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비가 갠 뒤, 그 자리에

영수의 빈자리

by 붕어예요

월요일 아침,
학교 마당엔 아직 비가 스친 풀잎 냄새가 남아 있었다.
어제 새벽에 내린 비 때문인지 흙길은 아직 촉촉했고,
아이들이 운동화를 끌며 교실로 들어올 때마다
신발 밑창에서 물기 섞인 소리가 났다.

칠판에는 하얀 분필로
‘10월 13일, 월요일’이라 적혀 있었다.
햇빛이 교실 창을 비스듬히 비추며
유리창에 맺힌 물방울이 은빛으로 반짝였다.
바람이 불 때마다 커튼 자락이 살짝 흔들렸고,
공기 속엔 아직 젖은 흙냄새가 남아 있었다.

아이들은 책가방을 내려놓고
서로 장난을 치며 웃었다.
하지만 출석부를 펼친 선생님의 얼굴엔
어딘가 근심이 스쳤다.

“얘들아, 오늘 영수는 학교에 못 나왔단다.”

조용히 교탁에 분필을 내려놓으며 선생님이 말했다.

“몸살이 심하게 걸렸대. 주말 내내 열이 났다고 하더라.”

웅성거리던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뚝 그쳤다.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지만,
교실 안엔 말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묘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창밖의 느티나무 잎이 살짝 흔들렸고,
그 그림자가 유리창 위에서 일렁였다.
옥순은 책상 위에 올려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뒤쪽을 돌아봤다
항상 창가에서 바다 쪽을 멍하니 바라보던
영수의 빈자리가 유독 눈에 들어왔다.

“선생님, 영수가 많이 아픈가유?”

경자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선생님은 잠시 미소를 지었다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날 수업은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분필 긁히는 소리와
창문 너머로 부딪히는 파도 소리가
묘하게 겹쳐졌다.

쉬는 시간마다 누군가


“영수 괜찮을까?”


하고 물었고,
다른 아이들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조용한 걱정이 공기 속에 스며 있었다.
하교 종이 울리자,
아이들이 책가방을 메었다.
햇빛은 한결 누렇게 물들었고,
먼 산 위로 얇은 구름이 흘러갔다.
옥순이 가만히 입을 열었다.

“우리, 영수네 가보자.”

그 말에 덕배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병문안 가자는 거여?”

“그려. 몸살이라잖여. 혼자 있으면 심심할 거 아녀.”

경자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려, 잠깐 얼굴만 보고 오자.”


아이들은 서로 주머니를 털었다.
10원, 20원씩 쥐고 있던
동전들을 꺼내 한데 모았다.
손바닥마다 달라붙은 동전 냄새가 희미하게 섞여
비릿한 쇠내가 풍겼다.
그렇게 산 종이봉투 안에는
덕배네 상회에서 산 새하얀 사탕과 밀가루 과자 두 봉지,
그리고 덕배가 몰래 챙겨 넣은 귤 세 개가 들어갔다.

마을길을 따라 걸을 때 바람이 불었다.
논두렁엔 고개 숙인 벼들이 누렇게 익어 있었고,
바람이 불 때마다 이삭 끝이 부드럽게 흔들렸다.

멀리서 바다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아이들은 말이 없었다
단지 발자국 소리와 바람 소리만이
작게 이어졌다.
영수네 집 앞에 다다르자,
낡은 지붕 위에 햇살이 부드럽게 내려앉아 있었다.
마당에는 바람에 흔들리는 장독과,
빨랫줄에 걸린 수건 한 장이 펄럭였다.
옥순이 조심스레 문을 두드렸다.

“할머니, 안녕하셔유? 영수가 아프다고 혀서유...”

안쪽에서 발소리가 났고, 곧 문이 열렸다.
문틈 사이로 밥 짓는 냄새와
약한 빨래 비누 냄새가 섞여 나왔다.

“아이고야, 니들이 왔구나.”

영수의 할머니는 웃음을 지으려 했지만,
피곤한 기색이 얼굴에 스며 있었다.

“영수 좀 괜찮아유?”

경자가 물었다.

“아직 열이 계속 나는구먼, 밤새 끙끙 앓더니
아침에 겨우 죽 쬐깐 먹고 다시 누웠어.”

할머니의 말끝에 한숨이 섞였다.
옥순이 들고 온 봉투를 내밀었다.

“이거, 저희가 사 온 건디 영수 좀 전해주셔유.”

“아이고, 너희가 돈이 어딨 다고 이런 걸 사와.
그려, 고맙다. 할미가 영수에게 잘 전달해 줄게.”

할머니가 봉투를 받아 들며 살짝 웃었다.
눈가엔 고마움과 걱정이 함께 묻어 있었다.

