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봄이 오겠습니까?

이토록 시리게 아름다운데...

by 붕어예요

사랑채의 등불이 밤바람에 일렁였다.
바람이 스칠 때마다 창호가 살짝 흔들렸고,
방 안에는 무겁게 가라앉은 술 냄새와 긴장감이 뒤섞여 흘렀다.
차무강은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묵묵히 술잔을 굴리고 있었고,
정 씨 부인은 붉게 물든 눈가로 옷소매를 움켜쥔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윤재가 방 안으로 발을 들이자,
적막을 가르듯 무거운 음성이 흘러나왔다.

“윤재야, 이 밤중에 어디를 다녀온 것이냐.”

묻는 이의 눈빛은 창호에 비친 그림자
속에서도 무겁게 드리워졌다.
윤재는 숨을 고르며 곧장 무릎을 꿇었다.

“아버님, 어머님. 소자는...
서화 낭자와의 혼인을 예정대로 치르고자 합니다.”

순간 방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정 씨 부인은 눈을 크게 뜨며 아들을 바라보았고,
차무강은 손에 든 술잔을 탁자 위에 내리쳤다.
잔이 깨지며 술방울이 흩어졌다.

“네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고는 있는 게냐!”

등불이 그의 음성과 함께 떨리듯 흔들렸다.
윤재의 목소리는 미묘하게 떨렸으나
눈빛만큼은 굳세게 빛났다.

“대제학 대감께서 유배를 당하셨으나,
서화 낭자와 윤 씨 부인은 억울하게 누명 쓰신
전 좌의정 대감의 혈육이옵니다.
그 억울함이 풀린 지금, 어찌 저의 뜻을 거두라 하시옵니까?”

정 씨 부인은 눈물이 차올라 고개를 저었다.

“윤재야... 내가 어찌 그 마음을 모를까.
허나 세상은 그렇지 않다. 역적의 피가 흐른다
손가락질하는 소리가 이미 사방에 퍼져 있다.
네가 그 혼인을 고집한다면, 너뿐 아니라
우리 집안 전체가 고립될 것이다.”

윤재는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머님... 저는 그것이 두렵지 않습니다.”

그 짧은 대답이 방 안에 메아리처럼 울렸다.
차무강의 주름진 손이 다시 탁자를 내리쳤다.

“네 한 놈의 감정 때문에, 대대로 지켜온
가문을 무너뜨리겠다는 것이냐!”

무거운 숨결 속에서 정 씨 부인의 흐느낌만이 조용히 흘렀다.
곧 차무강의 음성이 방 안을 짓눌렀다.

“더 이상 긴말은 필요 없다.
내 빠른 시일 내에 다른 혼처를 알아볼 터이니,
넌 그리 알고 물러가거라.
두 번 다시 그 아이를 볼 생각일랑 추호도 하지 말거라.
알겠느냐?!”

그는 말을 끝내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등불빛 속 그의 뒷모습은 분노와 슬픔이
뒤섞여 무겁게 흔들렸다.
윤재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발걸음은 무거웠지만,
그 결심만은 굳세어지고 있었다.

그 밤,
사랑채에 드리운 긴장과 분노는 여전히 가시지 않았으나,
멀리 다른 길 위에서도 또 다른 운명이 흘러가고 있었다.

황량한 유배 길.
차가운 바람이 몰아치며 눈발이 수레 자국을 덮어 갔다.
끝이 보이지 않는 길 위로 삐걱대는 수레 소리와
군사들의 발자국만이 적막을 깨고 있었다.
수레 위, 포승줄에 묶인 김지헌은 어깨가 처져 있었으나
눈빛만큼은 담담했다.
그때 멀찍이 따라오던 여인의 걸음이
거센 바람 속을 뚫고 앞으로 나섰다.
치맛자락이 흩날렸다. 춘매였다.
그녀는 눈발을 맞으며 떨림도 없이
그를 불러 세웠다.

“나으리...!!”

목소리는 눈물에 젖어 있었으나 단호했다.
순간 수레가 멈추고 군사들이 칼자루에 손을 얹었다.
팽팽한 긴장. 그때 김지헌의 다급한 외침이 터졌다.

“그만두시오! 내 식솔이오!”

군사들이 주춤하자, 춘매가 수레 옆으로
달려와 무릎을 꿇었다.
놀란 눈빛이 그녀를 마주했다.

“아니, 춘매야... 여기는 어찌 온 게냐.”

춘매는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눈가에 눈물이 맺혔으나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지가 어딜 가겄어유... 나으리,
지는 나으리 곁에 있을 거 고만유.
제발 가라고 하진 마셔유...”

김지헌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잠시 말이 없던 그는 눈을 감고 깊은숨을 내쉬었다.

