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할머니 집 냉장고는 늘 가득 차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넉넉해서 가득한 것이 아니라, 비어 보이지 않게 애써 채워 둔 냉장고에 가까웠다. 문을 열면 검은 봉지에 담긴 데친 나물, 한 번 먹고 남은 김치찌개, 오래된 반찬통에 눌러 담은 멸치볶음, 누군가 가져다준 떡 두어 조각, 랩으로 감싼 사과 반쪽 같은 것들이 층층이 들어 있었다. 칸마다 모양도 날짜도 제각각이었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그 냉장고를 보면 마음이 먼저 느슨해졌다. 거기에는 먹을 것이 아니라, 살아온 시간이 들어 있는 것 같았다.
어릴 때 나는 외할머니 집에 가면 제일 먼저 냉장고 문을 열었다.
무엇이 있는지 궁금해서라기보다, 늘 비슷한 것들이 놓여 있다는 사실이 좋았다. 똑같은 자리에 있는 장조림 통, 늘 한 칸을 차지하고 있는 김치, 요구르트 몇 병, 누가 사다 놓고 간 빵. 그 익숙함은 어린 마음에도 안심이 되었다. 세상은 자꾸 바뀌는데 외할머니 집 냉장고 안은 계절이 달라도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마치 그 집에서는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조금 자라고 나서는 알게 되었다.
그 냉장고가 넉넉해서 가득한 것이 아니라는 걸. 외할머니는 뭐든 쉽게 버리지 못했다. 시들시들해진 대파도 잘라서 얼려 두었고, 남은 전은 한 번 더 데워 먹으려고 보관했고, 시장에서 늦게 사 와 싸게 산 채소는 오래 두고 조금씩 꺼내 먹었다. 냉장고 문 안쪽에 모아 둔 작은 양념 봉지들, 반쯤 남은 두부, 금이 간 플라스틱 반찬통은 다 그 시절의 버릇이었다. 부족하게 살아본 사람만이 몸에 익히는 방식. 아끼는 것이 성격이 아니라 생존이었던 세월의 흔적.
외할머니는 늘 같은 말을 했다.
“있는 거 먹으면 되지.”
우리가 뭘 사 간다고 하면 손사래를 쳤고, 외식을 하자고 하면 집에 반찬이 많다고 했다. 엄마는 그런 외할머니를 보며 답답해했다. 냉장고에 오래된 것 좀 버리라고, 이젠 그렇게까지 아낄 필요 없다고, 당신만 고생하는 방식으로 살지 말라고 말했다. 그 말이 맞는 것 같으면서도, 나는 외할머니가 금방 고개를 끄덕이지 못하는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다. 사람은 형편이 나아졌다고 해서 한순간에 가난을 졸업하지 못한다. 가난은 통장보다 몸에 먼저 남는다.
외할머니 집 부엌은 늘 조금 서늘했다.
햇볕이 잘 들지 않는 쪽에 냉장고가 붙어 있었고, 그 위에는 비닐봉지에 담긴 마늘과 양파가 놓여 있었다. 나는 명절이나 주말에 그 부엌 식탁에 앉아 외할머니가 반찬을 꺼내는 모습을 오래 보곤 했다. 냉장고 문을 열고 무엇이 있는지 찬찬히 살핀 다음, 가장 먼저 상할 것 같은 것을 앞에 두고, 덜 상한 것을 뒤로 밀어 넣는 손길. 먹을 사람 수를 가늠해 접시 크기를 고르고, 남기지 않을 만큼만 덜어내는 눈치. 그 움직임에는 군더더기가 없었다. 부엌에서의 외할머니는 마치 작은 생을 오래 관리해온 사람 같았다.
한 번은 내가 철없이 물은 적이 있다.
“할머니, 냉장고에 왜 맨날 남은 반찬만 있어?”
그때 나는 그 말이 얼마나 가벼운 질문인지 몰랐다. 외할머니는 대꾸 대신 웃으며 김치통 뚜껑을 닫았다. 그리고는 “남은 게 아니라 있는 거지”라고 말했다. 그 말은 짧았지만, 오래 남았다. 남은 것과 있는 것의 차이를 그때는 몰랐다. 지금 생각하면 외할머니는 그 차이를 평생의 생활로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누군가에게는 처치해야 할 나머지였던 것이, 누군가에게는 내일을 버티게 하는 분명한 끼니였다는 사실을.
내가 외할머니를 조금 다르게 보게 된 것은 어느 여름 오후였다.
엄마 심부름으로 반찬 몇 가지를 들고 갔는데, 외할머니는 마침 냉장고를 정리하고 있었다. 바닥에는 꺼내 놓은 반찬통이 몇 개 있었고, 행주로 선반을 닦은 자국이 남아 있었다. 나는 별생각 없이 유통기한 지난 것을 버리려다 외할머니에게 핀잔을 들었다. “그건 아직 괜찮아. 오늘 저녁에 먹으면 돼.” 나는 또 습관처럼 말했다. “그냥 버리고 새로 먹으면 되잖아.” 그러자 외할머니는 한참 말이 없었다. 그러다 아주 무심한 얼굴로 말했다.
