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것도 소풍은 소풍이라고 잠이 오질 않네요.
늦가을 아침 공기는 유난히 서늘했다.
밤새 마당을 스친 바람이 마루 틈새로 스며들어
옥순의 발등을 차갑게 건드렸다.
어제 감자밭에서 일손을 돕느라
손가락 마디가 아직 얼얼했지만
아침부터 챙겨야 할 일은 여전히 많았다.
“철수야, 영희야. 옷 좀 챙겨 입어.
가만히 있으면 감기 걸린다니까.”
동생 둘은 이불 끝을 움켜쥐고
겨우 얼굴만 내밀며 보챘다.
“누나 먼저 씻어~~~ 물 차가워!”
“아이고, 이놈들아...”
옥순은 혀를 찼지만
입꼬리는 슬며시 올라갔다.
마루 끝에 걸쳐 둔 양은 대야를 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래도 핵교 가는 거니께 어제처럼
또 안 간다고 떼쓰진 않겄지?’
그때,
대문이 삐걱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옥순아~ 핵교 가자~”
경자의 목소리였다.
늘 조용하지만 밝고,
부잣집 딸이지만 잘난 티를 내지 않는 아이.
“이이, 금방 나갈게!”
옥순은 바삐 머리를 빗으며 외쳤다.
경자는 대문 앞에 서서
옥순네 마당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빨랫줄엔 덜 마른 손수건이 바람에 흔들리고,
장독대 옆에는 감자밭에서 묻어온 흙자국이
흐릿하게 남아 있는 소쿠리가 놓여 있었다.
‘옥순이는 참 부지런허다.’
경자는 잠깐 그런 생각을 했다.
집에 가면 늘 어른들 소리,
계장집 특유의 번잡함,
그리고 가끔은 형식적인 칭찬만 오가는 공간과는
사뭇 달랐다.
“미안혀~ 동생들 챙기느라 좀 걸렸네.”
옥순이 숨을 고르며 말했다.
“아녀... 나도 온 지 얼마 안 됐잖여.”
두 아이는 함께 골목길을 나섰다.
아직 차가운 아침 공기 속에서
둘의 숨결이 희미하게 번졌다.
발밑의 흙길이 바삭하게 얼어 있었고,
멀리 선 파도 소리만 희미하게 들려왔다.
두 아이는 말없이 걸었지만
바람 사이로 스치는 마음만큼은
서로에게 따뜻했다.
교실 문을 열자마자
또 한 번 차가운 바람이 훅 들이쳤다.
옥순은 가방을 끌어안은 채
경자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아이고, 추워 죽겄네.”
“오늘따라 더 찬 거 같지 않어?”
경자가 손등을 비벼가며 웃었다.
둘은 서로의 빨갛게 언 손등을 슬쩍 바라보았다.
첫 수업 종이 울렸는데도
아이들 목소리가 교실을 가득 채웠다.
곧이어 선생님이 들어오자
아이들은 그제야 허둥지둥 자리를 잡았다.
출석부를 펼치려는 순간,
덕배가 팔을 쭉 들고 외쳤다.
“선생님! 우리 소풍 언제 가유?”
선생님은 출석부를 펴다 말고
고개를 갸웃했다.
“소풍...? 갑자기 웬 소풍 타령이야?”
아이들은 기다렸다는 듯
여기저기서 손을 들기 시작했다.
“바닷가로 가유!”
“멀리 말고 저기 갯바위까지만 가면 되는디!”
옥순은 그 모습을 보다가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아이들 소란이 점점 커졌다.
“선생님~~!! 우리 진짜로 가유우~~”
“도시락 싸 오고 고무줄도 챙겨 올게유!”
선생님은 결국 출석부를 덮고
교실을 한 바퀴 둘러보며 깊게 한숨을 쉬었다.
“얘들아. 지금 당장은 안돼.”
순식간에 교실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하지만
선생님이 곧 미소를 지었다.
“이 녀석들... 그렇게 소풍이 가고 싶어?”
아이들 얼굴이 동시에 환해졌다.
“야!! 가고 싶고 만유!!”
선생님은 아이들 얼굴을 하나하나 바라보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내일 점심시간에 도시락 싸 와라.
수업 조금만 하고, 바닷가 나가서 먹자.
그것도 소풍이지.”
잠깐의 정적.
그리고—
와아아아—!!
교실 전체가 한꺼번에 들썩였다.
“진짜쥬?!”
“엄니한테 말해야지!!!”
옥순도, 경자도
서로를 바라보며 작게 웃었다.
