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동생들 맡아 드립니다. 오늘만.

하루가 너무 빠르게 지나갔다.

by 붕어예요

늦가을 바람이 지붕을 스치며 마을을 쓸고 갔다.
들판에는 벼를 다 베어낸 빈자리가 황갈색으로 드러나 있었고,
잘린 그루터기들만 햇빛을 받아 짧게 반짝였다.
논두렁의 물길은 이미 말라붙어
갈라진 고랑만 가늘게 이어지고 있었다.
멀리 선 썰물이 빠진 갯골 바닥까지
바람이 바스락 소리를 실어왔다.
아침부터 옥순이네 부엌은 부산했다.

“아이구, 올해 마지막 감자 캐는 날이겄네.
옥순아, 엄니 먼저 간다잉! 후딱 따라와라잉~”

엄마는 고무장갑을 허리에 꽂고
머리에 수건을 둘러맨 뒤 신발을 꿰어 신고 나갔다.
대문이 철컥 닫히자 집 안은 갑자기 조용해졌다.
옥순은 마루에 서서
엄마가 골목 모퉁이를 돌아
사라지는 모습을 끝까지 바라보다
훅 하고 숨을 내쉬었다.

“허... 또 시작이네.”

방 안에서는 동생 둘이 이불을 뒤집어쓴 채
아무 데도 안 갈 기세로 늘어져 있었다.

“야들아. 얼렁 옷 갈아입고 감자밭 가자.
엄니 혼자 캐믄 허리 부러진다.”

막내가 이불을 더 단단히 둘러쌌다.

“안 가! 감자밭 싫어! 추워!”

남동생도 곧장 맞장구쳤다.

“맞어. 거기 가믄 손 다 시렵고, 허리 아프고,
발에 흙 끼고, 하나도 안 좋아!”

옥순은 허리에 손을 얹고 동생들을 노려봤다.

“니들이 언제 감자 캐봤냐잉?
맨날 가서 흙놀이만 하먼서.”

말은 그렇게 했지만
혼자 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속이 슬그머니 답답해졌다.
엄마는 이미 한참 전에 밭으로 내려갔을 텐데
동생 둘을 억지로 끌고 가면
울고불고할 모습이 눈에 훤했다.

“진짜 안 가?”

“안 가!”

“죽어도?”

“응!”

막내는 배까지 잡으며 드러누웠다.

“나 배 아픈 거 같어... 감자밭 가면 더 아플 거 같어...”

“에이, 엄살은...”

옥순이 말끝을 이어가려던 순간,
문 밖에서 인기척이 났다.

“옥순아.”

조용하지만 또렷한 목소리.
옥순이 현관 쪽으로 나가 보니
영수가 대문 기둥에 기대 서 있었다.
코끝이 빨갛게 얼어 있었고,
품 안에는 덕배네 백구의 새끼,
아직 이름도 없는 강아지가 얌전히 안겨 있었다.

“영수야, 니 여긴 웬일이여?”

영수는 어색한 듯 강아지 귀를 쓱 쓸었다.

“아, 아까 할머니가 감자밭 품앗이 하러
가신다고 하시길래 혹시 너도 가나 싶어서 와봤어.”

말끝이 흐렸다.
강아지는 꼬리를 살랑거리며 영수를 따라 흔들렸다.

“가야지, 가야는 하는디... 문제여서.”

“무슨 문제?”

그때 방 안에서 동생들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누나~ 안 가아~~!!”

“감자밭 안 가!! 우리 여기 있을 거여!”

막내는 이불을 질질 끌고 마루까지 기어 나왔고,
남동생은 대문 뒤편으로 쏙 숨어버렸다.
영수는 괜히 뒷머리를 긁적였다.

“동생들이 안 가려고 그러나 보네.”

“그러니께. 저것들 끌고 가믄 울고불고 하지,
집에 혼자 두자니 또 영 꺼림칙하지...”

옥순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엄니 혼자 감자밭에 가 계실 텐디...
나까지 안 가믄 안 되거든.”

정적이 잠시 흐르고
늦가을 바람이 대문 틈 사이로 스며들었다.
그 바람에 마당의 마른 낙엽 하나가 데굴 굴렀다.
영수는 동생 둘과 옥순을 번갈아 보다
마음 한쪽이 찌릿하고 뜨끔해졌다.