“버리는 게 제일 쉬운 집도 있고, 아닌 집도 있는 거다.”
그 말을 듣는데 괜히 얼굴이 뜨거워졌다.
외할머니는 화를 낸 것도 아니고, 지난날을 길게 설명한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그 짧은 문장 안에는 내가 모르는 시간이 너무 많이 들어 있었다. 먹을 게 없어 물에 밥을 말아 먹던 날들, 시장 끝물 채소를 들고 돌아오던 저녁, 자식들 입에 먼저 넣느라 자기 몫은 뒤로 미루던 끼니들. 나는 그 삶을 직접 살아보지 않았으면서도, 이미 다 지나간 일처럼 쉽게 말했다. 이제는 괜찮지 않냐고. 이젠 버려도 되지 않냐고. 하지만 어떤 사람에게 버린다는 것은 단지 물건을 치우는 일이 아니다. 한때는 너무 귀해서 함부로 손댈 수 없었던 것들을 포기해도 되는 사람이 되는 일이다.
그날 외할머니는 냉장고 맨 안쪽에서 작은 스테인리스 그릇을 꺼냈다.
그 안에는 며칠 전 삶아 둔 감자가 두 알 들어 있었다. 외할머니는 그것을 찜기에 다시 데우더니 내 앞에 내놓았다. 뜨거운 김이 오르는 감자를 반으로 갈라 소금을 조금 찍어 먹는데, 이상하게 목이 메었다. 별맛이 아닌데도 그랬다. 아마도 나는 그제야 알았던 것 같다. 외할머니의 냉장고가 지키고 있던 것은 단순히 음식이 아니라는 걸. 그 안에는 먹을 것을 버리지 않으려는 습관만 있는 게 아니었다. 누구 하나 배고프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 혹시 누가 불쑥 와도 빈손으로 보내고 싶지 않은 마음, 오늘이 빠듯해도 내일까지는 어떻게든 이어 보려는 마음이 함께 들어 있었다.
생각해보면 외할머니는 늘 누군가를 먹이며 사랑했다.
주머니 사정이 넉넉하지 않아도 과일 한 봉지는 꼭 사 두었고, 손주가 온다 하면 달걀이라도 삶아 놓았고, 반찬이 시원치 않다 싶으면 라면 하나를 더 끓였다. 사랑한다고 말하는 대신 밥을 더 얹어주고, 괜찮냐고 묻는 대신 김을 한 장 더 올려주는 사람. 나는 그런 사랑을 너무 오래 평범하다고 여겼다. 가난한 집의 검소함쯤으로, 연세 든 사람의 습관쯤으로. 하지만 그건 습관만은 아니었다. 오래 부족했던 사람이 끝내 놓지 못한 애정의 방식이었다.
이제 외할머니 집에 가면 예전처럼 함부로 냉장고 안을 들여다보지 못한다.
문을 열 때마다 그 안에 정리되지 않은 반찬보다 정리되지 않은 시간이 먼저 보여서다. 검은 봉지 하나, 오래된 반찬통 하나에도 이름 모를 계절들이 겹쳐 있다. 가난했던 날, 아껴야 했던 날, 자식들 키우느라 자기 것은 늘 나중이었던 날. 그리고 그 모든 날을 지나와도 끝내 누군가 먹을 것을 남겨두던 마음. 나는 그 마음 앞에서 자주 작아진다.
외할머니는 여전히 냉장고를 쉽게 비우지 못한다.
엄마는 여전히 오래된 건 버리라고 말하고, 외할머니는 여전히 “이건 괜찮다”고 답한다. 아마 그 둘의 실랑이는 오래 계속될 것이다. 그런데 이제 나는 어느 한쪽만 맞다고 말하기 어렵다. 버려도 되는 삶을 바라며 사는 사람도 있고, 버리지 않아야 버틸 수 있었던 삶을 지나온 사람도 있으니까. 사랑도 때로는 그렇게 세대마다 다른 모양으로 남는다.
요즘 나는 장을 보고 집에 돌아와 냉장고에 반찬을 넣다가 가끔 외할머니를 떠올린다.
조금 남은 나물을 버릴까 말까 망설일 때, 사과 반쪽에 랩을 씌워 넣어둘 때, 누가 올지도 모르는데 괜히 국을 넉넉히 끓여둘 때. 그럴 때면 알 것 같다. 사람은 자신이 먹고 자란 사랑의 모양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그리고 어떤 사랑은 풍족해서 남는 것이 아니라, 부족했기 때문에 더 오래 남는다는 것을.
외할머니의 냉장고에는 오래된 반찬보다 더 오래된 것이 있었다.
쉽게 버릴 수 없었던 시절, 아껴야만 하루를 건널 수 있었던 마음, 그러면서도 끝내 누군가를 먹여 살리고 싶었던 사랑. 나는 이제야 안다. 그 냉장고를 가득 채우고 있던 것은 음식이 아니라, 가난보다 오래 살아남은 다정함이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