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의 단상 ①

머물렀던 순간들

by Mansongyee


받지 않은 진동


냉장고 문을 열어 우유를 꺼내 컵에 반을 붓는다.

마이크로웨이브에 넣고 30초 버튼을 두 번 눌러 데운다.

삶아 둔 자색 고구마 한쪽을 입에 넣은 채

커피 캡슐을 머신에 끼우고 버튼을 누른다.


커피를 최고의 기호품이라 여기던 그녀는

어느 순간부터 우유도 마시기 시작했다.

슈퍼스토어에서 우연히 집어 든 밤 맛이 나는

일본 고구마를 알게 된 이후였다.

우유컵과 커피잔, 고구마 한 조각을 끌어안고 소파에 앉는다.


오늘은 무엇을 할지 생각하지 않는다.

고구마가 목으로 넘어갈 때

따뜻한 우유 한 모금이 뒤따라온다.

윤활유처럼 부드럽게.


커피 쪽을 힐끗 보며, 아직 오지 않은 무언가가

곁에 남아 있다는 사실에 잠시 머문다.


그때 스마트폰이 울린다.

화면을 보지 않은 채 우유컵을 내려놓는다.

진동이 멈출 때까지 기다렸다가

고구마를 한 입 더 베어 문다.

급하게 받아야 할 일은 없다고

그녀는 생각하지 않는다.



한 짝을 잃은 장갑


느긋이 소파에 앉아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고 있었다.


와인에 감탄하는 조르바를 읽다 보니

이 정도면 그는 이미 득도한 것 아닌가 싶어

무심코 와인 쪽으로 눈이 갔다.


밥솥에는 밥이 조금 남아 있었고,

냉동실에도 얼려 둔 밥이 있었다.

이걸 처리할 방법으로 김치볶음밥이 떠올랐다.


책을 소파에 내려놓는다.

머릿속에서는

“보스 양반, 이 빨간 물은 도대체 뭐요?”

하는 문장이 맴돈다.

이 빨간 배추는 도대체 뭐냐고,

혼잣말을 하며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김치를 볶는다.

전자레인지에 데운 밥과

밥솥에 남아 있던 밥을

볶아지는 김치 위로 던진다.


얼마 전 장만한 큰 웍이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것 같아

혼자 웃음이 난다.


계란프라이 하나를 얹은 접시를 들고

천천히 한 숟가락을 뜬다.


식탁 한쪽에는

한 짝을 잃은 장갑이

그대로 놓여 있다.



완전히 들어가지 못한 컵


며칠째 주문한 커피 캡슐이 도착하지 않고 있다.

서랍이 비어 있다는 걸 알면서도 한 번 열어본다.

하나 남아 있던 캡슐은 어제, 빈 서랍이 되었다.


키친 한구석에서 괜히 이것저것을 넣었다 뺐다 해본다.

결국 따뜻한 겉옷을 입고 캡 모자를 쓴다.

갑자기 외출할 때는 이 모자가 먼저다.


문을 열고 나오니 비가 오고 있다.

걸어가려 했지만, 걸을 수 있는 비는 아니다.

잠깐 망설이다가 다시 들어가 차 키를 들고 나온다.


비 오는 날,

차를 몰고 동네 스타벅스로 가는 길은 새롭다.

운전석에 앉아 천천히 주변을 훑는다.


벤티 아메리카노를 받아

편해 보이는 소파에 앉는다.

키 큰 남자가 머리에 맺힌 물방울을 털며 들어오고,

젊은 남녀가 와 작 지껄 떠들며

손으로 머리를 털고 지나간다.

옆 테이블에는

한 남자가 노트북에 머리를 거의 박고 있다.

직원들은 끊임없이 늘어선

드라이브 스루 주문을 처리하며

창문 너머로 바쁘게 무언가를 주고받는다.


여기는 비 오는 날이 바쁜가,

맑은 날이 바쁜가

문득 궁금해진다.


브론디 머리 여자가

스마트폰에 대고 흥분한 채

컵을 가비지캔에 던지고

급히 뛰쳐나간다.


그녀의 눈길은

완전히 들어가지 못한 컵에

잠시 머문다.



아무 일도 없었지만, 하루는 분명히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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