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가을 첫머리에

초가을

by 붕어예요

교실 문을 나서는 순간,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소리가 마을에 울려 퍼졌다.

9월 초, 첫 가을비는 그 굵기와 무게부터가 여름과 달랐다.

땡땡— 종소리가 멎자마자 쏟아진 비에

아이들은 학교 현관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흙먼지마저 쓸려 내려갈 기세로 퍼붓는 빗줄기는

운동장의 마른 흙을 순식간에 진흙으로 바꿔 놓았다.

다섯 아이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우산을 챙겨 온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러다 밤새 여기 있어야 되는 거 아녀?”


석호가 투덜거렸다.

그때 덕배가 빗소리를 듣더니 피식 웃었다.


“에잇, 모르겠다!”


덕배는 갑자기 현관을 박차고 뛰어나갔다.

운동화가 흙탕물 속을 첨벙 가르며 흩뿌렸다.

잠시 멍하니 덕배를 바라보던 석호가 소리쳤다.


“야! 같이 가!”


이내 옥순이가 짧게 환호성을 지르며 망설이던 경자의 팔을 잡아끌었다.

영수도 어쩔 수 없다는 듯 마지막으로 현관을 벗어났다.

다섯 아이는 학교에서 마을 어귀로 이어지는 길을 전속력으로 내달렸다.

그들의 달음박질은 비를 피하려는 몸부림이라기보다,

통제되지 않은 자유를 향한 질주에 가까웠다.

굵은 빗방울이 머리칼을 적셔 눈썹에 매달렸고,

옷깃을 파고든 물이 온몸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아이들은 멈추지 않았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도,

그들은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듯 가까이 붙어 달렸다.

옥순이 옆의 경자의 젖은 손을 꽉 잡았고,

석호는 덕배의 등 뒤에 숨어 웃음을 터뜨렸다.

오직 빗소리와 아이들의 거친 숨소리만이 청포리의 9월 초를 채웠다.

그때, 먹구름 사이로 잠시 비집고 나온 햇살 한 줄기가 아이들 위로 쏟아졌다.

빗줄기는 여전했지만, 그들의 얼굴과 몸 위를 타고 흐르는 빗물은 순간적으로

수천 개의 작은 유리 조각처럼 반짝였다.

물보라와 흙탕물마저 금빛으로 빛났다.


마치 시간이 멈춘 듯, 젖은 몸과 웃음소리, 그리고 빗물의 윤슬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어린 시절의 한 장면으로 새겨졌다.

아이들은 마침내 마을 어귀의 늙은 느티나무 아래로 몸을 던졌다.

무성한 잎들이 빗줄기를 잠시 막아주었다.

그들은 젖은 채 헐떡이며 서로를 바라봤다.

물먹은 옷과 머리카락, 얼굴은 영락없는 생쥐 꼴이었지만

눈빛만큼은 유난히 맑고 투명했다.

옥순이 젖은 머리를 털며 깔깔 웃었다.


“와... 진짜 태어나서 이렇게 비 맞아본 건 처음이여!”


경자가 숨을 고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석호는 느티나무 위에 매달린 잎사귀를 올려다보며 입술에 맺힌 빗물을 훔쳤다.

그들은 말없이 비 내리는 마을을 내려다보았다.

비는 모든 소리를 씻어내고, 풍경은 더욱 선명해졌다.

아이들은 알지 못했지만, 그 순간이야말로 언젠가 가장 그리워질 시간이었다.

비가 갠 뒤 땅이 단단해지고 공기가 맑아지듯,

그 짧은 질주는 그들 마음속에 결코 씻겨 내려가지 않을 다섯 개의 윤슬로 남았다.


다음 날, 비가 온 뒤로 바람이 달라졌다.

아침부터 부두엔 남정네들이 모여 그물을 털었다.

젖은 밧줄이 마당 가득 널리고, 바람엔 파도 냄새 대신 쇠비린내가 섞여 있었다.

마을은 괜히 분주했다. 이르다 할 수도 있었지만, 어촌은 육지보다 겨울이 훨씬 빨랐다.

그날 하루는 이상하게 길었다.

빗물 자국이 남은 지붕이 햇빛에 반짝였고, 바람은 마을을 한 바퀴 돌았다.

아침의 분주함이 저녁엔 고요로 바뀌었다. 그렇게 하루가 저물었다.


그날 밤, 선생님은 담배를 사러 상회에 들렀다.

문을 여는 순간, 안에서 왁자한 웃음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허연 형광등 아래, 낮에 부두에서 보던 아저씨들이 술상에 둘러앉아 있었다.


“선생님! 이 밤중에 어쩐 일이셔유?”


덕배 아버지가 소리쳤다


“담배 좀 사러 왔습니다.”


“그럼 그냥 가면 섭하지. 이리 앉어봐유. 한잔허자고!”


덕배 아버지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손짓했다.

막걸리병이 몇 병이 비어 있었고, 상 위엔 젓가락이 몇 개나 널브러져 있었다.

김치부침개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저는 진짜 괜찮—”


경자네 아버지가 끼어들었다.


“괜찮긴 뭐가 괜찮데유! 젊은 선생이 우리 마을 술맛 좀 봐야 되지 않겄슈?”

잔이 강제로 선생님 앞에 놓였다.

그는 머쓱하게 웃으며 한 모금 들이켰다.

입안에 막걸리 맛이 번지자 주변의 소란이 이상하게 부드럽게 들렸다.

덕배 아버지가 술잔을 돌리며 말했다.


“올해는 고등어가 도망을 쳤다니께.”


석호네 아버지가 응수했다.


“에이, 도망은 무슨 도망이여. 덕배네가 배를 늦게 띄운 거지~.”


“아휴~ 석호네는 부지런 혀서 떼부자 되거써~”


덕배 아버지 말에 상회 안이 한바탕 웃음바다가 됐다.

그때 경자 아버지가 잔뜩 취한 목소리로 말했다.


“노래 한 소절 해야지!”


“아이고, 이 형님 또 시작이여.”


덕배 아버지가 웃었다.


“선생님, 노래할 줄 아슈?”


경자 아버지가 막걸리병에 숟가락을 꽃아 선생님에게 넘기며 말했다.

그러자 선생님은 손사래를 쳤다.


“듣는 건 잘합니다.”


덕배 아버지가 웃으며 말했다.


“그랴~ 듣는 것도 실력이지 뭐. 형님이 한곡 뽑아봐유~”


덕배 아버지가 젓가락으로 상을 두드리며 장단을 맞추니

경자 아버지가 목을 가다듬고는 이내 목청을 높여 노래를 불렀다.


“에이~ 바다야, 이놈의 바다야—”


음정은 엉망인데, 흥만은 넘쳤다. 술잔이 돌고, 웃음이 따라 돌았다.

그때 상회 구석에 앉아 있던 덕배가 투덜거리며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났다.


“에이, 난 용필이 형님 노래나 들어야 겄네.”


그 말에 상회 안이 와르르 웃음으로 터졌다.

밖에선 파도 소리가 들렸다. 바람은 싸늘했지만,

상회 안은 막걸리 열기와 웃음으로 가득했다.

선생님은 어느새 소리 내어 웃고 있었다.


“선생님, 이제 진짜 청포리 사람 다 됐슈.”

덕배 아버지가 농담처럼 말했다.

그 말에 선생님은 잔을 들어 멋쩍게 웃었다.

바람이 문틈으로 스며들며 술기운 오른 얼굴을 스쳤다. 짧은 밤이었지만,

이상하게 오래 남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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