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추억은 냄새로 기억된다.

선물보다 엄마.

by 붕어예요

정말 평범한 하루하루가 지나고 있었다.
주말 아침, 영수 할머니는 왠지 모르게 분주해 보였다.
이른 새벽부터 마당을 쓸고, 부엌을 들락날락하며 쌀을 씻었다.
솥뚜껑이 덜컥 덜컥 울릴 때마다 김이 새어 나왔고,
맛있는 냄새가 집 안 가득 퍼졌다.

"할머니, 오늘 무슨 날이에요?"

영수가 읽던 책을 덮고 방을 나오며 물었다.
그러자 할머니는 얼굴에 홍조를 띠고
상기된 얼굴로 말씀하셨다.

"니 큰삼촌이 결혼할 아가씨를 인사시키러 온다지 뭐냐
아이고, 영수 너도 알지? 할매가 얼마나 애가 탔는지"

"예."

영수가 짧게 대답했다.
할머니는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부엌으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양은냄비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영수는 마루 기둥에 기대앉아
잠시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봤다.
서울에 사는 큰삼촌이 내려오신다는 소식 때문일까?
사실 선생님이 처음 오실 때 도 이런 마음이 들었다.
그게 누구든 '서울'에서 내려온다는 얘기를 들으면
괜히 서글퍼졌다. 그럴 때마다 신기하게도
코 끝에서 서울의 냄새가 맴돌았다.
어쩌면 추억이 냄새로 기억되는 것은 아닐까?

영수는 헛헛한 가슴을 달래러
마을 어귀에 있는 느티나무 아래로 갔다.
햇빛이 따스하게 내리쬐고 있었지만
바닷바람이 서늘하게 볼을 스쳤다.
딱히 할 것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만날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닌데
느티나무 아래에 주저앉아 나뭇가지로
흙을 쓱쓱 흩어 놓고 있었다.
그때 멀리서 누군가 영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영수야~!"

옥순이였다.
옥순이는 동생들과 어딜 다녀오는지
집에 들어가는 길에 영수가 보이자
반갑게 인사를 하는 듯하였다.
영수도 가볍게 손을 들어 보였다.
그러자 옥순이가 동생들에게 얘기를 하는 듯하더니
동생들은 집으로 들어가고
옥순이가 혼자 영수 쪽으로 뛰어 왔다.
달려오는 발소리와 함께 바람이 흙먼지를 살짝 일으켰다.

"영수야, 여서 혼자 뭐 하는 거여?"

옥순이가 영수 옆에 앉았다.
둘 사이로 바람 한 줄기가 스치며 느티나무 잎이 흔들렸다.

"그냥, 좀 생각할 게 있어서 옥순이 넌 어디 갔다 오는 거야?"

"이이~ 엄마가 덕배네 좀 갔다 오라고 심부름시키셔서
댕겨 오는 길이여. 아, 영수 니 덕배네 백구 알지?
백구가 새끼를 낳았다잖여~ 궁금해 죽겄는디 아직
보믄 안 된다 혀서 못 보고 왔잖여 얼매나 귀여울까?"

옥순이는 잔뜩 상기된 얼굴로 새끼 강아지들을 상상하기라도
하는 듯 미소가 얼굴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햇살이 그녀의 뺨 위에서 반짝였고,
바람이 둘의 머리카락을 엉키듯 흔들었다.
그 모습을 본 영수가 물었다.

"옥순아, 너는 새끼 강아지가 왜 궁금해?"

그러자 옥순이는 영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잠시 생각에 잠긴 듯했다.
잠깐의 정적이 흐르고, 멀리서 닭 우는 소리가 들렸다.

"귀엽잖여"

그 대답을 듣고는 영수가 다시 땅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렇구나... 난 강아지를 별로 안 좋아해서 그런가?"

옥순이가 놀란 토끼눈을 하고서 영수를 바라보며 말했다.

"강아지가 싫어? 왜에? 귀엽지 않어?"

영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둘이 말도 없이 느티나무 아래에
앉아 있었다.
바람이 지나갈 때마다 잎사귀가 서로 부딪히는 소리가
바다 멀리서 들려오는 파도 소리와 겹쳐졌다.
긴 침묵을 깬 건 영수였다.

"나, 오늘 큰삼촌이 집에 오신다고 해서 선착장에
마중 나가봐야겠다."

그 말을 듣고는 옥순이가 엉덩이를 탁탁 털고 일어났다.
햇빛이 그녀의 그림자를 길게 늘였다.

"내가 같이 가주까?"

영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려~ 그럼 난 집에나 가야겄다."

옥순이가 집 쪽으로 걸어가다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영수야, 내일 놀기로 한 거 잊지 않았지? 내일 여서 봐~!"