— 짝꿍.
선생님이 쪽지를 나눠주던 순간,
자신이 뽑았던 종이 위에 적힌 이름.
아직 옥순에게 해준 게 아무것도 없었다는 생각이
유난히 크게 느껴졌다.
그때 막내가 폴짝 뛰어와 영수 팔을 잡았다.

“오빠~ 오빠 놀아줘! 감자밭 안 가려면
오빠가 놀아줘야혀~!”

영수의 눈이 동그래졌다.

“오... 오빠?”

남동생도 대문 뒤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엄니 없는 동안, 형아가 우리 보고 있으믄 안 될까?”

옥순은 그 말을 듣고
영수 쪽으로 몸을 돌렸다.

“영수야, 부탁 하나만 혀도 되겄냐?”

영수는 저도 모르게 자세를 고쳐 앉았다.

“뭔데...?”

“저것들, 좀만 봐줘.
엄니 혼자 감자밭에 계시는디
나까지 안 가면 안 될 거 같어.
근데 둘 다 워낙 말 안 듣는디,
집에 혼자 두자니 걱정되고...”

옥순의 눈동자에는 조바심이 얇게 번졌다.
영수의 심장은 둥둥 울렸다.
집안일, 동생 돌보는 일 따위는
자기 몫이 아니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이상하게도
자기도 이 집의 도움이 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게다가
이건 어쩌면 짝꿍으로서 해줄 수 있는
첫 번째 일일지도 몰랐다.

“...내가... 봐줄게.”

말이 툭 튀어나왔다.
옥순이 눈을 크게 떴다.

“진짜여?”

“응. 너 엄마 도와야 한다며.”

막내는 환호성을 질렀다.

“오빠~~!!”

남동생도 덩달아 소리쳤다.

“그려! 우리 형아랑 있을게!
누나는 감자 캐러 가슈~!”

순식간에 영수 양쪽 팔에 동생 둘이 달라붙었다.
강아지는 그들 사이에서 고개를 갸웃거리며 낑낑 울었다.
옥순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영수야, 진짜 고맙다잉.
나 얼른 일만 돕고, 해 지기 전에 금방 올게.
이놈들이 말 안 들으믄 그냥 문 꽉 잠가. 알았지?”

“아! 문을 왜 잠가!”

“우리 착해!”

동생 둘이 동시에 항의했다.
영수는 웃음을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마. 잘... 해볼게.”

옥순은 고무장갑을 챙겨 골목 아래로 내려갔다.
늦가을 바람이 머리끈을 한 번 휘감고 지나갔다.
마당에는
영수와 강아지,
그리고 옥순 동생 둘만 남았다.
막내가 영수 손을 덥석 잡았다.

“오빠, 우리 뭐 하고 놀까?”

영수는 잠시 멍했지만
남동생이 재빨리 소개하며 분위기를 터뜨렸다.

“나는 철수고, 쟤는 영희야!”

영수는 코를 긁적였다.
잠시 후, 막내가 손을 번쩍 들었다.

“오빠 우리 갯골 가자!”

동생 둘은 영수를 앞장서 끌었다.

“오빠! 빨리 와! 저기 물웅덩이 있어!”

마을 끝 작은 조간대엔
썰물 때마다 바위 사이에 만들어지는
얕은 물웅덩이들이 있었다.
투명한 물속에는
게 한 마리, 작은 고동 몇 개가
굼벵이처럼 붙어 있었다.
영수는 조심스레 말했다.

“야, 미끄러지니까 너무 가까이 가지 마.”

“안 미끄러져!”

“자주 와봤는디?”

아이들은 바위 위를 폴짝폴짝 뛰었다.
강아지도 신나서 낑낑거리며 따라다녔다.
철수가 바위 구멍을 가리켰다.

형아, 여봐! 작은 게 숨었어!”

영수는 무릎을 꿇고 들여다봤다.
작은 게 한 마리가
바위틈에 숨어 있었다.

“오... 작네.”

“형아, 잡아줘!”

“잡긴 뭘 잡아. 놔둬야지. 집에 가면 죽어.”

철수는 실망한 듯 입을 내밀었다가도
영수가 웃자 금세 다시 신났다.
아이들은 바위 위를 뛰고,
낙엽을 주워서 바람에 날리고,
강아지에게 작고 마른 멸치를
던져주며 깔깔거렸다.
늦가을 햇볕은 차가웠지만
아이들 웃음소리는 따뜻했다.
영수는 갑자기
이 풍경이 자기에게 너무 낯설다는 걸 느꼈다.

