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마음이 앉은자리

반창고로 남다.

by 붕어예요

바닷가 소동은
해가 중천을 막 넘길 무렵 고요히 끝났다.
아이들은 도시락을 다시 꾸역꾸역 챙겨 들고
조용히 줄을 맞춰 학교까지 돌아왔다.
석호가 사라진 자리만
바닷모래처럼 어색한 빈자리를 남긴 채였다.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하자.”

선생님 목소리는
평소보다 조금 더 잠겨 있었다.

덕배는 아이들 뒤에서
작게 말없이 고개만 푹 숙이고 있었다.
아무도 그에게 말을 건네지 않았다.
아이들이 빠르게 흩어지는 동안
덕배는 혼자 운동장 가운데에 남았다.

선생님은
조용히 숨을 고른 뒤
덕배에게 다가갔다.

“덕배야.”

“...”

“덕배야, 집에 같이 가자 아무래도 오늘 일을
어머님께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

덕배는 울먹일 듯 말 듯
입술만 꾹 깨물었다.

상회 문을 열자
문 위 종이 허전하게 딸랑 울렸다.

덕배 엄마는
쌀 포대를 정리하다가
아들이 고개 숙인 채 들어오는 걸 보고
눈부터 커졌다.

“이? 김덕배 표정이 왜 그런겨?”

뒤이어 들어오신 선생님이 깊게 허리 숙여 인사했다.

"덕배 어머님, 안녕하셨어요?"

덕배 엄마가 선생님을 보고는 깜짝 놀라
허리에 두른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허리를 굽혔다.

"아이고, 선생님 오셨어유?"

“예, 다름이 아니라 어머님께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잠시 뒤,
상회 안엔 정적만 가득했다.

선생님이 바닷가에서 있었던 일,
도시락, 싸움,
마지막에 덕배가 한 말까지—
차례로 조용히 설명하자

덕배 엄마 얼굴이 굳어지고
서늘하게 질렸다.

“덕배야.”

“... 엄니...”

“니 입에서... 그런 말이 나왔단 말이여?”

덕배는 대답을 못 하고
고개만 더 깊이 숙였다.

찰칵—
덕배 엄마가 슬리퍼를 벗어 들었다.

그리고 이윽고 덕배의 엉덩이를 때리기 시작했다.


“엄니...”

짝!
짝!
짝!

작게 울리는 소리가
상회 안을 울렸다.
덕배 엄마는 얼굴이 빨개져서는

울분을 토하듯 말을 했다.


“니가... 니가 아무리 어리고, 장난을 좋아 혀도!
할 말이 있고, 못 할 말이 있는겨!”

덕배는
엉덩이를 감싸며 이를 꽉 물고 있었다.
눈가가 벌겋게 젖고 있었다.

선생님이 황급히 나섰다.

“어머님, 어머님! 그만하세요.
덕배도 반성을 많이 했을 겁니다.”

덕배 엄마는
손에 든 슬리퍼를 내려놓고
선생님 앞에서 연거푸 허리를 숙였다.

“선생님, 죄송 혀유. 하이고, 이걸 어찌…
지가 다 잘 못 가르쳐서 그렇고만유...”

“그럴 수 있습니다. 아이들 이니까요.
하지만 석호가 상처를 많이 받았을 것 같아서
걱정이 되네요.”

덕배 엄마는
눈가를 훔치며 고개만 끄덕였다.

선생님이 돌아간 뒤,
상회는 다시
숨조차 크게 쉴 수 없는 정적에 잠겼다.

덕배는
흑흑 울지도, 변명도 못 하고
그냥 턱을 꾹 깨문 채 서 있었다.

그러다
‘툭’ 하고 무언가가 끊어지듯
덕배 엄마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려, 내가 이렇게 있음 안되지.”

그리고는 상회 진열대에서
과자 봉지를 몇 개씩 꺼내기 시작했다.

사루비아, 범벅과자, 새우깡, 뻥과자—
손에 잡히는 대로 모조리 큰 봉지에 넣었다.

봉지가 점점 빵빵해졌다.

덕배가 멍하니 쳐다보자
엄마가 단호하게 말했다.

“앞장서. 석호네 갈 거니께.”

덕배 목이
‘꼴깍’ 하고 떨렸다.

“... 엄니, 지금유...?”

“그려. 지금 갈 거여. 그니께 앞장서.”

덕배는 고개를 푹 숙이고
어깨를 우물처럼 말아 넣었다.

그 모습은
마치 소가 도살장에 끌려가는 것처럼
터덜터덜, 힘없이 보였다.

그렇게
두 사람은 과자 봉지를 하나 들고
석호네 골목을 향해 걸어갔다.

“석호 엄마아—!! 집에 있는겨?!”

덕배 엄마가 대문을 세 번 두드렸다.

잠시 후
석호 엄마가 놀란 얼굴로 문을 열었다.

“덕배 언니? 이 시간에 저희 집엔 웬일이 셔유?”

덕배 엄마가
숨을 한번 깊게 들이쉬고
모든 일을 설명했다.
대충 돌려 말하지도
감추지도 않았다.

말이 이어질수록
석호 엄마는 입술을 떨며 들었다.

“아니.. 그게...”

