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엄마의 품, 라면 국물

어떤 게 더 따뜻할까?

by 붕어예요

점심시간 종이 울린 지 한참이 지났지만,
운동장은 여전히 소란스러웠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여기저기서 튀어 올라 흩어졌다.

운동장 한켠, 오래된 돌계단에 영수가 홀로 앉아 있었다.
도시락은 아직 풀지도 않은 채 무릎 위에 올려져 있었고,
젓가락 끝에는 흙먼지가 묻어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먼 산에서 가을이 깊어가는 냄새가 스며왔다.
서늘한 공기 속에 풀잎과 낙엽 냄새가 섞여 코끝을 스쳤다.
영수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이 천천히 흘렀고, 느티나무 잎들이 햇빛에 반짝였다.
눈앞이 번쩍거릴 만큼 맑은 오후였지만,
마음 한켠은 자꾸만 어두워졌다.

“영수야, 여기 있었구나.”

뒤에서 조용히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담임 선생님이었다.
영수는 고개를 들었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선생님은 잠시 그 옆에 서서 바다 쪽을 바라보다가,
잔잔한 목소리로 말했다.

“배는 안 고프니? 선생님 방에 잠깐 가자.”

영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교실로 들어가기엔 너무 많은 눈이 느껴졌고,
그냥 따라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학교 뒤편 좁은 길을 따라가자 작은 연탄 굴뚝이 보였다.

그 옆으로 낮은 지붕의 집이 하나 있었다.
선생님이 지내는 곳이었다.
문을 열자 오래된 나무 바닥의 냄새와 함께,
누군가의 체온이 남은 듯한 따뜻한 공기가 느껴졌다.

“저기 앉아 있을래?”

선생님은 작은 냄비에 물을 붓고,
손으로 라면 봉지를 찢었다.
얇은 면발이 공중에서 풀리며 툭—
냄비 안으로 떨어졌다.
스프 가루가 물 위에서 천천히 녹았다.
라면 특유의 짭조름한 냄새가 방 안을 채우기 시작했다.

영수는 방 한가운데 작은 상 앞에 조심스레 앉았다.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선생님 방을 살폈다.
책장 위에는 두꺼운 책들과,
겉표지가 닳은 노트 몇 권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창가엔 흙이 묻은 분화 하나와,
유리병에 꽂힌 말라버린 들꽃 한 송이.
벽에는 달력 한 장이 삐뚤게 걸려 있었고,
구석에는 접힌 이불과 찢어진 가방,
그리고 연탄 냄새가 희미하게 배어 있었다.

‘선생님도 혼자 사시는구나…’

학교에서 늘 단정하고 밝던 선생님이었는데,
이렇게 작은 방에서 혼자 지내고 있다는 게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다.

‘선생님도 외로울까?’

영수는 그렇게 생각하며 무릎 위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배고프지?”

선생님이 웃으며 그릇을 두 개 꺼냈다.
그때부터 둘은 작은 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창문 틈으로 오후 햇살이 스며들어
김 위를 금빛으로 물들였다.
선생님은 젓가락으로 면을 한 번 휘저으며 웃었다.

“맛있는 냄새나지? 영수야, 요즘 무슨 고민있니?"

선생님의 물음에

영수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가 편지를 보내셨는데,
그 편지를 열면 엄마 냄새가 나요...”

잠시 말이 끊겼다.
라면에서 피어오르는 김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선생님은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조용히 말했다.

“영수가 그래서 기운이 없었구나...힘들었겠다.
영수야, 선생님도 그런 적이 있었단다.
어렸을 때 너처럼 할머니 댁에서 자랐거든.”

“선생님도요?”

“그래. 부모님께서 서울에서 일하시느라
선생님도 초등학교 땐 시골에서 자라다가
중학교 때 다시 서울로 올라갔지.”

“선생님, 그땐... 외롭지 않으셨어요?”

“외로웠지.”

선생님이 웃으며 말했다.

“밤마다 불 꺼진 방안에서 창문을 보며 울었던 적도 많았어.
근데 어느 날, 편지를 쓰면서 조금 달라졌어.
내 마음의 이야기를 한 줄만 써도 좀 나아졌지.
멀리 있는 사람을 생각한다는 건,
그 사람을 잃은 게 아니라 여전히 곁에 두고 산다는 뜻이더라.”

