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용기와 온기 사이 그 어디쯤.
해가 갯벌 끝으로 내려앉을 무렵,
선착장에서는 막 굴 까는 작업이 모두 끝난 참이었다.
널빤지 위엔 비워진 굴망들이 한쪽으로 치워져 있었고,
빨간 고무장갑과 칼을 씻어 말리는 아주머니들 사이로
피곤하지만 홀가분한 숨결이 오갔다.
그 옆에서는 부녀회 아주머니 둘이
굴살을 한데 모아 커다란 양은 냄비에 굴죽을 올려 끓이고 있었다.
보글보글—
끓는 소리와 함께 피어오르는 따끈한 김이
저녁의 고요한 바닷바람을 타고 천천히 흩어졌다.
굴죽 특유의 고소하면서도 짭조름한 향은
선착장 끝까지 잔잔히 번져갔다.
“자, 이제 거의 다 됐다.
조금만 더 있다 퍼주믄 되겄네."
경자 어머니가 국자를 들어
바닥에 눌지 않았는지 살짝 저어보았다.
작업을 끝낸 아주머니들은
허리를 쭉 펴며 이마의 땀을 손등으로 훔쳤다.
그 옆에서 경자는
낮에 먹다 남긴 국수 그릇을 두 손으로 들고
끓어오르는 굴죽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어느 순간, 경자의 표정이 달라졌다.
마지막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냄비를 보며
무언가 마음속에서 조용히 올라오는 듯했다.
경자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엄니, 굴죽... 그...
한 그릇만 더 담아주면... 안 돼유?”
죽을 젓던 손이 멈추고,
경자 어머니가 경자를 돌아보았다.
“아니, 너 또 먹을라고?
낮에도 국수 먹고 굴도 먹고,
배 터진다, 한 그릇만 묵어”
경자는 급히 고개를 저었다.
“지가 먹을라고 하는 게 아니라...
그... 선생님 갖다 드리려구유.”
죽 끓이던 아주머니 둘도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경자는 조금 더 용기 내서 말했다.
“학교 뒤에 혼자 사시잖아유.
한 그릇 갖다 드리면 좋을 것 같아서...”
바람이 스쳐 지나가며
널빤지에 놓인 굴껍데기 하나가 데굴 굴렀다.
경자 어머니는 잠시 딸을 바라보다가
국자를 다시 국물 속에 천천히 담갔다.
“허참... 야도... 진작에 야길 하지 그려써
이 엄니보다 우리 경자가 더 낫네~ 엄니는
그런 생각도 못 혔는디”
그러고는 양은 냄비 하나를 꺼내
따끈한 굴죽을 조심히 한 국자, 한 국자 담고는
뚜껑을 덮어 내밀며 말했다.
“쏟지 말고 잘 갖다 드려
선생님이 참 좋아하시겄네”
경자는 양은냄비 손잡이를 두 손으로 꼭 잡았다.
손끝에 따스함이 은근히 스며들었다.
“야... 다녀오겄슈.”
선착장 끝 언덕 너머로
가을 저녁노을이 붉은빛을 퍼뜨리고 있었다.
경자는 숨을 크게 내쉬고
양은냄비를 조심스레 품에 안은 채
학교 뒤 선생님 집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해가 완전히 넘어가려는 시각,
언덕길은 이미 저녁바람에 서늘해져 있었다.
바싹 마른 갈댓잎이 스치는 소리가
발끝에서 ‘사각사각’ 울렸다.
양은냄비는 여전히 뜨끈했다.
“아이구... 뜨거... 조심조심...”
경자는 냄비가 흔들릴까 봐
걸음을 더 천천히 옮겼다.
학교 뒤편의 작은 사택.
창문 사이로 희미한 불빛이 번지고 있었고,
그 안에서는 라면 냄새가 은근하게 새어 나와
밤공기와 섞여 퍼지고 있었다.
문 앞에 선 경자가
두드리려는 순간,
가슴이 ‘쿵’ 하고 뛰었다.
(아휴... 내가 웬 용기를 낸거여...)
품에 안은 양은냄비의 온기가
등을 살짝 밀어주는 듯했다.
경자는 작게 숨을 들이쉬고
문을 ‘똑똑’ 두드렸다.
잠시 후—
안에서 발소리가 다가왔다.
“누구세요?”
익숙한 선생님 목소리에
경자의 얼굴이 순간 붉게 달아올랐다.
“저, 저여유... 경자여유..!”
