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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y Mar 04. 2022

냉면

 전부터 신경 쓰이는 식당이 있었다. 허름하고 볼품없는데, 점심시간만 되면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는 그런 곳이다. 어쩌다 갈 기회가 있어 가 보니 가격이 꽤 부담스러웠던지 남편은 자주는 못 가겠단다. 마침 그날 뉴스에서도 요즘 냉면 가격이 많이 올랐단다. 어쩔 수 없이 이 냉면집은 마음에서 접기로 했다.

 


 사람의 마음은 참 이상하다. 전에는 냉면에 관해 관심도 없었는데 냉면 가격이 오르고 나니, 냉면의 가치도 오른 것 같아 아쉬움이 생겼다. 그래서 한동안은 남편과 외출하면 아직 가격이 오르지 않은 냉면집을 찾곤 했다. 남편은 종로구 광장시장 근처에 있는 냉면집을 좋아했다. 어릴 때 어머니가 근처 병원에서 일하셨기에 추억이 있는 곳이란다. ‘원조 함흥냉면’이라는 곳인데 가격도 집 근처보다 3천 원이나 저렴하고, 냉면 외에도 갈비탕이나 왕만두가 있어 남편은 따뜻한 음식을 먹을 수 있어 좋아했다. 원래 나도 따뜻한 음식을 선택하는 편인데 냉면을 먹고 싶어 하니, 차가운 것이 몸에 해롭다고 갈비탕 두 그릇이랑 냉면을 한 그릇 시키고, 아들을 위해 왕만두를 포장해 달라곤 했다. 남편은 아무렇지 않게 이곳에 날 데려왔지만, 서울에 이런 곳이 있나 할 정도로 신기했다. 요즘에는 손목시계를 잘하지 않는데, 냉면집 앞은 중고 손목시계 가게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그냥 봐서는 어떤 것이 진짜인지 알 수 없을 것 같은데, 가게 사장님들은 전문가에 가까웠다. 이렇게 작고 오래된 가게인데도 시계에 관해서는 모르는 것이 없고, 없는 것이 없다. 이곳에 단골 시계 가게도 생겨 시계 줄도 새로 바꾸었다. 

   


 그런 즐거운 외출이었건만, 다음에 다시 못 가게 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소소하고 담백한 기억이 있어 다음을 기약하고 기대에 부풀어 있지만, 그것이 추억이 되고 마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1년 후 ‘원조 함흥냉면 집’을 찾았을 땐 재개발로 문을 닫은 상태고, 단골 시계 가게는 사장님이 몸이 안 좋으셔서 아들이 가업을 이어받아서 하고 계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은 나를 이런 아쉬움에서 감사함으로 데려갔다. 그것은 예상치 못한 코로나 19 사태 때문이다. 세상은 이제 코로나 이전과 이후의 시대로 바뀐다더니 이젠 ‘함께’라고 한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내가 그나마 그런 좋은 것들을 경험하길 잘했다고 여겨질 뿐이다. 지금은 당연한 것이 소중하게 여겨지고, 조금씩 무엇인가를 잃어가는 시대인 것 같다. 그래도 되찾고 싶고, 간직하고 싶은데 현실은 늘 녹록지 않다. 그러기에 마음이나 감각으로나마 과거의 기억을 살리기에 음식이 적절한 보상을 해 준다고 느끼게 되었다.

   

 그런 이유로 다시 그 냉면집을 다시 찾게 되었다. ‘을밀대’라 불리는 그 집은 가격은 좀 비싸지만, 아직 인기가 있다. 간판 앞에 특별히 ‘모범음식점’이라던가 멋진 인테리어는 전혀 없지만 겉과 같이 맛도 싱겁고 담백하게 계속 영업하고 있다. ‘을밀대’는 평양에 있는 정자라는데 ‘을밀 선녀’가 이곳이 아름다워 내려왔다는 설화 외에도 많은 이야깃거리가 있고, 평양이다 보니 평양냉면의 이미지를 살리기 위해 이름 지어진 것 같다. 

   


 을밀대의 냉면은 싱겁지만 싱싱한 야채와 맨 위에 놓인 질 좋은 편육 그리고 두툼하고 쫄깃한 메밀면과 서비스로 나오는 주전자에 담긴 따뜻한 사골육수가 남다른 것 같다. 특히 추울 때 냉면을 기다리며 마시는 사골육수는 MSG 맛도 덜 나고 좋다. 또한 을밀대에서 사용되는 야채는 내가 자주 가는 야채 가게에서 배달된다. 그러니까 두 가게가 서로 오랫동안 친분을 유지한 것인데, 그래서 그런지 야채 가게의 오이는 내가 먹어 본 오이 중 제일 맛있는 것 같다. 그 외에도 대부분의 야채가 질이 좋다. 그런 을밀대의 내부 사정까지 알아버리니 을밀대에 가끔 가는 것은 과거의 보상이 되었고,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그러다 냉면이 한국을 대표하는 음식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된 것은, 「로제타 홀 일기 2」를 읽고 나서이다. 그녀는 1890년대에 캐나다에서 한국으로 온 의료선교사인데, 그녀의 일기에 냉면은 이렇게 표현되고 있다.     



