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어린 악몽

너의 밤은 때때로 악몽이었을까?

by 붕어예요

느티나무 아래서 나란히 앉았던 날 이후,
며칠 동안이나 둘 사이의 공기는 애매하게 식어 있었다.

학교에서는 예전처럼 같이 떠들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완전히 남처럼 지내는 것도 아니었다.

“석호야, 공 좀 이 짝으로 던져.”

체육 시간에 덕배가 공을 던지면 석호는 받긴 받았다.
하지만 눈은 잘 마주치지 않았다.
공을 다시 던질 때도 한 번 더 강하게
뿌리치듯 던지는 날이 많았다.
점심시간에도 같은 반 아이들이
둘을 힐끔거리곤 했다.

“둘이... 여적 서먹하다, 그치?”

경자가 속삭이면 옥순이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려.. 근디 완전히 틀어진 건 또 아닌 거 같기도 허고...”

말은 그렇게 했지만 옥순 마음 한구석에도
계란과 소금이 흩어져 있던 모래사장이 자꾸 떠올랐다.

그날 저녁 무렵, 해가 산 뒤로 반쯤 넘어가려는 시각.
상회 앞에서 덕배가 서성이고 있었다.
왼손엔 구깃구깃해진 작은 종이 봉지가 하나 들려 있었다.
봉지 안에는 새우깡 몇 봉지와 뻥과자,
그리고 사탕 몇 알.

며칠 전, 석호 엄마는 장에 가면서
덕배 엄마에게 이렇게 부탁했었다.

“언니, 지가 내일 장에 가는디
이번엔 아무래도 하루 더 있어야 할 듯 하구만유.
지송헌디 혹시 석호 저녁 좀 챙겨 주실 수 있어유?”

그 말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다.

‘아주머니는 오늘 장에 가셨을 건디...'

덕배는 봉지를 한 번 꼭 쥐었다 펴며
골목 쪽으로 발을 옮겼다.
그때 맞은편에서 옥순이가 물동이를 들고
올라오다가 덕배를 딱 마주쳤다.

“어? 덕배야, 어디 가냐?”

덕배는 순간 봉지를 등 뒤로 슬쩍 숨겼다.

“아... 나... 그냥... 산책 좀...”

“거짓말 허네. 손에 든 거 뭐여?”

옥순이 빤히 쳐다보자 덕배는 결국 봉지를 앞으로 내밀었다.

“... 과자.”

“누구 주게?”

“... 석호.”

그 한마디에 옥순 얼굴이 조금 풀렸다.

“석호네 갈라고?”

“... 응.”

덕배는 발끝으로 모래를 툭 찼다.

“같이 갈려?”

옥순이 먼저 말했다.

“니 혼자 가믄, 또 둘이 말도 안 섞고
서로 벽 보고 앉아 있을 거 같어.”

덕배는 머쓱한 듯 웃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 그려. 같이 가자.”


석호네 집 마당은 해 질 무렵 특유의 푸른빛에 잠겨 있었다.
슬레이트 지붕 아래 낡은 철제 대문이 반쯤 닫혀 있었다.

“석호야!”

옥순이 먼저 불렀다.
대답이 없자 대문을 살짝 밀고 들어갔다.

안채 문이 반쯤 열려 있고, 그
안에 웅크리고 앉은 석호 등이 보였다.
책상 대신 쓴 나무 상 앞에 엎드려
무언가를 꾹꾹 적고 있었다.

“야, 석호야.”

덕배까지 따라 들어가자 석호가 고개를 들었다.

“... 니도 왔냐?”

그 말에 공기가 잠시 멈췄다.
옥순이 먼저 웃었다.

“이이 같이 놀러 왔어, 니 혼자 있냐?”

“응. 엄니는 장에 가셨어.”

짧은 대답. 그 한마디에 오늘 상황이 다 드러나 있었다.
옥순이 슬쩍 둘러보니 부엌 아궁이는 아직 식어 있었고,
솥뚜껑도 덮인 채 그대로였다.

“저녁도 아직 못 먹었구먼...”

작게 중얼거리자 그제야 덕배가 용기를 냈다.

“저기... 석호야.”

석호는 일부러 대답을 늦게 했다.

“... 왜.”

덕배는 손에 쥔 종이 봉지를 앞으로 불쑥 내밀었다.

“이거... 상회에서 가져온 건디... 니랑 같이 먹을라고...”

