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움
현관에 놓여 있는 신발들을 무심히 본다.
눈이 오기 시작하면 신는 장화,
봄여름 달릴 때 신는 운동화,
가을겨울에 달릴 때 신는 운동화,
겨울 외출용 반부츠.
그녀는
이제 더 필요한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옷장에 걸린 옷들을 무심히 본다.
눈이 오면 입는 구스 코트,
간편한 러닝복,
가족 외출용으로 계절마다 한 벌씩.
봄과 가을은
한 벌이면 되겠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이제 더 이상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
아들, 딸이 어릴 때부터 찍어 모아 두었던
각자의 앨범을 이삿짐 처리하듯
결혼할 때 보내주었더니,
보관해 달라며 다시 지고 왔다.
그녀는 몰랐다.
이 과거의 사진들을
바로 스마트폰에 찍어
보관하는 시대라는 것을.
그녀는 몰랐다.
냉동고에 숨이 막힐 정도로
삶이 꽉꽉 눌려 들어가 있었다는 것을.
오늘에서야 알았다.
깨달음은 오늘도 늦지 않다고,
그녀는 창밖의 눈에
눈길을 놓는다
냉동고를 열자,
시간이 먼저 나를 밀어냈다.
꾹꾹 눌려 담긴 것들 앞에서
그녀는 잠시 숨이 막혔다.
언제 먹을지 몰라 남겨 두었던 것들이
가장 오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흰 봉지에 둘둘 말려 있는 저것이 무엇인지,
그녀는 더 이상 궁금하지 않았다.
문득,
누가 들여다볼까 두려움이 스쳤다.
그녀는 냉동고 문을
필요 이상으로 오래 열어 두고 있었다.
다시 닫으려다 말고,
그녀는 안에 있던 것들을
하나씩 꺼내기 시작했다.
필요한 것만 남겨 두고
숨을 쉬기로 했다.
냉동고 앞 바닥에 놓인 것들 사이로,
오래된 공기가 천천히 빠져나왔다.
그녀는 창문 너머로 내리는 눈을 본다.
따뜻하고 아늑한 여기와
흰 눈이 펑펑 내리는 저기를
창문 하나가 가르고 있다.
유리는 바람도, 소리도
모두 다른 쪽으로 보내 버린다.
익숙한 눈이지만, 오늘 그녀는
파리의 들라크루아 그림을 떠올린다.
창문은 풍경을 들이지 않고,
기억만 천천히 불러낸다.
그림 속 파리를 걷고 있는 상상만으로도
긴긴 겨울의 추위 속에서
그녀는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없다고
고개를 끄덕인다.
눈과 하나 되는 시간 속에서
그녀는
음악을 잊고 있었다.
숨이 막히지 않는 쪽으로 하루가 조금 옮겨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