‘누가... 이렇게 나랑 놀아준 적이 있었나.’

서울에서의 기억은
대부분 텅 빈 집,
불 꺼진 방
지금은
누군가가 자기 손을 잡고 끌어주고 있었다.

갯골에서 돌아오는 길,
아이들은 길가에 떨어진 감잎을 주워
서로의 머리 위에 올리며 장난을 쳤다.
그렇게 철수와 영희는 투닥거리며
모습이 어쩐지 영수는 부럽기도 했다.

그러다가 영희가 감잎을 접어
영수 이마에 척 붙였다.
영수는 괜히 민망해서
그냥 두 손으로 얼굴만 가렸다.

“아, 하지 마..”

마치 오랫동안 혼자만 켜두었던 방 안에
누군가 갑자기 불쑥 들어와
웃으면서 창문을 확 열어버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집으로 돌아와서는
세 아이와 강아지는 마루에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오빠, 무서운 이야기 해줘!”

“싫어, 재밌는 거! 재밌는 이야기!”

영수는 난감하게 눈만 깜빡였다.

“나, 이야기 같은 거 잘 모르는데...”

기대하던 둘의 얼굴이 실망으로 내려앉았다.

“아, 그려...? 재미없어...”

그 순간, 골목 아래에서
아주머니들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아이고, 오늘 감자가 엄청 났다잉!”

“허리 끊어지겄슈~ 얼른들 들어가!”

잠시 후,
옥순과 엄마가 모습을 드러냈다.
바구니 두 개를 들고
흙먼지가 묻은 손등,
땀 맺힌 이마,
하지만 어딘가 푸근한 표정이었다.

“너희들 말 잘 듣고 있었던겨?”

옥순 엄마가 소쿠리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하이고, 배들 고프겄네.
먼저 허기부터 달래야지. 잠시만 기다려라잉.”

옥순이 엄마가 부엌으로 서둘러 들어가고
얼마나 지났을까? 큰 소쿠리 하나를 들고 나와서는
마루 위에 놓여 있는 상에 툭하니 놓았다.
그리고는 그 소쿠리에 덥힌 하얀 천을 걷어 내자
따끈한 김이 훅 하고 올라왔고,
찐 감자와 옥수수 향이
마당 구석까지 퍼져 나갔다.

“우와아아!”

“감자다!! 옥수수다!!!”

두 동생은 벌써 감자를 들고 티격태격했다.

“둘 다 조용혀! 안 그럼 다 영수 줄 거여!”

옥순 한마디에 둘은 바로 입을 닫았다.
영수는 따뜻한 감자 한 알을 받아
조심스레 한입 베어 물었다.
고소한 냄새가 코끝을 간질였다.

“영수야, 너도 많이 먹어라잉.
오늘 고생 많았다며?”

그 말에 영수는 순식간에 가슴이 간질거렸다.
네 아이는 감자와 옥수수를 가운데 두고
빙 둘러앉았다.
철수가 감자를 반으로 쪼개며 외쳤다.

“누나 것보다 내 게 더 맛나!”

“네가 뭔 맛을 안다고여!”

옥순이 철수 머리를 살짝 쥐어박았다.
영희는 영수에게 바짝 다가와
옥수수를 들이밀었다.

“오빠도 한입 먹어봐! 이게 진짜루 달어!”

강아지는 영수 무릎 위에 철썩 올라왔다.
작은 체온이 손등을 타고 스며들었다.
할머니와 둘이서 먹던
조용한 밥상과는 전혀 다른 풍경.
아이들 웃음이 끊이지 않고,
서로 먹겠다고 다투고,
강아지까지 엉겨 붙는
정신없는 자리인데—
영수는 이상하게
그 소란이 싫지 않았다.
감자를 한입 더 베어 물며
작게 웃었다.

“재밌네... 이런 거.”

옥순이 그런 영수를 보다가
감자 껍질을 손끝으로 떼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영수야, 이렇게 정신없어도
다 같이 먹어야 더 맛난겨.”

감자향과 옥수수향이
늦가을 바람을 타고 퍼져 나갔다.
영수는 그 향 속에서
묘하게 따뜻한 냄새를 느끼며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