살짝 구겨진 봉지 안 새우깡 봉지 모서리가 삐져나와 있었다
석호는 한 번 봉지를 내려다보고,
다시 덕배 얼굴을 올려다봤다.
표정이 쉽게 풀리진 않았다.

“됐어. 배 안 고파 먹으려면 니나 먹어라.”

툭 내뱉은 말투였다.
순간 덕배 입술이 오므라졌다.
하지만 이번엔 물러서지 않았다.

“야, 나도 알아. 과자 몇 봉지 준다고 다 해결되는 거 아니라는 거.”

말투가 평소처럼 장난스럽지 않았다.

“그랴도... 뭐라도 들고 와야 할 거 같더라.
맨입으로는 더 말 꺼내기도 뭐혀서...”

옥순이 두 아이를 번갈아 보다가 툭 끼어들었다.

“야, 일단 앉아서 까먹기부터 하자. 과자는 죄 없어.”

그 말에 섣부른 긴장이 조금 깨졌다.
방안에 옹기종기 앉아 봉지를 하나씩 뜯었다.
달짝지근한 범벅과자 부스러기가 마루에 약간씩 떨어졌다.
세 아이는 과자를 입에 넣으면서도
한동안은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내일 시험인디 공부들 좀 혀써?”

어색함에 못 이긴 옥순이 괜히 엉뚱한 소리를 꺼냈다.

“아이, 생각허기도 싫고만 옥순이 니는 과자 묵는데
꼭 시험 얘길 해야것냐?”

덕배가 툴툴거렸다.

“그랴도 오늘은... 어제보단 좀 낫네.”

석호가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
그 말에 두 아이가 동시에 그를 쳐다봤다.

“뭐가?”

덕배가 물었다.

“아무것도 아녀.”

석호는 곧바로 말을 잘랐다.
하지만 입꼬리가 아주 조금 올라가 있었다.
잠깐의 숨 고르기가 끝나자 어둠이 빠르게 내려앉았다.
옥순이 하늘을 한 번 올려다봤다.

“야, 슬슬 저녁 시간 아니냐?”

“난 배가 고프지 않아서.”

석호가 담담하게 말했다.

“우리 엄니는 오늘 장에 하루 더 있다가
내일 오후에 들어온댔어.”

그 말에 덕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우리 엄니도 안다. 그래서 니 우리 집 오라 그랬어.
오늘은 우리 집에서 밥 먹고 있다 가라는디?”

“내가?”

“응.”

“왜.”

“왜는 또 뭣이 왜여.
같이 먹으면 되지 뭘 왜냐고까지 묻냐.”

옥순이 먼저 끼어들었다.

“야, 덕배 집 반찬 많아.
상회집이잖여. 계란부침 잔뜩 있을걸?”

“그라암~ 크흠"

덕배가 슬쩍 보탰다.

석호는 고개를 숙이고 잠깐 생각하다가 툭 한숨을 내쉬었다.

“... 몰라. 그럼, 뭐... 가든가.”

허락인지, 투정인지 모호한 대답.
그래도 안 간다는 말은 아니었다.
그게 지금으로선 최선이었다.
셋이 마루에서 일어나 신발을 꿰어 신고
대문 쪽으로 발을 옮기려는 순간이었다.

철컥—

낡은 철제 대문이 거칠게 열리는 소리가 났다.
문이 벽에 ‘쾅’ 하고 부딪혔다.
세 아이는 동시에 멈춰 섰다.

비틀—

문 안으로 한 남자가 비틀거리며 들어섰다.

“... 뭐여, 니들은.”

술 냄새가 문틈을 뚫고 먼저 밀고 들어왔다.
낯빛이 잔뜩 상기된 얼굴, 풀려버린 눈,
구겨진 작업복 위에 걸친 낡은 점퍼.
석호 아버지였다.

평소 석호 아버지는
동네 사람 눈도 잘 못 마주치는 소심한 사람이었다.
누가 인사하면 얼버무리며 웃고 지나갈 만큼 조용했지만

술만 들어가면 꼭 딴 사람이 됐다.
목소리는 커지고, 말은 비뚤어지고,
작은 일에도 금세 욱해 폭발하곤 했다.

“아... 아부지...”

석호 목소리가 작게 떨렸다.

“니 엄니는?”

들어오자마자 던진 첫마디였다.

“장에 갔는디유... 오늘 못 들어온다 혔고만유.”

“장? 장은 무슨 장...”

남자는 킁킁 코를 골며 대답을 비웃듯 흘려보냈다.

“야, 석호야.”

그가 삐뚤어진 눈으로 아들을 노려보았다.

