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시 기사가 열쇠 구멍으로 들여다본 세상만사
참꽃마리와 쐐기풀꽃
이야기 스물
참꽃마리와 쐐기풀꽃
고재동(택시 기사ㆍ시인)
그 손님이 맨발로 택시에 오른 걸 처음에는 몰랐다.
심야로 접어온 이 시각쯤엔 시내가 조용하다. 하나둘 간판마저 꺼지고 인적은 고사하고 개미 새끼 한 마리, 그 그림자도 찾기가 어렵다. 먼 듯 가까운 산에서 아까시꽃향이 날아와 무임승차하며 나의 시름을 달랠 뿐. 옥동 쪽으로 방향을 틀까 하다가 그래도 구 역 주변이 미련 남아 한 바퀴 더 도는데 24시 야식집 앞에서 네댓 명의 사람들이 손짓했다. 얼른 그곳으로 핸들을 꺾어 멈춰 서니 네 사람의 배웅을 받으며 한 사람이 차에 오른다.
"어서 오세요. 어디로 모실까요?"
"내가 떠나거든 소금 뿌려라. 하 하 하! 이리로 쭉 가세요."
떠나는 사람과 떠나보내는 사람의 웃음의 격이 달랐다. 배웅을 하는 네 사람 모두는 상복 차림이다. 검은 정장에 검은 넥타이 차림은 상주임을 말하고 있었으니. 상주들의 유쾌한 웃음과 상가를 다녀가는 사람의 처진 웃음이 교차하는 현장에 내가 같이 간다.
자초지종을 들어보고 싶었지만 엄중한 분위기의 차 안은 침묵만 흐르고 있었다. 상갓집을 다녀오는 사람이 퍽 유쾌할 일은 없겠지만 아까 상주들의 희색이 만면한 얼굴들은 뭐란 말인가? 위로를 받아야 했을 상주들의 표정과 위로를 하고 돌아오는 사람의 표정은 엇비슷한 게 상례일 테지만 이들에게선 도대체 그 무엇도 읽어낼 수가 없다.
도시를 유영하는 차는 새벽으로 가는 다리를 건넜다. 드디어 그가 입을 뗐다.
"귀신을 떼어내기 위해선 한 잔 더 먹어야 한다면서 상주들이 조금 전 그 야식집으로 나를 데려갔습니다."
감이 오지 않았다.
"......"
"상가에서 나오려는데 제 신발이 없어졌지 뭡니까. 그래서 아쉬운 대로 장례식장의 슬리퍼를 신고 나왔는데 슬리퍼에 귀신이 붙어서 집까지 신고 가면 안 된다고 하네요."
"그랬었군요? 그분도 엔간히 술에 취했었나 보군요. 고의로 바꿔 신고 간 건 아니겠죠?"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내 구두가 새것도 아니고..."
"참 난감한 일이군요?"
이제 감이 왔다. 야식집에서 한 잔 더 하고 해장국까지 먹은 후 슬리퍼를 버리고 맨발로 택시 타고 집에 가라며 껄껄껄 상주들이 배웅했던 것이다. 그래야 귀신이 따라가지 않을 거라고 다들 입을 모았다고 했다. 모두가 잠시 상주와 상주를 위로하는 날임을 망각한 순간이었다.
주말에 형제들이 모여 오리백숙을 먹기로 해서 낮에 엄나무와 헛개나무, 오가피나무를 잘랐다. 맨손으로 오가피나무를 다듬다가 오른손 검지 끝에 가시가 들어갔다. 무척 아팠다. 바늘을 찾아 데크로 나가 가시와 사투를 벌였다. 2, 30분의 씨름 결과 간신히 나의 승리로 끝났다. 눈에 보일 듯 말 듯 아주 작은 가시였다. 손에 미세하게 만져질 정도의 가시가 그렇게 성가실 줄 미처 몰랐다. 손톱 밑에 가시가 들어 당사자의 아린 마음을 남들은 알지 못한다.
