의 손을 꼭 쥔 채 낮게 속삭였다.


“낭자... 저를 믿고 조금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그는 더 말을 잇지 못한 채 등을 돌려 집을 나섰다.

눈발이 잦아들지 않는 길 위로

말발굽 소리가 묵직하게 번졌다.

멀리서 사랑채의 등불이 환히 켜져 있었다.

그 불빛은 따뜻하기보다 차갑고 날카로워,

앞으로 맞닥뜨릴 대화를 예고하는 듯했다.

윤재의 두 눈이 흔들림 없이 그 불빛을 응시했다.

그 순간, 바람에 흩날린 눈송이 사이로

차무강의 굳은 실루엣이 사랑채 창가에 비쳤다.

아직 말 한마디 나누지 않았지만,

두 사람의 갈등은 이미 시작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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