“니 애미, 혹시 딴 놈이랑 도망간 거 아니냐?
맨날 장, 장, 장 타령 허면서 언제 집에 붙어 있었냐, 그년이.”

그 말에 석호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아부지, 고것이 뭔 말이여유!”

목소리가 높아졌다.

“엄니는 그런 사람 아니여유. 지 버리고 도망갈 사람도 아니고!”

“어허, 이 자식이...”

남자는 휘청이며 한 발 다가왔다.

“이 자식이 아부지한테 말대답허는 거 봐라?
그랴 니가 요즘 덜 맞았지?”

손이 허공을 가르며 올라갔다.
빨개진 손등이 허공에서 일그러졌다.
순간, 그 앞을 가로막은 건 덕배였다.

“아저씨!”

덕배가 두 팔을 쫙 벌려 섰다.

“석호 때리지 마셔유!”

석호 아버지 동공이 잠시 커졌다.
그러곤 비틀거리던 몸을 억지로 세우며
입꼬리를 비뚤게 올렸다.

“이게 누구여? 그 잘난 상회집 둘째 아들 아녀?
내 새끼 내가 때리겠다는데 니가 뭔 상관이여?!”

툭—

덕배 머리 위로 거친 손이 한 번 휘둘러졌다.
정수리 위로 따끔한 통증이 번졌다.

“아야!”

덕배 눈가에 순식간에 눈물이 맺혔다.
하지만 그는 물러나지 않았다.

“석호가 잘못한 것이 없는디 워째 때린데유?!”

말끝이 떨렸지만 두 발은 느티나무 뿌리처럼 꿋꿋이 서 있었다.
그 순간, 석호 아버지가 다시 손을 들었다.
이번엔 손끝이 제대로 석호 쪽을 향했다.

“너, 앞으로—”

“꺅!”

이번엔 옥순이 먼저 움직였다.
세게 밀치듯 대문 밖으로 뛰쳐나가면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골목 쪽으로 달렸다.
경자네 집은 석호네에서 두 골목을 돌아야
나오는 조금 큰 집이었다.
옥순은 숨이 턱에 차도록 온 힘을 다해
경자네 집 대문을 두드렸다.

“계장 아저씨!! 아저씨 계신데유??”

경자 엄마가 문을 열기도 전에 경자 아버지가
마루에서 일어나 밖을 흘끔 내다봤다.

“옥순이 아녀? 이 시간에 무슨 일 있냐?”

굵은 목소리가 물었다.
옥순은 숨을 몰아쉬며 한꺼번에 쏟아냈다.

“석호 아부지가... 술 드시고 와가꼬...
석호 때리려 하셔유... 지금 덕배 혼자 막아서 있는디
아저씨, 좀... 좀 제발...”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경자 아버지 얼굴이 굳어졌다.
어촌계장인 그는 평소엔 말수가 적고,
늘 차분했지만 지금만큼은 아니었다.

“경자 엄마, 내 점퍼 좀 가져와봐”

짧게 말한 뒤 겉옷을 휙 집어 들고 신발을 대충 꿰어 신었다.

“경자야, 니는 집에 있어라.”

그리고는 옥순에게 말했다.

“앞장서라. 같이 가보자.”

석호네 집 앞에 도착했을 때,
낡은 철제 대문은 반쯤 열린 채로 흔들리고 있었다.
안에서는 무언가 엉키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아저씨, 그만혀유!!”

“놓으라니까, 이 자식아!!”

경자 아버지는 단숨에 대문을 밀치고 안으로 들어갔다.
마당 한복판에서 석호 아버지가
석호 어깨를 휘어잡은 채 거칠게 흔들고 있었다.

그 다리에 덕배가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매달려
필사적으로 버티고 있었다.

“석호 때리지 않겠다고 약속하기 전까지는 절대로 못 놔유!!”

덕배 목소리는 이미 쉬어 있었다.

그 순간, 저녁 어스름을 가르는 굵은 목소리가 울렸다.

“최동필!!”

모든 움직임이 잠시 멈췄다.
석호 아버지가 뒤를 돌아보았다.
경자 아버지가 마당 한가운데서 단단히 서 있었다.

“니 지금 뭘 하는 짓이여?”

짧고 단단한 한마디였다.

“혀.. 형님...”

술기운이 잔뜩 오른 얼굴 위로 당혹이 스쳤다.
경자 아버지는 천천히, 그러나 흔들림 없이 다가갔다.

“이 시간에 술 쳐마시고 와갖고 애를 패?”