덕배 엄마는
과자가 잔뜩 든 봉지를 조심히 두 손으로 건넸다.

“이걸... 석호한테 좀 전해줘...
이깟 과자 몇 봉지로 덕배의 잘못을 덮을 수는 없지만..
아휴.. 석호 엄마 증말루 미안혀.”

석호 엄마는
여전히 충격에 가득 찬 얼굴로 말했다.

“아녀유, 언니.
애들이 그럴 수도 있쥬...
그람.. 우리 석호는 워딜 간거래유?”

덕배 엄마가 고개를 갸웃 거리며 되물었다.

"이이? 석호 여적 집에 안 들어왔어?"

그 물음에 석호 엄마가 고개를 천천히 끄덕거렸다.

"야... 늦길래 지는 덕배랑 노는 줄 알았는디..."

순간
덕배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석호가 여적 안 들어왔다 구유?!"

그리고는 뭔가를 생각하는 듯하더니
“아!” 하고 한 번 숨을 들이켰다.

“엄니! 지 잠시 다녀올게유. 먼저 집에 가 계셔유”

그리고는
말도 끝내기 전에
마을 어귀 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덕배 엄마가 놀래서 뒤를 돌아보며 외쳤다.

“덕배야! 지금 어딜 가는겨!”

마을 어귀,
오래된 느티나무 아래.

거기엔—

석호가
무릎을 ‘꽉’ 끌어안은 채
조용히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바람이 지나갈 때마다
나뭇잎들이
그의 어깨 위로 조용히 떨어졌다.

덧없이 작은 뒷모습.
울지도 않아서
더 슬픈 뒷모습이었다.

덕배는
몇 발자국 앞에서 멈춰 섰다.
숨이 턱턱 막혔다.
발끝이 모래에 박혀 움직이지 않았다.

조심스레
한 발…
또 한 발…

쭈뼛쭈뼛 다가가며
작게 입술을 떨었다.

“... 석호야.”

덕배 목소리는
느티나무 잔가지 사이로 새는 바람처럼
약하고 조심스러웠다.

석호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무릎을 끌어안은 채
자기 발끝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어깨가 천천히 들썩거리는 걸 보면
조용히 울다 멈춘 뒤 같았다.

덕배는
심장이 귀에까지 들릴 만큼 뛰었다.
하지만
도망가고 싶던 다리가
느티나무 뿌리에 박힌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결국
그는 한 발 더 내디뎠다.

“석호야... 나...”

그 말에
석호의 어깨 근육이
아주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그리고
천천히, 너무 천천히
고개가 돌아갔다.

덕배를 향해.
그 눈빛에는
화난 것도,
크게 소리칠 기력도,
주먹을 다시 올릴 의지도 없었다.

대신
상처 난 짐승처럼 깊게 파인 실망만이
가라앉아 있었다.

덕배는 그 얼굴을 보는 순간
숨이 턱 막혀 더 말을 잇지 못했다.

석호는
잠시 덕배를 똑바로 보다가
한순간 시선을 끊어내듯
고개를 다시 돌려버렸다.
아무 말 없이.
아무 표정 없이.

그렇게
마치 ‘나는 너 모른다’는 뜻처럼.

덕배는
가슴이 쿵— 떨어지는 것 같았다.

한참을 우물거리다가
쿵, 하고 그 자리 옆에 철푸덕 주저앉았다.
석호와 아주 조금 거리를 둔 채.

둘 사이에
바람 소리만 오갔다.
나뭇잎 스치는 소리,
논에서 울던 까마귀 소리,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희미하게 겹쳐 들려왔다.

덕배는
땅바닥에 그린 먼지 자국만 멍하니 긁적이며
입술을 달달 떨다가
드디어 작게 입을 열었다.

“... 미안혀.”

석호는 움직이지 않았다.
덕배는 무릎 위 손을 단단히 쥐었다.

“진짜루... 미안혀. 첨엔 그냥 장난이었는디...
내가 미쳤었나 봐 그런 말은... 하면 안 됐었는데...

진심은 아니여써...화가 나서 나도 모르게 그만...”

말할수록
목이 더 잠겼다.

“계란 다 버려진 것도...
네 도시락 건든 것도...
그것도 내 잘못이고...
그 말 한 건...
더더욱... 내 죄여.”

석호의 눈길은
여전히 앞만 보고 있었다.

덕배는
대답이 없어도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석호야. 진짜야. 나... 오늘...

증말로 반성 많이 했어...
엄니한테도 죽도록 혼나고...
선생님한테도 혼나고...
여기 오면서도 계속 생각했어.”

바람이 느티나무 잎을 흔들었다.
그 사이로
덕배의 말이 조금씩 새어 나왔다.

석호 손등이
살짝 떨리는 게 보였다.
하지만 말은 나오지 않았다.

덕배는
옆에서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그러니께... 한 번만...
용서해 주라...”

석호는
여전히 침묵이었다.

그러나
아까보다
어깨가 아주 조금 풀린 듯 보였다.
조금, 정말 조금.

둘 사이로
늦가을 바람이 지나갔다.
나뭇잎 하나가
석호 무릎 위에 조용히 내려앉았다.

그렇게
해가 기울어갈 때까지
두 아이는
말없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