귤 향처럼 번지는 온기
다음 날 아침, 덕배는 평소보다 훨씬 일찍 눈을 떴다.
부엌에서 엄마가 쌀 씻는 소리가 나자
그는 이불속에서 살금살금 빠져나왔다.
상회 문 옆, 귤 상자가 쌓여 있었다.
전날 읍내에서 들어온 제주산 귤이었다.
“이 정도면 모를 거여.”
덕배는 혼잣말을 하며
손바닥만 한 귤 여섯 개를 조심스럽게 집어
책가방 깊숙이 넣었다.
귤껍질에서 새콤한 냄새가 은근하게 났다.
학교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가방을 열었다.
석호 책상 위에 하나, 경자 책상 위에 하나,
옥순 책상 위에 하나, 영수 책상 위에도
조심스럽게 하나를 올려놓았다.
마지막으로 선생님 책상 위엔
가장 크고 반질반질한 귤을 올려두었다.
남은 한 개는 자기 몫이었다.
“이거면 됐지.”
덕배는 작게 중얼거리며
손바닥의 귤 향을 킁킁 맡았다.
햇살이 창문 너머로 들어와
교실 바닥에 길게 떨어졌다.
귤껍질이 그 위에서 반짝였다.
잠시 뒤, 아이들이 하나둘 들어왔다.
“이게 뭐여?”
옥순이가 고개를 갸웃했다.
석호가 귤을 집어 들며 말했다.
“덕배 니, 상회 거 훔쳐온 거 아니여?”
덕배는 순간 움찔했지만,
이내 아무렇지 않은 듯 어깨를 으쓱했다.
“아 몰러, 그냥 생긴 거여.”
덕배의 말에 경자가 피식 웃었다.
덕배다운 대답이었다.
영수는 말없이 자기 책상 위 귤을 바라봤다.
귤껍질에 볼펜으로 적힌 글씨가 희미하게 보였다.
‘오늘은 따뜻한 날 돼라.’
영수는 그 말을 가만히 되뇌었다.
귤 향이 코끝에 맴돌았다.
어제 선생님이 말하던
‘마음을 꺼내놓는 방법’
이란 게 이런 걸까 싶었다.
잠시 뒤, 선생님이 들어왔다.
책상 위 귤을 보더니 웃음을 지었다.
“누가 이걸 올려놨을까? 참 예쁘네.”
아이들이 서로를 흘끔거렸다.
덕배는 괜히 눈을 피했다.
“그럼 오늘 수업은 귤 먹으면서 하자.”
교실 안에 귤 향이 퍼졌다.
껍질이 이리저리 쌓이고,
손끝마다 달콤한 향이 남았다.
종이 울리고 수업이 시작됐다.
아침의 소란이 가라앉자 교실엔 다시
연필 긁는 소리만 남았다.
창문 밖으론 들깨를 털어 말리는 소리와,
멀리서 경운기가 지나가는 엔진음이 간헐적으로 들려왔다.
“자, 얘들아.”
선생님이 교탁 앞에 서며 말했다.
“오늘부터 짝꿍에게 ‘선물’을 하나씩 만들어주자.
꼭 물건이 아니어도, 마음이 담긴 거면 뭐든 좋아.”
아이들이 고개를 갸웃했다.
“편지도 좋고, 그림도 좋고,
그 사람이 웃을 만한 걸 몰래 준비하면 돼.”
그 말에 교실이 잠시 조용해졌다.
아이들 대부분이 무심한 척했지만,
책상 아래로 손이 천천히 움찔거렸다.
누군가는 공책을 접어보았고,
누군가는 연필을 꽉 쥐었다.
선생님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좋은 일은 꼭 알게 해야 하는 게 아니란다.
가끔은 몰래 해보는 게 더 따뜻할 수도 있어.”
그 말이 교실 안에 가만히 내려앉았다.
아이들 중 몇은 고개를 숙이고,
몇은 창밖으로 시선을 흘렸다.
누가 누구를 떠올리는지는 아무도 몰랐지만,
그 순간 모두가 누군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창문 사이로 바람이 들어와 커튼이 흔들렸다.
햇살이 교실 바닥을 비스듬히 스쳤다.
공기 속에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잔잔한 따뜻함이 흘렀다.
학교가 끝나고 마을길로 접어들자
논둑 사이로 붉은 노을이 번졌다.
바람 끝이 싸늘했다.
덕배는 책가방을 메고 천천히 걸었다.
“짝꿍 선물이라..."
덕배는 발끝으로 돌멩이를 차며 중얼거렸다.
귤은 이미 줬고, 편지나 꽃 따위는 어색했다.
‘뭘 해야 진짜 기분이 좋아질까?’
덕배는 그렇게 생각하며 상회 쪽으로 발을 돌렸다.
그때, 상회 뒤편에서 “멍!” 소리가 났다.
