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물렀던 순간들
냉장고 문을 열어 우유를 꺼내 컵에 반을 붓는다.
마이크로웨이브에 넣고 30초 버튼을 두 번 눌러 데운다.
삶아 둔 자색 고구마 한쪽을 입에 넣은 채
커피 캡슐을 머신에 끼우고 버튼을 누른다.
커피를 최고의 기호품이라 여기던 그녀는
어느 순간부터 우유도 마시기 시작했다.
슈퍼스토어에서 우연히 집어 든 밤 맛이 나는
일본 고구마를 알게 된 이후였다.
우유컵과 커피잔, 고구마 한 조각을 끌어안고 소파에 앉는다.
오늘은 무엇을 할지 생각하지 않는다.
고구마가 목으로 넘어갈 때
따뜻한 우유 한 모금이 뒤따라온다.
윤활유처럼 부드럽게.
커피 쪽을 힐끗 보며, 아직 오지 않은 무언가가
곁에 남아 있다는 사실에 잠시 머문다.
그때 스마트폰이 울린다.
화면을 보지 않은 채 우유컵을 내려놓는다.
진동이 멈출 때까지 기다렸다가
고구마를 한 입 더 베어 문다.
급하게 받아야 할 일은 없다고
그녀는 생각하지 않는다.
느긋이 소파에 앉아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고 있었다.
와인에 감탄하는 조르바를 읽다 보니
이 정도면 그는 이미 득도한 것 아닌가 싶어
무심코 와인 쪽으로 눈이 갔다.
밥솥에는 밥이 조금 남아 있었고,
냉동실에도 얼려 둔 밥이 있었다.
이걸 처리할 방법으로 김치볶음밥이 떠올랐다.
책을 소파에 내려놓는다.
머릿속에서는
“보스 양반, 이 빨간 물은 도대체 뭐요?”
하는 문장이 맴돈다.
이 빨간 배추는 도대체 뭐냐고,
혼잣말을 하며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김치를 볶는다.
전자레인지에 데운 밥과
밥솥에 남아 있던 밥을
볶아지는 김치 위로 던진다.
얼마 전 장만한 큰 웍이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것 같아
혼자 웃음이 난다.
계란프라이 하나를 얹은 접시를 들고
천천히 한 숟가락을 뜬다.
식탁 한쪽에는
한 짝을 잃은 장갑이
그대로 놓여 있다.
며칠째 주문한 커피 캡슐이 도착하지 않고 있다.
서랍이 비어 있다는 걸 알면서도 한 번 열어본다.
하나 남아 있던 캡슐은 어제, 빈 서랍이 되었다.
키친 한구석에서 괜히 이것저것을 넣었다 뺐다 해본다.
결국 따뜻한 겉옷을 입고 캡 모자를 쓴다.
갑자기 외출할 때는 이 모자가 먼저다.
문을 열고 나오니 비가 오고 있다.
걸어가려 했지만, 걸을 수 있는 비는 아니다.
잠깐 망설이다가 다시 들어가 차 키를 들고 나온다.
비 오는 날,
차를 몰고 동네 스타벅스로 가는 길은 새롭다.
운전석에 앉아 천천히 주변을 훑는다.
벤티 아메리카노를 받아
편해 보이는 소파에 앉는다.
키 큰 남자가 머리에 맺힌 물방울을 털며 들어오고,
젊은 남녀가 와 작 지껄 떠들며
손으로 머리를 털고 지나간다.
옆 테이블에는
한 남자가 노트북에 머리를 거의 박고 있다.
직원들은 끊임없이 늘어선
드라이브 스루 주문을 처리하며
창문 너머로 바쁘게 무언가를 주고받는다.
여기는 비 오는 날이 바쁜가,
맑은 날이 바쁜가
문득 궁금해진다.
브론디 머리 여자가
스마트폰에 대고 흥분한 채
컵을 가비지캔에 던지고
급히 뛰쳐나간다.
그녀의 눈길은
완전히 들어가지 못한 컵에
잠시 머문다.
아무 일도 없었지만, 하루는 분명히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