창밖에서는
늦가을 햇볕이 잔잔하게 내려앉아
아이들의 설렘을 더욱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그 설렘은 수업이 끝나고 학교 문을 나서는 순간까지
아이들 어깨 위에서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도시락 뭐 싸갈껴?”
"너무 재밌겄다~"
"내일 비는 안오겄지? 가을비가 영 안왔잖여~"
골목길마다 작은 웃음들이 튀어 올랐다.
그러다 어느새 해가 산등성이 뒤로 넘어가자
청포리 마을은 파란 저녁빛 속에 잠겼다.
각 집 부엌 창마다 노란 불빛이 켜지고,
오늘 들은 ‘소풍’이라는 한마디는
집집마다 온기를 돌게 하는 듯했다.
바닷바람은 여전히 차가웠지만
저녁으로 기울어가는 마을엔
알 수 없는 들뜬 숨결이 천천히 퍼지고 있었다.
옥순은 마루에 털썩 앉아
동생들 밥을 퍼주며
도시락 통을 힐끔거렸다.
“뭘 싸가야 허나...”
중얼거리면서도
기분은 이상하게 가벼웠다.
감자밭에서 굳었던 어깨가
저절로 풀리는 듯했다.
늦은 볕이 담장을 넘어가려 할 무렵,
조금 떨어진 큰집에서는
경자가 저녁밥을 먹으며
숟가락을 또박또박 내려놓고 있었다.
“경자야, 왜 그리 씨익 웃고만 있냐?”
아버지가 신문을 들다 말고 물었다.
“아, 내일 바닷가 가서
도시락 먹는다구 그러더라구유.”
말끝이 살짝 올라갔다.
그러자 안방에서 어머니가 급히 걸어 나왔다.
“이잉 그려? 그럼 엄니가 김밥 넉넉히 싸줄게.
친구들 허고 나눠 먹어라이.”
그 한마디가
경자의 가슴속을 조용히 데웠다.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기쁨이
속에서 둥실 떠올랐다.
그 시각, 골목 아래 상회집에서는
덕배 목소리가 저녁 바람보다 더 크게 퍼졌다.
“엄니! 고무줄 새 거 좀 줘유!
내일 소풍 간다니까유!”
“거기 구석에 있는 거 쓰면 되잖여.”
“그건 늘었났다니께유?"
어머니는 못 이기는 척
새 고무줄을 하나 꺼내 던졌다.
덕배는 그것을 손가락에 탁탁 튕기며
스스로 씨익 웃었다.
“내일 영수 도시락 뭐 싸 오나 보자~”
툴툴거리면서도
그 눈빛은 이미 반짝거렸다.
어둠이 밀려오는 골목 위로
그 웃음이 가볍게 퍼져나갔다.
바닷가 가까운 집에서는
석호가 책가방을 열었다 닫았다 하며
괜히 들뜬 모습을 숨기지 못했다.
“점심 바닷가 간다 혔지?”
고등어 굽던 어머니가 슬쩍 물었다.
“계란 삶아 넣어주까?”
석호는 시큰둥한 척 고개를 돌렸다.
“아무거나 넣어줘유.”
말은 무심한데
책가방을 만지는 그 손끝은
설렘을 꽤나 드러내고 있었다.
창문 틈으로 들어온 바닷바람이
방 안을 한 번 돌고 나가자
석호 눈빛까지 따라 흔들렸다.
그리고 언덕 아래 작은 집.
영수는 가을이를 무릎에 올려놓고
밥상을 치우는 할머니를 바라봤다.
“할머니, 내일 소풍 간대요.”
“그려? 그럼 반찬을 뭘 싸줘야 허나”
할머니는 짧게 웃었다.
영수는 가을이를 꼭 안아 올리며
작게 중얼거렸다.
“가을아, 너도 같이 가면 좋을텐데...”
작은 강아지의 체온이
영수 팔에 포근히 스며들었다.
창밖으로는 파도 부딪히는 소리가
저녁 공기와 함께 잔잔히 불어왔다.
그날 밤,
청포리는 온통 들뜬 숨결로 가득했다.
누군가는 반찬을 고민했고,
누군가는 고무줄을 튕겼고,
누군가는 도시락 뚜껑을 반짝이게 닦았다.
각 집의 불빛은 따로 켜져 있었지만
그 불빛들이 지붕 위에서, 골목 위에서
작게 흔들리며 서로 이어지는 듯했다.
내일이면,
작고 소박한 소풍이 펼쳐진다.
아이들은
이불을 덮고도 한참 동안 눈을 감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