영수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면발이 국물 속에서 잠잠히 가라앉았다.

“선생님은... 그 시간을 어떻게 견디셨어요?”

그가 묻는 순간, 둘의 시선이 마주쳤다.

“글쎄,”

선생님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리움은 사라지지 않더라.
하지만 그 마음을 꾹 눌러두면 더 아파져.
그래서 나는 편지를 쓰고, 그림도 그리고,
가끔은 바다에다 혼잣말을 했어.
그렇게 조금씩 내 마음을 밖으로 꺼내 놓았지.”

영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도 언젠가는 괜찮아질까요?”

“그럼. 영수는 이미 잘하고 있어.”

선생님이 미소를 지었다.

“사람은 말이다, 누군가를 그리워하면서 사는 법이야.
그 마음이 사람을 단단하게 만들거든.”

영수는 말없이 젓가락을 들어
고개를 숙인 채 라면을 한입 먹었다.
짭조름한 국물 맛이 목을 타고 내려갔다.
그 순간, 코끝에 엄마의 냄새가 스쳤다.
서울에서 온 편지처럼,
마음 한켠이 묘하게 따뜻했다.

오후 종이 울리자 영수는 천천히 교실로 돌아왔다.
교실 안엔 아직 김치 냄새와 반찬 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아이들은 창가 쪽으로 모여 앉아
바깥 운동장을 내다보다가
선생님이 들어오는 소리에 황급히 자리에 앉았다.

“얘들아, 오늘은 조금 다른 걸 해볼 거야.”

선생님이 품에서 조그만 나무 상자를 꺼냈다.
손바닥만 한 크기,
위에는 색연필로 꽃들이 그려져 있었다.
뚜껑을 여는 순간,

안에는 접힌 종이쪽지들이 오밀조밀 들어 있었다.
교실 안의 공기가 살짝 긴장된 듯 조용해졌다.

“이 안에는 너희 다섯 명의 이름,
그리고 선생님 이름이 들어 있단다.”

덕배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희 이름이유?”

“그래~ 자, 오늘부터 ‘짝꿍’을 정할 거야.”

선생님은 상자를 흔들며 부드럽게 웃었다.

“그 짝꿍 이름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고,
앞으로 한 달간 그 친구를 몰래 도와주고, 챙겨주고,
기분 좋은 하루를 만들어주는 거야.”

아이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번졌다.
경자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몰래유? 이름도 안 밝히고?”

“그래, 몰래 하는 거야.
좋은 일은 꼭 큰 소리로 말해야 하는 게 아니거든.”

그 말에 옥순이 입술을 앙다물며 웃었다.
석호는 괜히 헛기침을 하고,
덕배는 옆자리 경자 쪽을 힐끔거렸다.

“자, 그럼 옥순이부터 해볼까?”

선생님이 상자를 들고 옥순 앞으로 다가왔다.
옥순은 두 손을 모아 상자 안을 들여다보다가
눈을 꼭 감고 하나를 뽑았다.
손바닥 안의 종이를 펴자
작은 글씨로 적힌 이름이 보였다.
옥순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누군가의 이름을 본 듯,
미묘하게 웃음과 놀라움이 섞였다.

“다음은 덕배.”

“예~ 드뎌 내 차례!”

덕배가 활짝 웃으며 상자에 손을 넣었다.
그의 손가락이 종이들을 뒤적이는 동안
교실 안은 숨죽인 듯 고요했다.
석호, 경자, 영수 순서로 한 명씩 뽑을 때마다
아이들의 표정엔 묘한 기대와 긴장이 엇갈렸다.
마지막으로 선생님이 상자를 들어
조용히 하나를 꺼냈다.

“자, 모두 다 뽑았지?”

선생님이 웃으며 상자를 덮었다.

“이제부터 그 이름은 네 마음속에만 간직하는 거야.
한 달 동안 누가 누굴 챙기는지,
선생님도 모를 거야. 그게 더 재미있겠지?”

아이들은 서로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애쓰며 고개를 숙였다.
교실 창밖으로 오후 햇살이 들어와
아이들의 머리카락 위에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영수는 손안에 쥔 쪽지를 꽉 쥐었다.

종이의 가장자리가 땀에 젖어 구겨지고 있었다.
그는 아직 그 이름을 바라보지 않았다.
어쩐지, 펼치기가 두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