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말만큼은 하지 말았어야지.
늦가을 아침 햇살이
마을 지붕들을 사선으로 훑고 내려갔다.
찬 기운이 여전했지만,
오늘만큼은 공기 속에 묘한 들뜸이 섞여 있었다.
아이들은 평소보다 반 걸음씩 빨리 걸었다.
손에는 각자 집에서 정성껏 싸 온 도시락이 들려 있었다.
양은 도시락 손잡이가 차갑게 손바닥을 파고들었지만,
그 무게가 오늘만은 이상하게 든든했다.
“야, 오늘 파도 클랑가.”
덕배가 상회집 앞을 지나며
괜히 허공에 돌을 한 번 던져봤다.
돌은 땅을 두 번 튕기고
수챗구멍 앞에서 데구루루 멈췄다.
“덕배야, 추운디
괜히 또 물에 들어가지는 말어.”
옥순이 도시락을 가슴께로 끌어안으며 말했다.
“에이, 발만 좀 담그는 건 괜찮겄지. 그지, 영수야?”
갑자기 이름이 불리자 영수는 가볍게 어깨를 움찔했다.
“나는 그냥 구경만 하려고.”
그 말에 덕배가 히죽 웃었다.
“그려, 너는 사진처럼 구경이나 허고 있어.
우린 실컷 뛰 댕기고.”
경자는 말없이 아이들 뒤를 따라 걸었다.
손에 쥔 도시락에서 은근한 김밥 냄새가 올라왔다.
엄마가 “친구들이랑 나눠 먹어라.” 하며
김밥을 한 줄 더 얹어줬던 손길이 생각나
괜히 도시락 손잡이를 한 번 더 꼭 쥐어보았다.
교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밤새 식지 않은 아이들 기운이
이미 자리를 먼저 차지하고 있는 것 같았다.
“자, 전부 앉아라.
오늘 소풍 가는 건 맞는데,
그래도 오전 수업은 하고 가야 하니까.”
선생님이 출석부를 들고 들어오며 말했다.
“선생님~ 오늘은 그냥 가면 안 돼유?”
“바닷가 요 앞인디...”
여기저기서 투덜거림이 터져 나왔다.
선생님은 일부러 인상을 살짝 찌푸려 보였다가
금세 피식 웃음을 흘렸다.
“소풍 가기 전
산수 한 장은 풀고 가야 되는 거야.
안 그러면 선생님이 고개를 못 들어요.”
아이들이 마지못해 공책을 꺼냈다.
하지만 연필 끝은
문제보다 창밖 햇살을 더 자주 쳐다봤다.
쉬는 시간 종이 울리자마자
도시락 이야기가 다시 시작됐다.
“야, 나 뭐 싸왔게?"
덕배는 슬쩍
석호 책상 옆으로 다가갔다.
“너는 뭐 싸왔냐?”
석호는 가방 옆에 조심스레 세워둔 도시락을
잠깐 내려다보더니 짧게 말했다.
“그냥 싸왔어”
“허어, 그래도 싸 오긴 혔네?
바닷물은 안 마셔도 되것고만”
덕배가 장난스럽게 웃자
주변에서 킥킥거리는 소리가 났다.
석호는 아무 말 없이
연필만 더 꾹 쥐었다.
경자는 그 모습을 힐끔 보다가
고개를 숙이고 중얼거렸다.
“덕배 저것이 또 시작이 고만...”
시간은 느릿느릿 가는 듯하면서도
또 어느새 점심 종소리를 데려왔다.
종이 울리자
아이들은 기다렸다는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도시락 챙겨서 운동장으로 모여라!”
선생님 목소리가 복도 끝까지 울렸다.
교실 문을 나서는 발걸음마다
양은 도시락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딸랑딸랑 따라붙었다.
어느새 선생님은 교실 앞이 아니라
운동장 한쪽에 서 있었다.
흰 와이셔츠 위에 체크무늬 조끼,
검은 외투.
“자, 전부 다 왔니?”
“야아~~~!!!”
아이들 대답이 오늘만큼은 유난히 길게 끌렸다.
“지금부터 바닷가까지 줄 맞춰서 갈 거야
뛰어가다 넘어져서 도시락 깨 먹으면,
선생님이 울 수도 있다. 알았지?”
몇몇 아이들이 킥킥 웃었다.
“그리고 바닷물에는 절대 들어가지 말고
바위 위에서 장난치다가 미끄러지지 말고.
선생님 얘길 잘 들어야 안전하고
제일 재밌게 노는 거다. 알았지?”
"야아~~”
선생님이 앞에서 길게 서고,
그 뒤로 아이들이 둘씩 줄을 서서 따라갔다.
논두렁은 이미 비어 있었다.
벼를 베어낸 자리마다
짧은 그루터기들이 햇빛을 받아 누렇게 빛났다.
멀리서부터 짭조름한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바다가 가까워질수록
아이들 발걸음도 한 번씩 튀어 올랐다.