장미꽃의 예쁜 자태는 가시가 지켜 주고, 오가피나무는 짐승들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가시를 키웠다.
"아 참, 제가 전화기를 두고 왔네요. 아까 그 식당으로 다시 가면 안 될까요?"
"네, 알겠습니다."
목적지에 당도하기 직전에 차를 돌렸다. 강바람 맞으며 다시 다리를 건넜다. 강바람이 찼다. 천국으로 가는 강을 건넌 사람은 다시 돌아오지 않지만 우린 너무 쉽게 강을 건너 다닌다. 다리라는 거대한 매개체를 이용하여 자유롭게 하루에도 몇 번씩 다리를 건넌다.
"기사님, 대단히 죄송하지만 식당에 가셔서 제 전화기 가져다주시면 안 될까요? 제가 맨발이어서요."
"네, 가능합니다. 제가 가져다 드리죠."
그 식당 앞에 슬리퍼가 나뒹굴고 있었다.
"대단히 감사하고 죄송합니다."
"뭘요."
그제야 손님이 맨발로 내 차에 올랐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7년간 택시를 하는 동안 모르긴 해도 맨발로 택시를 탄 손님은 오늘이 처음인 듯싶다.
그 손님은 차에서 내릴 때 차비를 배로 계산해 주면서 유쾌한 미소를 얹는다. 내가 극구 사양했지만 막무가내였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1시간 전 다섯 명이 타면서 따불을 외쳤던 손님이 그 손님이었다.
야트막한 산 그늘 타고
실려온 바람결
부서지는 달 조각
살쿵 스민 그녀
들릴 듯 은근한 유혹에
더덩실 달밤 춤사위
몽유병 놀이하기
개구리 울음 멎은
달도 기운 이슥한 밤
설익은 눈부신 향내는
--<아까시꽃>
이젠 재를 넘어 내가 집에 갈 차례이다. 아까시꽃 향이 들리는 듯 들리지 않는 듯 은근히 다가온다. 노골적으로 차 문을 비집고 들어와 유혹한다. 그러나 시내 쪽 아까시꽃은 지고 있기도 했고 가뭄으로 꽃 향이 얕다. 짙은 향은 멀리 가지만 지는 꽃의 향은 멀리 가지는 못한다. 그렇지만 누가 꽃 향이 아니라고 하겠는가? 지는 꽃이라고 얕보고 외면만 하는가?
차다. 여름의 문턱, 만물이 점차 생장하여 가득 찬다는 소만小滿인 어제 대청봉엔 눈이 내렸다고 한다. 5월에 눈을 본 건 군 시절 치악산에 잔설을 눈으로 확인한 이후 처음이다. 현재 기온 6도. 5월 하순에 이만한 온도를 본 것도 처음이다. 밤 기온이 낮고 지난겨울과 봄 가뭄이 심해 아까시 꿀이 흉년이라고 한다. 향도 예년보다 못하다.
지는 꽃에 관심 없듯이 화려하게 만발한 아까시꽃나무 밑에 무슨 식물이 사는지 우리는 별 관심 없다. 애기똥풀이 들판을 누비다가 마지막으로 아까시나무 밑에서 마지막 정열을 뽐낸다. 사람들과 동물들은 관심 밖이지만 식물의 세계에선 존재감이 있다. 참꽃마리와 쐐기풀꽃에 비해선 돋보인다. 그들만의 세계에선 돌나물꽃도 존재가치가 있다.
귀촌하여 집 짓고 난 후 맨 먼저 서편 산 밑에 앉혔던 원두막 뒤에 찔레꽃이 흐드러지게 폈다. 동산의 정열적인 해당화는 저를 지나친다고 투덜투덜하고, 2년 전 이웃에서 데려온 불두화는 딱 한 송이 피어 이름값을 한다. 내년에는 그 열 배의 꽃으로 화답하겠다는 약속을 하며.
피는 듯 피지 않는 듯, 있는 듯 없는 듯 아까시나무 밑 올망졸망 모여 사는 식구들. 그곳에도 여름에 떠밀려 봄이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