...이 죄인 곁에 머물겠다는 네 뜻을,
내 어찌 허락할 수 있겠느냐.
넌 이제 노비가 아니라 하였거늘...”

춘매는 고개를 끄덕였다.
눈물이 차가운 땅 위로 떨어졌다.

“알고 있고 만유... 나으리 빨래도 해야 허고,
식사도 챙겨 드려야 하는디...
지가 여태 해왔으니 끝까지 지가 할 거 고만유.”

김지헌은 말문이 막힌 듯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 눈빛엔 놀라움과 고마움,
그리고 깊은 슬픔이 겹쳐 있었다.
잠시 후 그는 다시 수레에 올라탔다.
얼굴은 굳었지만, 낮은 음성이 흘렀다.

“자, 다시 출발하시게.”

수레가 삐걱이며 앞으로 나아갔다.
춘매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그 뒤를 따랐다.
눈보라 속에서도 걸음은 단호했다.
그런 그녀를 김지헌은 애처롭게 바라보았다.
눈발이 흩날리며 두 사람의 어깨 위에 소복이 쌓였다.
유배의 길은 멀고 고단했으나,
그 길 위에도 누군가의 의리와 애정이 남아 있었다.

한편, 눈보라가 매섭게 몰아치던 유배길과 달리,
이튿날, 그의 빈자리를 채우듯
김지헌의 집안은 유난히 겨울 햇살이 따스했다.
비극의 그림자가 드리웠었으나,
그날만은 창호 너머로 스며든 햇빛이
맑게 번져 방 안을 비추었다.
햇살이 모처럼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듯했다.
그때 연심이가 조심스레 안채 작은방으로 들어섰다.
서화는 외가댁으로 갈 채비를 하나하나 챙기고 있었다.
연심이는 삐죽거리며 서 있었다.

“연심아, 왜 그래? 무슨 할 말이 있니?”

서화가 잠시 그녀를 올려다보다
다시 짐으로 시선을 돌렸다.
망설이던 연심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저... 아씨, 지랑 어딜 좀 같이 가셔유.”

서화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뭐야, 어딜 가자는 게야.
지금 짐 싸는 거 안 보이니?”

그러자 연심이 서화의 손을 덥석 잡았다.
표정은 비장하기까지 했다.

“아씨, 지금 당장 가셔야 하는고만유.
지가 꼭 보여드릴 것이 있어유.”

서화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연심의 인도에 따라 깊은 숲 속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겨울 숲은 적막했다.
바람이 스칠 때마다 앙상한 가지 사이로 눈발이 흩날렸다.
연심은 말없이 앞장서 걸었고,
이따금 뒤를 돌아 서화를 살폈다.
얼마나 걸었을까,
눈길 너머 작은 집 한 채가 드러났다.
지붕에는 말린 약초 다발이 주렁주렁 걸려 있었고,
낡은 굴뚝에서는 연기가 가늘게 피어올랐다.
마당 위 눈에는 아이들의 발자국이 어지럽게 찍혀 있었다.
서화가 발자국을 따라 들어섰을 때,
눈밭에서 장난처던 두 남매가 놀라 멈춰 섰다.
막동이와 단이였다.
한순간, 시간이 멎은 듯 세 사람의 눈빛이 마주쳤다.

“아... 아씨?”

막동이의 떨리는 목소리가 터졌다.

곧장 눈시울이 붉어지며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서화는 두 남매를 품에 안았다.
단이는 옷깃을 움켜쥔 채 흐느꼈다.

“아씨, 다시는 못 뵈는 줄 알았어요...
너무 보고 싶었어요, 아씨...”


그 말에 서화의 눈물이 터졌다.
억눌렀던 슬픔과 회한이 눈발과 함께 쏟아졌다.
그녀는 두 남매를 굳게 끌어안았다.
그때, 낮고 단단한 목소리가 마당에 울렸다.

“왔는가.”

서화가 고개를 들자,
흰 수염이 성근 노인과 복돌이가
약재 바구니를 들고 다가오고 있었다.
노인은 바로 백서였다.
잠시 고요한 파문이 일렁였다.
연심이 백서에게 허리 숙여 인사하며 말했다.

“어르신, 아씨께서 이젠 아셔야 할 듯하여
지가 모시고 왔고만유.”

백서는 서화를 한참 바라보다가
조용히 복돌이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많이 놀랐는가? 그래, 내가 이 아이들을 거두고 있었네.
처음엔 연심이의 부탁이 있었지. 허나 내겐 자식도 없고
세월만 덧없이 흘러갔더군. 그래서 복돌이에게
내 성을 따라 ‘홍유성’이라 이름을 주고 양자로 삼았네.
단순히 길러내는 데 그치지 않고, 평생 닦아온 의술을
이 아이에게 전하고 있지. 유성아, 아씨께 정식으로 인사드려라.”

