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지구용사

우리라는 이름으로 어둠을 물리치다.

by 붕어예요

세 아이가 골목을 천천히 내려가니
경자 아버지는 뒤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다들... 이제 그만 들어가라. 늦었다.”

그 말에 덕배가 한 걸음 나서며 말했다.

“아저씨... 감사혀유.”

석호도 뒤에서 작게 고개를 숙였다.

“감사하구만유.”

경자 아버지는 두 아이 머리를
조심스레 한 번씩 쓸어주었다.

“너희들 오늘 용감혔다. 그랴도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있음
어른을 불러야 하는 거여 알겄지?"

"야~"

아이들은 서로 눈을 마주 보며 배시시 웃었다.
‘용감했다’는 말 한마디가
마치 텔레비전에 나오는 지구용사가 된 것처럼
가슴속 어디를 솔솔 간지럽게 했다.

바람이 골목 아래로 천천히 밀려오며
잠깐 조용한 틈을 만들었다.

그 순간이었다.
덕배가 슬그머니 석호를 곁눈으로 바라봤다.
말문을 열기까지 잠깐 뜸을 들이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석호야.”

“응?”

“오늘... 우리 집에서 자자.
다시 집에 가기엔 좀 그렇잖여.”

석호가 눈을 깜빡였다.

“근디... 책가방도 안 챙겨 왔고...
옷도 없고…”

“책은 내 거 같이 보믄 되고,
옷은 내 옷 입으믄 되지”

그 말을 들은 옥순이 눈이 반짝였다.

“우와, 재밌겄다! 나도 가고 싶다아...”

그러다 금세 표정이 가라앉았다.

“근디... 동생들 봐야 혀.
엄니 혼자 둘 씻기고 재우기 힘드실 거여”

아쉬움이 뚝 떨어지듯 묻어 나왔다.
석호는 어색하게 고개를 긁적였다.

“그려, 언능 가봐 내일 핵교에서 보믄 되지.”

“그려! 니들끼리 잘 놀다 와라!”

옥순이 쿵닥쿵닥 달려가고
두 아이만 남았다.
둘은 잠시 말없이 서 있었다.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은근하게 들렸다.

두 아이는 그렇게 몇 걸음,
서로 말없이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상회 불빛이 보이기 시작할 때쯤
덕배가 갑자기 석호 옆구리를 쿡 찔렀다.

“야.”

“왜.”

“우리... 그러지 말고
영수네 가서 셋이 같이 자는 거 워뗘?”

석호 눈이 크게 떴다.

“어? 괜찮을까?”

“뭐가 문제여? 안 될 것도 뭐 있냐.”

그 말에 석호 입가가
아주 얇게, 거의 보이지 않을 만큼
조금 올라갔다.

“가보자.”

덕배가 상회 문을 밀어 열었다.

딸랑—

문 위 작은 종이 딸랑하고 흔들렸다.
문을 여는 순간, 안쪽에서 들려오는 설거지 소리와
라디오에서 새어 나오는 희미한 트로트가
둘의 긴장했던 어깨를 조금 풀어주는 듯했다.

종소리를 들은 덕배 엄마가
문가로 고개를 내밀며 손의 물기를 닦았다.

“이것들이 왜 이렇게 늦었어?”

아이들은 서로 눈치를 보다가
대충 둘러댔다.

“저기... 그냥 놀다가 늦었고 만유.”

“아주머니 죄송 혀유, 지 땜시 늦었고 만유"

“그려, 그려. 일단 밥부터 먹어.”

상회집 부엌에서는 연탄에서 피어오르는 냄새와
갓 지은 밥의 김이 은근하게 섞여 나왔다.
석호는 이런 집안 풍경이 조금은 낯설었다.
따뜻하긴 한데, 왠지 마음 한쪽이 조용히 저릿했다.
그걸 덕배 엄마가 눈치라도 챈 듯

“석호야, 더 먹고 싶은 거 있음 말혀.”

하고 살갑게 웃었다.

김치찌개와 계란부침,
그리고 고등어구이와 동치미까지
아이들은 조용히 숟가락만 움직였다.
덕배 엄마는 아이들 얼굴을 살피면서도
더 묻지 않았다.

식사가 끝나자
덕배가 슬며시 말을 꺼냈다.

“엄니, 오늘... 영수네 가서 자면 안돼유?
내일 셋이 같이 등교 할게유.”

덕배 엄마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

“안댜! 영수 할머니 힘드신디
니들이 또 가서 들락거리믄 얼마나 귀찮겄냐.”

“아녀, 귀찮게 안 할 거고만?
그리고 오늘만이여! 오늘만!”

덕배가 두 손을 모아 빌기 시작했다.
덕배 엄마는

“어휴,”

하며 머리를 감싸더니
끝내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러더니 비닐봉지를 꺼내 들고
귤을 하나둘 담기 시작했다.

“이거, 영수 할머니 갔다 드려.
넘의 집 가는디 빈손으로 가는 거 아니여”

덕배가 귤 봉지를 받아 들고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러다가 제법 묵직한 귤 봉지를
이리저리 살피더니 익살스럽게 말했다.