문이 살짝 열리고,
등잔불 아래 선생님 얼굴이 드러났다.
학교에서보다 조금 지쳐 보이는 표정이었지만
따뜻함은 그대로였다.
“경자야? 이 시간에 웬일이니?”
경자는 양은냄비를 앞으로 내밀었다.
“저... 그, 굴작업 끝나고...
오늘 굴죽 끓였는디...
좀 드셔보시라고 갖고 왔구만유...”
말은 점점 작아져
마지막은 속삭임에 가깝게 사라졌다.
선생님은 놀라듯 눈을 크게 뜨더니
천천히 미소 지었다.
“아이고... 경자야.”
그리고 양은냄비를 받아
뚜껑을 열어보았다.
따끈한 김이 피어오르며
구수한 향이 퍼졌다.
“선생님 주려고 일부러 가져온 거야??”
경자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야... 따뜻할 때 드셔야 맛있으니께유...”
선생님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다가
조용히 말했다.
“고맙다, 경자야. 잘 먹을게
어머니께도 잘 먹겠다고 꼭 전해드려 줘”
바람이 지나가며
경자의 양갈래 머리카락이 살짝 흔들렸다.
부끄러워 고개를 숙인 경자는 인사했다.
“그럼... 지 인제 가볼게유.”
“어두운데 선생님이 데려다줄까?”
경자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여유, 여는 지가 훤히 꽤고 있응께 괜찮고만유
내일 뵈유!"
“그래, 경자야 조심해서 내려가거라.”
경자는 운동장을 가로지르며
작게 웃음을 흘렸다.
냄비를 들었던 두 손을 꼭 쥐었다.
온기는 사라졌지만
가슴속은 오히려 더 따뜻했다.
언덕길을 내려갈 때,
달빛이 그림자를 길게 끌어냈다.
귀뚜라미 소리가 이곳저곳에서 소란스러웠다.
그때—
어둑한 길모퉁이에서 누군가가 경자를 불렀다.
“경자야!”
석호였다.
숨을 헐떡이며 경자에게 달려오고 있었다.
“어딜 그리 혼자 다니려고 혀...
저녁 되믄 길 어둡잖여.”
목소리는 툴툴했지만
손에 쥔 작은 손전등이
석호의 마음을 전부 말해주고 있었다.
“잉? 날 찾으러 온겨?”
석호는 얼굴을 붉히며 홱 고개를 돌렸다.
“뭐, 찾으러 온 건 아니고... 어두우니께...
아, 그려 니가 자갈이라도 밟고
미끄러져 넘어지믄 그 자갈 불쌍하니께
그래서 왔다!”
바람이 불어
두 아이의 머리칼을 나란히 흔들었다.
경자는 씩 웃어 보였다.
“선생님께 굴죽 드리고 오는 길이여.”
“아, 그려? 춥다. 내려 가자.”
석호는 손전등을 켜
경자 앞쪽을 비춰주기 시작했다.
둘은 겨울기운이 감도는 길을
나란히 걸어 내려갔다.
멀리서
아이들 웃음소리, 아주머니들의 수다소리,
아저씨들 술잔 부딪히는 소리가
잔잔하게 흘러왔다.
선착장에 도착하자
여전히 굴향과 따끈한 냄새가 남아 있었다.
작업장 한쪽 널빤지 위에는
갓 퍼온 굴죽 그릇 몇 개가 놓여 있었고
송골송골 김이 올라왔다.
그 앞에서는 아이들 몇이
나눠 먹으며 깔깔대고 있었다.
옥순이가 경자를 발견하고
손을 높이 들어 흔들었다.
“경자야, 여기여!”
경자가 다가가자
옥순이가 자기 그릇을 앞으로 밀었다.
“갓 퍼온 굴죽이여. 한 숟가락 묵어봐.
따끈허니 딱 좋아.”
경자는 쭈뼛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바닷바람이 스친 널빤지는 서늘했다.
“경자야, 니 엄니가 제일 맛나게 끓인다니까~
이거 완전 잔치여, 잔치.”
덕배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바람에 실린 굴향이
아이들 사이를 천천히 감싸고 지나갔다.
그때 아주머니들이 걸어오며 말했다.
“야들아, 뜨거우니께 조심혀!”
아주머니들이 멀어지자
아이들은 다시 수저를 들고
굴죽을 호호 불어 먹기 시작했다.
평범했던 하루의 끝이었지만
이 순간만큼은
마을 전체가 하나의 커다란 식탁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