그 말에 석호 아버지 손이 조금 느슨해졌다.

“저... 저기, 그게 아니고유... 지가 좀... 욱하긴 했는디...”

“욱?”

경자 아버지 눈이 가늘게 떴다.

“석호가 뭘 그리 잘못했길래?
니 마누라가 뭘 그리 큰 죄를 지었길래?
맨날 술만 마시면 동네가 떠나가게 싸우고,
애는 애대로 잡고!"

잠시 숨을 고르더니 더 낮은 목소리로 이어갔다.

“너, 다음 달 배 나가는 거
누가 선주한테 추천하는지 알지?”

석호 아버지 얼굴이 굳었다.

“형님, 그건...”

“형님이라고 부르지도 말어.”

경자 아버지가 잘랐다.

“배에 누굴 태울지, 누구 평판이 어떤지,
누가 바다 나가서 사고 낼 인간인지—
선주들이 다 내게 물어본단 말여.
근디 너, 앞으로도 계속 이 꼴로 살 거여?”

조용한 말투였지만 한마디 한마디가
마당 공기를 내려찍었다.

“집에 들어오면 애랑 마누라부터 패고
그러고 나서 다음날 또 배 타러 가고?
그라믄 언젠가는 니 선주들이 아무도 안 태워
가뜩이나 니 술 때문에 말들이 많은디 말여
위험한 사람은 거르는 거여.”

석호 아버지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제야 경자 아버지 목소리가 조금 가라앉았다.

“술 좀 줄이든가. 적어도 석호 엄니랑
석호 한티 손찌검은 그만해야 할거 아녀?"

석호 아버지는 고개를 푹 숙였다.
굽은 어깨가 더욱 작아 보였다.

“너 내일 술 깨면, 또 얼마나 후회하려고 이러는겨?.”

마지막 한마디였다.

“그만혀유... 지도 다 알고 있으니께”

석호 아버지 목소리에서 술기운과 함께
진짜로 후회하는 기색이 뒤섞여 흘러나왔다.
그제야 그는 쥐고 있던 손을 완전히 놓았다.
석호 어깨에서 천천히 손이 떨어졌다.
덕배도 바짓가랑이에서 손을 뗐다.
두 손바닥이 먼지와 흙으로 새까매져 있었다.

경자 아버지는 아이들 쪽으로 몸을 돌렸다.

“너희 둘, 일단 밖으로 나가 있어라.
석호는... 얼굴 한번 씻고 나오고.”

석호는 입술만 깨물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문 밖 골목으로 나와 서자, 벌써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집집마다 켜지는 전깃불이 서늘한 공기를
조금씩 덮어가고 있었다.
옥순이 먼저 입을 열었다.

“덕배야, 니는 괜찮은겨?”

덕배는 아직도 심장이 진정되지 않는 듯
헐떡거리며 숨을 골랐다.

“나... 진짜 무서웠다?
근디, 그냥 보고만 있으면 안 될 것 같아서...”

그때 대문이 삐걱 열렸다.
석호가 말끔히 씻진 못했지만,
얼굴에 묻은 먼지와 눈물 자국을
대충이나마 닦아낸 채 나왔다.
셋의 눈이 동시에 마주쳤다.

잠깐 정적.

그리고 석호가 어색하게 입술을 달싹였다.

“... 아까 고마웠어.”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딱 집어 말하진 않았지만,
덕배가 제일 먼저 알아들었다.

“아녀... 뭐, 나도...
너한테 많이 잘못해가꼬... 이 정도는...”

말꼬리가 계속 꼬부라졌지만
표정만큼은 조금씩 풀어지고 있었다.
옥순이 두 아이를 번갈아 보다가 괜히 큰 소리로 말했다.

“야, 오늘 저녁 아직 안 먹었잖여!
덕배야, 너 아까 말한 거 책임져.
우리 셋, 다 같이 너희 집 가서 밥 먹자!”

덕배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려, 와라. 오늘 반찬 많다.”

석호는 잠깐 망설이는 듯 고개를 숙였지만,
이내 작게, 아주 작게 웃었다.

“... 그려. 가자.”

세 아이는 골목을 나란히 걸어 내려갔다.
누구도 먼저 앞서 가지 않았다.
서로 보폭을 맞추려는 듯 조금 느린 걸음으로.

늦가을 밤공기가 세 아이 머리 위로 서늘하게 흘렀다.
하지만 그들 사이에 앉은 마음만큼은 조금씩,
아주 조금씩 앉을자리를 찾아가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