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및 등장인물 소개

by 붕어예요
『청포리: 윤슬에 담긴 그리움』

프롤로그_

미국으로 이민 간 친구에게서

오랜만에 전화가 걸려왔다.


“어머, 경자야! 잘 지냈어?
이게 얼마 만에 듣는 목소리니, 얘~
뭐? 이번에 한국에 잠시 들어온다고?
정말? 너무 좋지~ 꼭 보자.
너무 보고 싶다, 경자야.”


한국에 잠시 들어올 일정이 있으니,

꼭 한번 얼굴을 보자고 했다.
수화기를 내려놓고 한참 동안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 목소리를 듣자,

이상하게도 오래전 바다 냄새가 떠올랐다.

그리고 난 잠시 잊고 지냈던

사진첩을 펼쳐 들었다.
1980년 8월 16일,
빛바랜 사진 속에는 아홉 살 난 나,

어린 김옥순이 있었다.
그리고 어린 날의 내 친구들도 그 속에 있었다.

나는 그날의 햇살 아래 눈부시게 웃고 있던
친구들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흙길 위에 나란히 서 있던 다섯 아이들.
사진이 빛바랜 만큼 세월도 그 위에 내려앉았지만,
아이들의 웃음은 여전히 쨍하고 맑았다.

저 아이들은 그 시절 청포리에서
가장 끈끈하고, 가장 시끄럽고, 가장 소중했던
우리들의 이야기였다.



김옥순 (삼 남매의 맏이)


해진 분홍색 티셔츠.
굳게 다문 입술 속엔 늘 조용한 결심이 있었다.
셋을 키우느라 바빴던 엄마 대신
밥을 짓고 쌀을 씻고, 동생들을 챙기는 일이 일상이었다.
놀이터에서도 웃음 끝에 남는 건 책임의 무게였다.
그래서일까, 덕배의 무모한 계획 앞에서는
본능처럼 한 걸음 뒤로 물러서곤 했다.
하지만 그건 겁이 아니라
살림을 배운 아이의 현실감이었다.



박경자 (어촌계장 딸)

깨끗한 옷, 단정한 머리.
늘 먼 곳을 보는 듯한 눈빛.
경자는 청포리 어촌계장의 딸이었다.
모든 멸치잡이배가 그녀의 집을 거쳐 갔고,
그만큼 주변의 시선도 함께 따라왔다.
부유함이 늘 행복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걸
어린 마음에도 알고 있었을까.
그녀의 미소는 조용했고,
가끔 내 손에 쥐여준 고급 간식 하나가
우리를 오래 이어주는 실이 되어주었다.



김덕배 (상회집 둘째 아들)

사진의 한가운데, 빨간 티셔츠처럼 활활 타오르던 아이.
“나 덕배여, 나만 믿어!”
그 말 한마디면, 우리는 어쩐지 모험 속으로 뛰어들었다.
동네 상회집 아들이라 늘 무언가를 알고 있었고,
그 뻔뻔함이 우리를 웃게 했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보면
그의 허세 뒤엔,
어쩌면 모두를 웃게 하고 싶었던 외로움이

숨어 있었던지도 모른다.



최석호 (바다를 닮은 아이)

햇볕에 그을린 팔, 흰 민소매 아래로 드러난 검은 피부.
석호의 아버지는 먼바다로 고기잡이를 나가셨고,

집에 오시면 술만 마셨다.
그래서 어머니는 억척같이 살림을 꾸렸다.
그런 집의 아이는 늘 강했다.
모험 앞에서도, 싸움 앞에서도 주저함이 없었다.
겁 많은 영수를 놀릴 땐 누구보다 앞장섰지만,
어쩌면 그것도 그 나름의 애정 표현이었을 것이다.
바다는 그런 아이를 닮았다.
거칠지만 속은 늘 깊고 따뜻했다.



오영수 (서울에서 내려온 아이)

사진의 가장자리,
낯선 미소로 카메라를 바라보던 그 아이.
서울에서 내려온 영수는
도시의 기억과 시골의 고요 사이에서 늘 서성였다.
밀물처럼 스며드는 외로움과
썰물처럼 밀려드는 그리움 속에서,
그는 종종 울음 대신 침묵을 택했다.
그 어색한 미소 하나로
우리는 그가 이곳에 완전히 속하지 못했다는 걸 알았다.



사진 속 아이들은 모두 아홉 살 동갑내기였다.
그 여름, 청포리의 햇살 아래서
우리의 웃음은 파도처럼 부서지고, 또 이어졌다.


나는 사진첩을 덮었다.
낡은 종이의 냄새 사이로
소금기 섞인 바람이 스며들었다.


그 시절,
엄마들이 찌개를 끓이던 냄새가 마을을 감싸고,
아이들이 흙투성이로 뛰어다니던 저녁.
해가 질 무렵,
우리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지던 그 시간.

다시는 돌아갈 수 없지만,
그 바다의 윤슬은 아직 내 마음 어딘가에서 반짝인다.
그리고 나는 묻는다.


“그때 나는 무엇이 그리 두려웠을까.
그저 친구들과 웃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는데.”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도시의 건조한 공기 속에서도,
내 마음은 여전히 그 바다 위를 걷는다.
청포리의 냄새, 청포리의 바람,
그리고 그리움의 윤슬 위를.




매주 화, 금 저녁 11시에 찾아오겠습니다.
많은 관심 부탁 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