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김장 품앗이

겨울을 알리는 소란

by 붕어예요

청포리 마을은 해가 뜨기도 전에 이미 부산했다.
집집마다 마당에는 배추가 쌓였고,
골목을 지나갈 때마다
소금물에 절여진 배추 냄새와
마늘, 생강, 젓갈 냄새가

차가운 공기 속에 묵직하게 퍼져 있었다.
덕배네 상회 뒤편 마당은
유난히 더 시끌벅적했다.
오늘은 덕배네 김장 날이었다.
굴 작업은 다 같이 하지만
김장은 각자 집에서 마을 어른들의 품앗이 형태로
이루어졌다.

큰 고무대야들이 줄을 맞춰 놓였고,
배추는 산처럼 쌓여 있었다.

“덕배야! 배추 거그 말고 이쪽으로!”

“아이고, 허리야— 누가 이것 좀 받아라!”

어른들 목소리가 엉키고,
아이들은 그 사이를 오가며
물통을 나르고,
배추를 옮기고,
장갑을 가져다주느라 정신이 없었다.
석호는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 올린 채
덕배 옆에서 묵묵히 배추를 들고 있었다.

엄마는 장에 나가셨고,
김장날에 집에 혼자 남아 있을 이유도 없었다.

“야, 석호야. 배추 무거우면 말혀.”

“괜찮다.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녀.”

석호는 일부러 더 단단히 배추를 끌어안았다.
손끝은 얼얼했고,
배추 잎에서 떨어진 물이
소매 안으로 흘러들어 찼지만
그보다 마음이 먼저 바빴다.
김장은 늘 이런 날이었다.
어른들은 서로 말을 주고받으면서도
자기 손맛이 더 맞다고 우기고,
아이들은 쉴 새 없이 불려 다녔다.

“덕배야, 파 좀 더 가져와라!”

“석호야, 고춧가루 저기서 좀 퍼와!”

그렇게 아침이 지나고,
점심이 지나고,
해가 서쪽으로 기울 무렵이 되어서야
마당의 배추 더미가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자자, 이제 다들 들어와라!”

덕배 엄마의 말에
아이들 눈이 동시에 반짝였다.
부엌 쪽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고,
냄비 뚜껑 사이로
익숙하면서도 낯선 냄새가 흘러나왔다.

수육이었다.
큰 양푼에 담긴 김장김치,
막 썰어 나온 돼지고기,
하얀 김이 천천히 올라왔다.
덕배와 석호는
말없이 자리에 앉았지만
숟가락을 들기도 전에
이미 얼굴이 들떠 있었다.

“야... 냄새 좀 봐라.”

둘은 서로를 힐끗 보며 괜히 웃었다.
먼저 먹을까 봐, 늦을까 봐
괜히 마음이 바빴다.

한 점 먹고, 두 점 먹고,
말이 점점 줄어들었다.
먹는 데 바빴다.

그러다 덕배가
김치를 한 점 더 집으며
툭 물었다.

“엄니.”

“왜.”

“굴작업은 부녀회에서 모여서 다 같이 하는디,
김장은 왜 각자 따로혀유?”

잠깐,
아이들의 밥상을 챙기던

덕배엄마의 손이 멈췄다.
그리고는 허리를 펴며 웃었다.

“이이— 굴 까는 건 다 똑같은 일이여.
근디 김장은 안 그랴.”

“왜유?”

“각자 집마다 김치 맛도 다르고,
넣는 것도 다르고,
담그는 법도 다 다르니께.”

덕배 엄마는
김치를 다시 한번 뒤적이며 말했다.

“김장은 그 집이 어떻게 살아왔는지가
다 들어 있는 거여.”

아이들은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솔직히 반쯤만 들었다.
입이 더 바빴다.

배부른 저녁이 끝나고
석호는 조심스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줌마, 지는 그만 가볼게유.”

덕배 엄마는
잠깐 석호를 바라보다가
부엌 쪽으로 가
작은 김치통 하나를 꺼내왔다.

“석호야.”

석호가 돌아보자
김치통이 두 손 사이로 내밀어졌다.

“오늘 도와주느라 고생 많았다이.
이거 가져가서 묵어.”

“아줌마, 괜찮은디유...”

“괜찮긴 뭐가 괜찮어.
혼자 들고 가야 하니께
조그만 통에 담아놨다.
다 묵음 또 말허고.”

석호는
두 손으로 김치통을 받아 들었다.
묵직했다.
김치 무게보다
그 말이 더 묵직했다.

“감사하고만유”

집으로 돌아가는 골목길,
각 집마다 불빛이 환하게 새어 나오고 있었다.
창문 틈 사이로
웃음소리,
그릇 부딪히는 소리,
라디오 소리가 흘러나왔다.
석호는 김치통을 품에 안고
몸을 잔뜩 움츠린 채 걸었다.

그때—
볼에
차가운 게 하나
툭, 떨어졌다.
석호는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까만 하늘에서
하얀 눈송이들이
조용히 흩날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와... 눈이다.”

아무도 없는 골목에서
그 말이 작게 울렸다.
멀리서 개 짖는 소리만 들려올 뿐
눈은 소리 없이 쌓였다.


지붕 위에도,
골목 위에도,
석호의 어깨 위에도.
마치 오늘 하루를
조용히 다독거려 주는 것처럼.
눈은 청포리 위에
겨울을 남기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학교.
운동장에는 아이들 발자국만 남아 있었고
눈은 아직 덜 녹아 있었다.

아이들은 웅성거리며 교실에 모였지만
담임 선생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잠시 뒤, 교장 선생님이 교실에 들어와서 말했다.

“오늘은 자율학습이다. 담임 선생님은
잠시 서울에 다녀오셔야 할 일이 있어서
오늘 늦게 돌아오실 거야.”

아이들 사이로
작은 소란이 퍼졌지만
누구도 그 말의 무게를
아직은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