복돌이, 아니 이제는 홍유성이 된 아이가 고개 숙여 인사했다.

“아씨, 소인 유성이라 하옵니다.”

서화는 미소 지으며 두 팔을 벌렸다.

“정말 멋지다. 복돌... 아니, 유성아. 잘 지냈니?”

유성의 눈에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
그는 곧장 서화의 품으로 달려갔다.

“아씨...!”

서화는 그런 유성을 꼭 끌어안았다.
세상이 무너져도, 누군가는 또 삶을 이어가고 있구나...
그녀는 마음속으로 속삭였다.
이곳에서 본 광경은 훗날 윤 씨 부인 앞에서 내뱉게 될
그 결심으로 자연스레 이어지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온 서화의 눈엔
친정으로 돌아가기 위한 짐을
하나하나 챙기고 있는 윤 씨 부인이 있었다.

낡은 책갑에 외조부의 글씨가 남아 있는
서첩을 올려 덮고, 오래 곁에 두었던
벼루와 붓을 보자기에 정성스레 싸 두고 있는 모습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작은 나무함에
비녀와 노리개를 넣어 닫았다.
그 손길은 담담했으나,
오래도록 눌러온 회한이 무겁게 실려 있었다.
책상 위에는 아직 남은 몇 개의 고운 비녀가
햇빛을 받아 은은히 반짝였다.
그 앞에 서화가 조심스레 무릎을 꿇었다.
그녀의 두 손은 가지런히 놓여 있었으나,
손끝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어머니...”

낮게 흘러나온 목소리엔 망설임과 결심이
동시에 담겨 있었다.
서화의 눈동자는 흔들렸으나,
그 속에는 이미 단단히
굳어진 빛이 깃들어 있었다.
그런 서화를 윤 씨 부인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래, 아가 거처를 옮겨 가려니 마음이 뒤숭숭한 게냐?”

윤 씨 부인은 부드러운 손길로 서화의 머리칼을 넘겨주었다.
서화의 입술이 떨리며 이어지는 말이 방 안에 울렸다.

“어머니, 사실은... 소녀가 산으로 들어가려 하옵니다.
병든 이들을 살피며... 그 곁에서 제 남은 삶을
보내고 싶사옵니다. 그래야 소녀가 조금이나마
마음의 짐을 덜고 살 수 있을 듯하옵니다.”

순간 윤 씨 부인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서화야...”

짧은 부름 속에 수많은 감정이 겹쳐 있었다.
놀람, 슬픔, 그리고 자부심.
그녀는 손에 쥔 비녀를 내려놓으며
떨리는 숨을 몰아쉬었다.

"아버지 때문이냐 아님 윤재 도령 때문이더냐?"

서화는 눈가에 맺힌 눈물을 애써 삼켰다.

“그 누구의 탓도 아니옵니다. 그저 소녀가 마음 편하자고
택한 길이옵니다. 허나... 윤재 도련님께서는 저를 끝까지
지키려 하실 테니... 소녀가 그만해야겠지요?”

그 목소리는 거의 속삭임에 가까웠으나,
오히려 더욱 날카롭게 가슴을 파고들었다.
윤 씨 부인은 떨리는 손으로 딸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가엾은 것... 너의 뜻이 그리도 단단하다면,
어미가 어찌 막을 수 있겠느냐.
허나 산골의 길은 험하고,
아픈 이들을 돌본다는 일은 고된 법이다.
그 모든 것을 네가 감당할 수 있겠느냐?”

서화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곧 또렷이 고개를 끄덕였다.
눈가에 눈물이 맺혀 반짝였으나,
목소리에는 더는 흔들림이 없었다.

“예, 어머니. 그것이 제 마음의 빚을 덜어내는 길이라면,
기꺼이 감내하겠습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은 무겁지 않았으나,
깊고 넓은 강물처럼 두 사람을 감쌌다.
윤 씨 부인의 눈가에서 눈물이 흘러내려
서화의 손등에 떨어졌다.
햇빛에 젖은 그 눈물은 작은 보석처럼 반짝였다.

“아가, 서화야... 언제든 돌아와도 된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서화를 끌어안고
서화의 등을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어미가 항상 그 자리에 있으마.
네가 어디에 있든, 무엇을 택하든...
너는 결코 혼자가 아니다.”

그 순간 서화의 눈물이 터졌다.
그녀는 어머니의 무릎에 얼굴을 묻고 흐느꼈다.
방 안에는 바람 소리와 함께,
두 여인의 억눌린 눈물이 잔잔히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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