덕배가 고개를 돌렸다.
백구가 새끼 다섯 마리를 품에 안고 있었다.
작은 강아지들이 젖을 물고 꼬물거리며 꿈틀댔다.
그 모습을 본 덕배는 한참을 앉아서 바라보다
입술을 깨물었다.
“그려, 이거여...”
덕배는 살금살금 다가가
가장 작은 새끼 한 마리를 조심스레 품에 안았다.
따뜻한 체온이 손끝으로 번졌다.
그 순간, 백구가 고개를 들었다.
노을빛이 눈에 비쳤다.
그 눈을 마주치는 순간,
덕배의 가슴이 콱 막혔다.
한참을 말없이 서 있다가
작게 중얼거렸다.
“미안혀, 백구야... 잠깐만... 얘 좀 데려갈게.”
백구는 잠시 덕배를 바라보다
낮게 ‘크으’ 하고 울었다.
마치 이해라도 한 듯,
몸을 돌려 새끼들을 다시 품에 안았다.
덕배는 강아지를 품에 꼭 안고
뒷문을 조심스레 나섰다.
해가 산 너머로 완전히 지고,
하늘이 보랏빛으로 물들 때였다.
영수네 마당 앞에 다다르자
낡은 대문 밑으로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왔다.
덕배는 살짝 열려있는 대문을 열고
마당을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지나쳐
무릎을 꿇고 마루 밑을 들여다봤다.
그곳에 강아지를 살짝 내려놓으며 속삭였다.
“조용히 있어야뎌.”
강아지가 덕배의 손끝을 잠시 핥았다.
작은 혀의 온기가 남았다.
덕배는 손바닥을 한 번 쥐었다 폈다.
“영수랑 잘 지내야혀, 알겠지?"
덕배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잽싸게 마당을 빠져나왔다.
아무도 눈치채지 않기를 바라는 듯이.
마을 어귀를 벗어나자
바람에 감잎 냄새가 섞여왔다.
덕배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작게 웃었다.
“짝꿍 선물, 끝.”
그날 저녁, 영수네 밥상 위엔
김치찌개와 멸치볶음이 올려져 있었다.
할머니는 밥을 덜며 말했다.
“얼른 묵어, 식으면 맛 없잖여.”
영수는 대답 대신 젓가락만 들었다.
밖은 벌써 어두워졌고,
마당 끝 장독대가 희미한 달빛에 잠겨 있었다.
그때였다.
“낑... 낑...”
작고 여린 울음소리가 들렸다.
영수가 고개를 들었다.
“할머니, 들으셨어요? 방금 밖에서요...
강아지 우는 소리 같아요.”
둘은 동시에 마당으로 나섰다.
찬 바람이 코끝을 스쳤고,
어둠 속에서 다시 소리가 났다.
마루 밑이었다.
할머니가 등잔불을 들고 허리를 굽히자
작은 강아지 한 마리가 웅크린 채 덜덜 떨고 있었다.
“어메, 이게 웬 강아지여... 어디서 왔을까?"
할머니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직 어린 새낀디,
이 밤중에 워쩌다 여까정 왔을까.”
영수는 조심스레 쭈그리고 앉아 바라봤다.
강아지는 코를 킁킁대며 영수의 발끝을 향해 다가왔다.
“저리 가.”
작은 눈동자가 자신을 비추는 게 낯설었다
영수가 단호하게 말을 하자 강아지가
순간 움찔거렸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계시던
할머니가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안되거써, 일단 들이자. 새벽엔 찰지게 추울 테니께.”
영수는 놀란 눈으로 할머니를 바라보았다.
"강아지를 집에요? 할머...."
영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할머니는
강아지를 품에 안고 집 안으로 데려왔다.
강아지는 할머니의 품에 몸을 비비며
작게 낑낑거렸다.
그날 밤, 이불을 덮고 누운 영수는
낯선 느낌에 눈을 떴다.
이불 아래에서 무언가가 꼬물거렸다.
“야, 나가. 추워도 안 돼.”
그는 강아지를 살짝 밀어냈다.
하지만 잠시 후, 다시 꼬물꼬물.
그럴 때마다 영수는 계속해서 밀어냈다.
그렇게 몇 번을 더 밀어냈을까?
이번엔 작은 녀석이 영수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숨결이 따뜻했다.
‘참 고집 세네...’
영수는 중얼거리며 몸을 돌렸다.
결국 영수는 체념한 듯 가만히 있었다.
잠시 후,
작은 숨소리가 이불속에서 들려왔다.
새근새근, 아주 잔잔하게.
영수는 눈을 감은 채 한참을 듣고 있었다.
이상했다.
가슴 한켠이 묘하게 간질거렸다.
괜히 목이 꽉 막히는 느낌도 들었다.
마치 오래 잊고 있던 무언가가
조용히 되살아나는 듯했다.
따뜻한 온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