“야, 저기 파도 보인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소리쳤다.
회색빛 바다 위로
늦가을 햇살이 잔잔하게 부서지고 있었다.
바닷가에 도착하자
선생님은 모래가 비교적 고운 한편을 가리켰다.
“여기다 자리 펴고 놀자. 먼저 조금 놀다가,
선생님이 부르면 전부 모여서 도시락 먹는 거다. 알았지?”
“야아~!”
아이들은 도시락을 한데 모아
그늘진 바위 옆에 가지런히 놓고는
곧장 파도 쪽으로 달려 나갔다.
바닷바람은 차가웠지만,
아이들 웃음은 한층 더 따뜻했다.
어디선가 갈매기 울음소리가 섞여 들어왔다.
모래를 차며 도망가는 파도를 쫓다가,
끝까지 따라갔다가 물이 한 번 발목을 적시면
“으악— 차가워!!”
하고 소리 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영수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파도 끝에 발만 살짝 내밀었다 뺐다 하면서
도시락 쪽을 한 번씩 돌아보았다.
석호도 처음에는
멍하니 바다 수평선만 바라보다가
결국 아이들 뒤를 따라가 모래를 한 움큼씩 집어던지며
한두 번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이
오늘 하루 아무 일도 없을 것 같다는 예감을
잠시나마 믿게 만들었다.
“자, 전부 이리로 모여라!
배고프지? 도시락 먹자!”
선생님이 양손을 모아 입에 대고 외쳤다.
아이들은 아쉬워하면서도
파도에서 돌아 나와 바위 옆으로 모였다.
모래 위에
한 줄로 도시락들이 쫙 펼쳐졌다.
양은 도시락 뚜껑이 하나둘 열리자
김 냄새, 볶은 멸치 냄새,
김치와 계란, 김밥 냄새가
늦가을 바닷바람과 섞여 천천히 퍼졌다.
“우와, 김밥이다!”
“야, 니 도시락 반찬 뭐여? 햄이네, 햄!”
여기저기서 감탄사가 터졌다.
덕배는 자기 도시락 뚜껑을
일부러 더 요란하게 열어젖혔다.
“자, 보시라— 이 덕배님 도시락이고만~”
둥근 계란부침과
노랗게 부친 어묵,
촘촘하게 채 썬 김치,
그리고 작은 소시지까지 가지런했다.
“우와— 덕배야, 너네 집 부자여?”
옥순이가 놀란 눈을 하고 물으니
덕배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려, 잘 좀 대해 줘~
먹고픈 애들 나중에 줄지 말지는
내 기분에 따라 달라지는겨~”
근처에 앉아 있던 아이들이
킬킬거리며 웃었다.
그때
덕배 눈에 한 아이가 들어왔다.
석호는 아직
자기 도시락 뚜껑을 열지 않고
손으로만 쓰다듬고 있었다.
모래가 묻을까 봐 조심하는 손길이
어딘지 모르게 어색했다.
덕배는 괜히 장난기가 발동했다.
“야, 석호야.”
“...”
덕배의 도시락을 보고는
석호는 알게 모르게 주늑이 들었다.
덕배는 그걸 눈치 못 채고
더 신났다.
“허~ 그럼 또 김하고 김치냐?
맨날 똑같은 것만 싸 오지 말고 말여.
어디 한번 구경이나 해보자—”
말이 끝나기도 전에
덕배 손이 쑥 앞으로 나가
석호 도시락 손잡이를 툭 건드렸다.
석호가 번쩍 도시락을 끌어당겼다.
“건들지 마.”
“야, 잠깐만 보자니까 그려
내가 먹는다고도 안 했는디 왜 그러냐?”
덕배는 웃음 섞인 목소리였지만
석호는 웃지 않았다.
눈가가 조금씩 모였다.
“하지 마, 내 건 내가 알아서 먹을겨”
“뭐 그렇게 악착같냐, 진짜—
야, 잠깐만, 잠깐만!”
순식간에
도시락 하나를 사이에 둔 줄다리기가 시작됐다.
석호는 안 빼앗기려고
두 손으로 손잡이를 꽉 움켜쥐었다.
덕배는 어깨에 힘을 잔뜩 주고
낚아채듯 잡아당겼다.
“야, 진짜 놔. 하지 말랬잖여!”
“에이, 그럼 더 궁금허잖여!
뭔 대단한 게 들었길래 이래!”
주변에서 아이들이
“야, 야— 그만해라.”
라고 중얼거렸지만
두 사람 귀에는 잘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다가
툭—
어디선가 힘의 균형이 무너지며
도시락이 두 손에서 동시에 빠져나갔다.
철컥—
도시락은 모래 위에 떨어지며
뚜껑이 옆으로 굴러갔다.
안에 있던 내용물들이
한 번에 쏟아져 나왔다.
껍질을 미리 벗겨 둔
삶은 계란 세 개.