그러고는 집으로 달려갔다.
영수는 멍하니 옥순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옥순이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그제야
터벅터벅 선착장을 향해 내려가기 시작했다.
바닷바람이 더 세게 불었고,
갯내음이 코끝에 짙게 맴돌았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멀리서 배 한 척이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잔잔한 파도를 가르며 다가오는 배의 돛대 위로
갈매기 한 마리가 맴돌았다.
영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배를 바라보았다.
점점 다가오는 배 위에는 오랜만에 뵙는
큰삼촌과 그 옆에는 낯선 여자가 서있었다.
딱 봐도 서울 사람이었다.

여자의 옷자락이 바람에 나부꼈고,
햇살이 바다 위로 반사되어 눈부시게 반짝였다.
배가 포구에 닿자,
삼촌은 먼저 내리고 손을 내밀었다.
그 여자가 조심스럽게 손을 잡고 배에서 내렸다.
구두 밑창이 미끄러질까 봐 발끝을 모으며 내려오던 그녀는
마을을 둘러보다가 수줍게 미소 지었다.
햇살에 반사된 바다빛이 얼굴에 스쳤다.
파도 소리와 함께 그녀의 웃음이 살짝 묻어났다.
삼촌은 큰 가방을 들고 영수 쪽으로 다가왔다.

“영수야, 오랜만이다.”

“예. 삼촌 안녕하셨어요?”

영수의 대답 뒤로 바람 소리만 들렸다.
세 사람은 함께 집으로 향했다.
갯길엔 아직 물기가 남아 발자국마다 물빛이 번졌다.
짠 내음이 공기 중에 묻어 나왔다.

집 마당에 들어서자,
할머니는 미리 문 앞에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양손에 행주를 쥔 채, 부엌에서 막 뛰어나온 듯했다.

“아이고, 오냐— 이 먼 데를 다 왔구나.”


할머니의 목소리에 기쁨이 묻어 있었다.
햇빛이 지붕 위로 비스듬히 쏟아지고,
그 아래로 세 사람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어머니, 저와 결혼할 사람이에요.”

삼촌이 말하자, 여자가 공손히 허리를 굽혔다.

“어머님,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아이고, 세상에. 곱구나, 곱다.”

할머니의 눈가가 금세 촉촉해졌다.
바람 한 줄기가 마당을 스치며 말린 빨래를 흔들었다.

그날 저녁,
식탁 위에는 할머니가 아침부터 준비하던 음식이 가득했다.
된장국 냄새가 방 안을 감싸고,
막 부친 호박전의 고소한 향이 천천히 번졌다.
삼촌은 가방을 열어 안에 있던 작은 상자를 꺼냈다.

“누나가 이거, 영수한테 전해달라 하더라.”

상자 속에는 분홍소시지 두 덩이, 과자 여러 봉지,
학용품 그리고 새 책가방과 새 운동화가 들어 있었다.
그 안에는 접힌 편지 한 장도 들어 있었다.

“엄마가 보낸 거야.”

삼촌의 목소리가 낮았다.
방 안이 잠시 고요해졌다.
영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라는 단어에 영수는 본인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러자 영수는 누구라도 볼세라
자리에서 말없이 일어나 편지를 들고 방으로 들어갔다.
책상 앞에 앉아 편지를 펼쳐 들었다.
창문 틈으로 노을빛이 들어와 종이 위에 길게 번졌다.

"사랑하는 우리 영수에게
영수야 엄마야, 잘 지내고 있니?
할머니한테서 간간히 너의 안부는 듣고 있어
그새 친구들도 많이 사귀었다면서?
너를 그곳에 두고 여기서 엄마, 아빠만
편하게 지내는 것 같아 내심 미안한 마음뿐이야
조금만 더 기다려 줄래?
엄마, 아빠가 금방 데리러 갈게
그동안 할머니 말씀 잘 듣고 밥도 잘 먹어야 한다.
큰삼촌 편으로 엄마가 선물을 보낸다.
엄마의 마음이 잘 전달되기를 바라
엄마가 또 연락할게
많이 보고 싶고 사랑한다. 영수야"

영수는 눈물이 앞을 가렸다.
그러나 소리 내어 울 수 가 없었다.
눈물이 편지 위로 뚝뚝 떨어져 잉크가 번졌다.
그때 방문이 열리고 삼촌이 들어왔다.
들썩이고 있는 영수의 작은 어깨를
말없이 토닥여 주었다.

다음날 친구들과 놀기로 한 일요일 아침,
아이들이 삼삼오오 약속한 느티나무 아래로 모였지만
어쩐지 영수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바람이 느티나무 잎을 스치며 사락거렸고,
하늘엔 흰 구름이 천천히 흘러가고 있었다.
아이들은 그렇게 영수를 한참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