“엄니는~ 이렇게 다 퍼주다가
우리 상회 거덜 나겄어유!”

그러자 덕배 엄마는 곁눈질하며 말했다.

“몰랐나베? 이 엄니는 다 퍼주려고 상회 하는겨~”

그 말에
덕배도 웃고
석호도 참지 못하고 피식 웃었다.

작게라도 웃는 석호 얼굴을 본 순간,
덕배는 그 웃음을 오래 기억해두고 싶었다.
그 마음이 가시기도 전에 두 아이는 상회를 나서
서늘한 저녁 공기를 가르며 골목을 함께 걸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영수네 대문이 보이기 시작했고,
문 앞에 다다르자 안쪽에서 강아지 가을이가
짧게 “멍!” 하고 반가운 소리를 내며 달려왔다.

“가을아~”

영수 목소리가 들렸고
문이 열리자 영수가 두 눈을 크게 떴다.

“어? 이 시간에 너희가 웬일이야?”

덕배가 먼저 말했다.

“우리 오늘 너희 집에서 자도 되겄냐?”

영수는 놀라는 듯했지만
숨길 수 없는 반가움이 얼굴에 번졌다.

“할머니~ 덕배랑 석호 왔어요!”

영수 할머니가 방에서 나오며 방긋 웃었다.

“아이고, 어서들 와라! 춥다, 어여 들어와.”

덕배는 귤 봉지를 내밀었다.

“할머니, 이거 엄니가 드리라고 했어유.”

“아이고, 뭘 또 이런 걸 갖고 왔냐.
그냥 와도 되는디... 잘 먹겠구먼.
고맙다고 전해드려이.”

가을이는 세 아이 주위를 뱅뱅 돌며
꼬리를 부지런히 흔들었다.

영수는 쑥스러운 듯,
그러면서도 기쁨을 숨기지 못한 얼굴로
두 친구를 안으로 들였다.
가을이가 아이들 다리를 스치며 꼬리를 흔드는 사이,
셋은 마루를 지나 영수 방으로 향했다.

방 안에는 작은 책상과
구석에 곱게 쌓인 책 몇 권,
그리고 바닥에 펼쳐진 이불 한 채가
따스한 밤공기처럼 아이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마침 그때,
영수 할머니가 두툼한 이불 두 채를 품에 안고
영수 방으로 조심스레 들어오셨다.

“얘들아, 니들 셋이 잘라믄
이불 한 장으론 턱도 없지.
이거 펴서 따뜻하게 자.”

부드럽게 말하며
바닥 한쪽에 이불을 펼쳐주자
아이들은 동시에 벌떡 일어나 허리를 숙였다.

“할머니, 감사하고만유!”

“아이고, 고마울 것 있나.
어여 눕고 낼 핵교 가야 허니께 어여들 자라이.”

할머니가 웃으며 문을 닫고 나가자
방 안에 다시 아이들만 남았다.

셋은 서로 부딪히며 드러눕고
괜히 다리로 장난치고
한참을 퀭퀭 웃었다.
그러다 주제가 하나로 모아졌다.

“석호야, 내일 우리 집에서 마징가 Z 볼려?”

덕배가 물었다.
석호가 눈을 번쩍 뜨며 말했다.

“야, 당연한 걸 묻냐.
저번 주 거 재방송도 못 봤다니께~”

그 말에 영수가 조심스레 말했다.

“마징가 Z? 그거 재밌어? 나는... 한 번도 못 봤는데...”

두 아이가 동시에 벌떡 일어났다.

“뭐??!! 마징가 Z를 한 번도 안 봤다고?!”

겁에 질린 영수가 말했다.

“우리 집은 텔레비전 없잖아...”

두 아이는 입을 벌렸다가
이내 활짝 웃었다.

“그람! 내일 우리 집으로 와! 같이 보자!”

덕배가 말을 하자 옆에서
석호가 맞장구를 쳤다.

“그려! 내일 하교 하자마자 덕배네로 가자!”

아이들의 말에
영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베개를 배에 끌어안고 작게 웃었다.

방 안에는 세 아이 숨소리가
은근하게 얽혀 들기 시작했다.
천장 가운데 전구 하나가
부드럽게 흔들리며 방 한가운데를
누렇고 따뜻하게 비췄다.

그때 가을이가 이불 위로 올라와
영수 다리 근처에 몸을 동그랗게 말고 눕더니
코를 파르르 떨었다.
세 아이는 그 모습이 귀여워 또 한 번
킥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면서도 이야기는 계속 이어졌다.
시험 얘기, 선생님 흉보기,
누가 공을 더 잘 찬다,
사소한 말들이라도
오늘만큼은 유난히 더 재밌게 느껴졌다.

그러다 어느 순간
셋의 목소리가 하나둘씩 작아지더니
파도처럼 잦아들었다.
이불 위에서 가을이는 먼저 깊이 잠들고,
세 아이는 눈꺼풀이 천천히 내려앉는 걸 막지 못하며
나란히, 소리 없이
잠의 품으로 가라앉았다.

그렇게 늦은 밤까지
웃음이 머물던 방 안에
조용하고 부드러운 숨결만이 남았다.

오늘만큼은,
석호의 밤이
악몽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