 1891년 1월 21일 수요일

 

오늘은 매우 지체 높은 분의 부름을 받아서 그 댁에 왕진하러 가게 되었다. 내가 이해하기로는 선대 왕후의 질녀라고 알려진 조 씨 부인이며, 로스와일러 양도 함께 갔다. 두세 개의 안뜰을 거쳐서 들어가야 할 만큼 큰 집이었다. 마지막 안뜰에 이르자 고향에서 보던 가로등 같은 큰 등불이 달려 있었다. 이곳 거리에는 몇 개의 가로등만 있을 뿐이다. 지면(마당)으로부터 꽤 높이 올려 지은 집은 무척 컸고, 어떤 부분은 이층 집처럼 높았으며, 돌로 지어졌다. 우리는 널찍한 세 칸 방으로 안내되었는데, 방들 사이에는 얇은 미닫이문이 있어서 서로 통하게 되어 있었다. 창문에는 부분적으로 유리가 끼워져 있었으나 대부분 기름 먹인 종이가 발라져 있었고, 마치 흐릿한 유리 같았다. 방바닥은 광택이 나는 기름종이가 깔려 있는데 멋있는 문양의 대리석을 깔아 놓은 것 같았으며, 어떤 것도 멋있었다. 여러 개의 한국 병풍도 있었으며, 작은 거울 하나가 벽에 달려 있었고, 그 곁에는 조그만 주머니들이 있어 머리빗을 넣어 두기에 좋을 듯했다. 다른 방에는 장롱 위에 큰 거울이 걸려 있었으며, 벽시계도 있었다. 환자는 위장병을 앓고 있는 나이 많은 여인이었는데 무척 고통스러워했다. 진통제를 조금 복용케 하여 편안하게 해 준 뒤 여분의 약을 지어 주었다. 그녀는 깔끔했으며, 깨끗하고 고운 옷을 입고 있었다. 옷의 일부는 비단이었다. 사람들은 모두 왕후의 죽음을 애도하는 흰옷을 입고 있었다. 방에는 고급 비단 베개와 비단으로 양면을 댄 게 가벼우면서도 아름답고 편안해 보이는 베개들이 있었고, 하얀 모슬린 면으로 만든 보료가 바닥에 깔려 있었다. 환자 가족은 한국인들의 예법에 따라 우리가 식사하고 떠날 것을 강권했다. 그리고 우리 앞으로 맛있는 음식을 각기 한 상씩 가득 차려서 들여왔다. 음식은 정말 훌륭했다. 내가 방문하면서 더러 먹어야 했던 음식들보다 훨씬 풍성하고 맛있었다. 상에는 평소에 보던 삶은 달걀을 넣어 만든 국수도 있었다. 면은 메밀가루로 만들었는데, 면의 굵기가 매우 고르고 가늘었으며, 맛있었다. 그리고 우리의 무와 비슷한 한국 순무가 나왔는데, 이것을 작게 썰어서 고춧가루를 뿌리고 식초를 넣어 절였다. 일종의 무 피클 같다. 그리고 얇게 저민 삶은 쇠고기를 짙은 액체 소스에 찍어 먹게 했다. 이 소스는 쇠고기 육수와 식초가 섞인 맛이었으나 콩으로 만든 ‘초장’이었다. 오렌지를 얇게 썰어서 꿀에 절인 것도 있었는데 아주 맛있었다. 다른 접시에는 몇 개의 한국산 배와 곶감이 수북이 담겨 있었으며, 밤도 있었고, 계피를 잔뜩 묻힌 젤리 같은 것도 있었다. 우리가 젓가락으로 국수를 먹는데 진전이 없자 그들은 상자를 내려서 외제 은 숟가락을 하나씩 주었다. 그리고 4인치 정도 길이의 두 개의 철삿줄로 된 포크 같은 것을 가져왔다. 여태껏 그런 것을 본 적이 없지만, 한국이나 중국에서 만든 것이 틀림없어 보였다. 우리 둘은 꽤 많은 양을 먹었고, 정말 맛있다고 그들에게 말해 주었다. 음식을 다 먹고 나자 그들이 담배를 권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만은 따를 수 없었다. 여인들은 나의 옷을 이리저리 훑어보면서, 플란넬 속바지가 나올 때까지 내 치마를 한 겹 한 겹 들추어 보았다. 그들은 우리가 몇 살인지 물었고, 우리 이름을 발음해 보려고 애썼다. 우리는 성경 소책자 한 권을 읽으라고 주면서, 한 이틀 후에 환자의 상태를 알려주면 약을 더 보내든지 필요하면 다시 찾겠다고 했다. 그런 다음에야 떠날 수 있었고 날이 어두워진 후 집에 도착했다.      

  


 내가 냉면을 좋아하게 된 이유가 여러 가지 있지만, 그중 하나는 과거와 친해질  수 있고, 그만큼 다른 사람들과 잊혀가는 추억을 공유할 수 있어서 일지 모르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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