“할머니, 저희는 그만 가볼게유.”

아이들은 허리를 굽혀 인사하고
아쉬운 발걸음을 돌렸다.
옥순이 한 발짝 대문 쪽으로 다가가
살짝 열린 방문 틈을 바라봤다.
방 안에는 희미한 등불빛이 깔려 있었고,
이불속에 누워 있는 영수의 어깨가 보였다.
얇은 이불 위로 그의 숨결이 미세하게 들썩였다.
기척을 느꼈는지 영수가 몸을 살짝 뒤척였지만
눈은 뜨지 않았다.

“가자.”

짧게 한마디 하고 마당을 나섰다.
길로 나왔을 때 바람이 세게 불었다.
아이들이 걸음을 옮길수록 발자국마다 낙엽이 쌓였다.
덕배가 낮게 말했다.

“내일은 괜찮아지겄지?”

“그렇겄지...”

옥순이 대답했지만,
본인도 알 수가 없었다.
아이들은 흩어져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옥순은 마지막까지 느티나무 아래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멀리 바다 위로 저녁 햇살이 길게 번져 있었다.
그 빛을 따라 시선을 옮기자,
토요일 영수가 마중 나갔던 선착장이
저 멀리 아련하게 보였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도록
영수는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옥순아, 우리 오늘 백구네 새끼 보러 가자!”

경자가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옥순이에게 다가왔다.

“잉? 인제 봐도 된댜?”

“이이~ 그렇다는 고만? 고새 눈도 떴다는디?”

그렇게 옥순이와 경자는 학교가 끝나길 기다렸다.
마지막 종이 울리자
옥순이와 경자는 책가방을 둘러메고
잽싸게 교실을 빠져나왔다.

“아, 근디 덕배는 어딜 간거여?”

달리다가 문득 덕배가 떠오른 옥순이가 물었다.
그러자 경자가 옥순이의 얼굴을
쳐다도 보지 않고 달리며 말했다.

“이이~ 덕배 이번 주 주번이잖여, 청소하고 있겄지~”

경자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둘은 경쟁이라도 하듯 앞으로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이윽고 덕배네 상회에 도착했다.
상회 옆 철제 대문을 열고 들어가 좁은 골목을 돌면,
작은 뒷마당이 나왔다.
그 구석에는 백구집이 있었다.
햇살이 비스듬히 내리며
흙먼지가 금빛으로 부서졌다.

“백구야~ 잘 있었는겨?
아이고, 새끼 낳느라고 고생혔다~”

백구가 총 다섯 마리의 새끼를 낳았는데,
새하얗고 얼마나 귀여운지
옥순이와 경자는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작은 꼬리들이 통통 움직일 때마다
둘의 얼굴에도 웃음이 번졌다.
그러다 문득 영수의 말이 떠오른 옥순이,
흘리듯 말했다.

“이렇게 귀여운디 왜, 싫다는거여?”

경자가 살짝 놀란 눈빛으로 옥순이를 쳐다보았다.

“잉? 뭐라는겨? 누가 강아지 싫데??”

경자의 물음에 옥순이가 고개를 살짝 끄덕거렸다.

“이이~ 영수 말이여, 영수는 강아지가 싫다더라고.”

그러자 경자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하지만 옥순이는 그 말이 어딘가 모르게
계속 마음속에 걸렸다.
분명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영수의 집에 다시 가볼까도 했지만,
괜히 많이 아픈데 가면 영수가 힘들어할까 봐
차마 가보지도 못했다.
오다가다 마주친 영수 할머니께
안부만을 조심스레 물었다.

그렇게 또 주말이 지나고
월요일이 되어서야 영수가 드디어 학교에 나왔다.
많이 아팠는지 부쩍 수척해진 모습이
못내 안쓰러웠다.
그래도 그런 영수가 반가운 아이들은
영수에게 다가가 인사도 하고 했지만
어쩐 일인지 영수는 썩 반가워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그렇게 점심시간이 되어
저마다 싸 온 도시락을 꺼내 보였다.
덕배는 새우젓 무침과 볶은 김치,
경자는 분홍소시지와 무장아찌,
그리고 밥 아래엔 언제나 계란부침이 깔려 있었다.
석호는 밥에 마른김과 간장, 김치,
옥순이는 김치와 멸치볶음이 전부였다.
아이들이 삼삼오오 둘러앉아
도시락 뚜껑을 열고 웃으며 떠들고 있는데,
영수가 조용히 일어나 교실 밖으로 나가버렸다.
아이들은 그런 영수의 행동이 어리둥절해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기 바빴다.

누구도 먼저 말을 꺼내지 못했다.
아이들은 젓가락을 손에 쥔 채
영수가 나간 문쪽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날 오후, 영수는 끝내 교실로 돌아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