작은 종지에 싸 온 소금.
모래 위로
그게 그대로 떨어져 굴러갔다.
하얀 계란 표면에
거친 모래알들이 박혔다.
파도 소리가
갑자기 더 또렷하게 들리는 것 같았다.
아이들 숨소리마저 잠시 멎었다.
석호는 그 광경을
얼어붙은 채로 내려다보았다.
잠깐,
정말로 아주 잠깐—
아무 소리도 없었다.
그다음,
천천히 고개가 들어 올랐다.
“너... 뭐 하는 거여.”
목소리는 낮았지만
끝이 떨렸다.
덕배는
그제야 사태를 깨달은 얼굴이었다.
“야, 나도 이렇게까지 될 줄은—
네가 그렇게 세게 잡아당기지만 않았어도—”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석호의 주먹이 먼저 날아갔다.
퍽—
둔탁한 소리가 모래 위로 떨어졌다.
덕배 머리가 옆으로 확 돌아갔다.
“너 때문에 이렇게 됐잖여!!”
석호가 다시 달려들었다.
덕배는 뒤로 밀리다가
곧바로 몸을 세워 맞받아쳤다.
“야 이 씨— 장난한 거 가지고 뭔 난리여!!
네가 악착같이 달라붙지만 않았으면
그냥 돌려줬을 거 아녀!
그거 니 탓이여, 니 탓!!”
“아냐!! 너, 네가—!!”
두 아이는 서로의 옷깃을 움켜쥐고
모래 위를 구르듯 뒤엉켰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주먹과 팔이 허공을 휘저었다.
모래가 튀고,
누군가의 입에서 짧은 비명이 새어 나왔다.
“야!! 그만 혀!!”
가장 먼저 뛰어든 건 옥순이었다.
그 뒤로 영수가
허겁지겁 둘 사이에 팔을 집어넣었다.
“하지 마! 그만해, 진짜로!!”
경자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입술만 달달 떨다가 목이 터져라 불렀다
“선생님—!!”
멀리 파도 쪽을 둘러보고 있던 선생님이
소리를 듣고
허둥지둥 달려왔다.
“야, 너희 뭐 하는 거야! 당장 그만 안 둬?!”
선생님이 양쪽에서 팔을 잡아떼어내자
두 아이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떨어졌다.
석호 입가에는
작게 터진 피가 번져 있었고,
덕배 두 뺨도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둘 다, 지금 당장 사과—”
선생님 말이 끝나기 전에
덕배가 먼저 소리쳤다.
눈가가 붉게 충혈된 채였다.
“뭐, 뭘 내가 잘못했냐고!!
장난 좀 친 거 가지고 지가 난리고만!
맨날 예민하게 굴다가
이 꼴 난 거 아녀!!”
“닥쳐.”
석호가 낮게 말했다.
손등에는 긁힌 자국이 나 있었다.
“뭐라고? 또 쳐보려고?
그래, 니 그 주먹질,
너네 아부지 올 때마다 그렇게 맞더니
그래서 배운 거지? 응?!”
순간—
모래 위 공기가 싸늘하게 식었다.
덕배도 본인이 말을 해놓고는
아차 싶었는지 고개를 떨구고는
석호의 눈을 피했다.
누구 하나 숨도 크게 쉬지 못했다.
석호의 눈이
갑자기 텅 빈 것처럼 보였다.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한참을 대답 못하고 서 있다가,
석호는
선생님 팔을 뿌리치듯 뺨 옆으로 쓸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휙 돌아섰다.
“석호야!”
선생님이 다급히 불렀지만
이미 늦었다.
석호는
마을 쪽으로,
갯골 옆 흙길을 따라
있는 힘껏 달려가기 시작했다.
모래를 박차고 올라
작은 둔덕을 넘고,
돌담과 작은 창고를 스쳐
골목 쪽으로 몸을 숨겼다.
아이들 눈앞에서
작은 뒷모습이
금세 사라져 버렸다.
바닷바람이
잠시 아무 냄새도 나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모래 위에는
계란 셋과 소금이
그대로 흩어져 있었다.
누군가의 도시락 뚜껑은
아직도 바람에 살짝살짝 흔들리고 있었다.
선생님은
한동안 아무 말도 못 하고
그 자리에서 숨을 고르다가
천천히 고개를 떨구었다.
그 옆에서 영수가
모래 위 계란을 바라보다
손을 뻗으려다 말고
주먹을 꼭 쥐었다.
“... 선생님.”
옥순이 조심스레 불렀다.
“이건... 저희가 치울게유.”
늦가을 햇볕이
해변 한가운데
어색하게 언 모래 위를 비추고 있었다.
아이들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누구는 흩어진 도시락을 모으고,
누구는 모래 위에 떨어진 뚜껑을 주워
조심스레 닦았다.
멀리서 파도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여전히 같은 리듬으로 밀려왔다가
부서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