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과 변화, 그리고 한때의 나를 향한 사유
문득 떠오른 이름이 몇 시간 동안 머릿속에 맴돌았다.
한 시절의 나를 조금 더 깊이 생각하게 만들었던 사람,
책을 손에 들고 다니기만 해도
왠지 ‘조금 더 어른이 된 것 같은’ 표식이 되었던 이름.
전혜린.
여고생이었던 나는
그녀의 책을 약간의 지적 허영처럼 품고 다녔다.
그 시절의 나는
그녀의 문장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을지 모르지만
이상하게도 그 문장들은
내가 처음으로 ‘사유의 세계’를 열어본 듯한 감각을 주었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언젠가 독일 유학을 갈 수도 있지 않을까 상상하며
어린 마음으로는 너무도 먼 세계에
작은 설렘과 부푼 기대를 걸어두곤 했다.
그 세계가 멀었기에, 오히려 더 선명하게 빛났는지 모른다.
그런데 오늘,
그토록 좋아하던 그녀의 책 내용이
전혀 떠오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조금 당황했다.
한참 동안 품고 다녔던 무게가
기억에서는 홀연히 사라져 버린 것이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기억나지 않아도 이미 내 안에 들어와 있는 문장들이 있다.
한때 열렬히 사랑했으나
지금은 얼굴조차 흐릿하게 남아 있는 사람처럼,
그러나 그 사람이 내 삶의 방향을
아주 조금이라도 바꿨던 것처럼.
전혜린의 책은 그런 종류였던 것 같다.
내가 누구였는지,
그리고 어떤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싶었는지를
조용히 만들어주었던 책.
어쩌면 그 막연한 지적 갈망이
나를 낯선 세계로 이끌었고,
그 낯선 세계가 바로
이 이민자의 삶이었는지도 모른다.
요즘의 나는
그 시절의 나와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해 있다.
이를테면,
서양식 수프는 평생 내 식탁에 오르지 않을 음식이라고
굳게 믿고 살아왔다.
사십여 년 동안 한국 음식 문화 속에서 길러진 내 입맛은
서양 수프를 비롯한 몇몇 음식에 본능적인 거부감을 드러냈고,
나는 그것을 ‘한국 사람 특유의 체질 같은 것’이라 여겨왔다.
그런데 요즘 나는 아침에 어니언 수프와 치킨 누들 수프를 먹으며
“세상에, 이런 것도 이렇게 맛있을 수 있네?” 하고
감탄하는 사람으로 달라져 있다.
어니언 수프의 낯선 단맛, 치킨 누들 수프의 익숙한 듯 낯선 질감을
받아들이는 일이 마치 내가 이 땅의 일부가 되었음을
은밀하게 인정하는 의식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취향이 변한다는 건
사실 아주 은밀하게 인생이 변한다는 뜻이다.
이민자로 20~30년을 살다 보니
“나는 어디에서 마지막을 보낼까?”라는 문장이
어느 날 문득 마음속에 들어온다.
낯선 땅에 뿌리내린 이방인의 숙명처럼
어느 날 갑자기 떠오르지만
가장 현실적인 질문이 된다.
음식의 취향도,
언어의 습관도,
몸의 리듬도
천천히 달라지기 시작한다.
서양의 수프 한 그릇을 행복하게 먹는 일이
어쩌면 노년의 풍경마저 조용히 바꿔놓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농담처럼 말해본다.
“이제 서양 양로원도 괜찮겠다.”
그 말이 이상하게도 마음속에서 오래 머문다.
나는 오늘 다시 생각한다.
그 시절 내가 왜 그렇게 전혜린을 품고 살았는지,
왜 독일의 어느 도시를 상상하며 설렜는지.
지금도 그 질문에 대한 정확한 답은 알 수 없지만
이상하게도 그 감정 하나만큼은
나의 ‘초기 설계도’처럼 여전히 내 안에서 빛나고 있다.
시간이 흐르면
사람은 완전히 변하는 것 같으면서도
어떤 작은 조각은 끝내
원래의 빛을 잃지 않는다.
오늘 그녀를 떠올린 건 아마도 그 조각이
다시 한번 말을 걸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시절의 나와 지금의 내가
한 줄의 문장을 사이에 두고
조용히 마주 앉아 있는 것처럼.
우리는 잠시 그렇게 앉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