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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리의 페다고지 서평

비판적이고 실천적인 학생 교육을 위하여

들어가며


“만국의 억압된 자들이여, 대화하라!”

프레이리의 『페다고지』를 한마디로 표현해 본다면, 이렇게 요약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책을 읽어 나갈수록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이 점점 짙게 떠오르기 때문이다. 사람을 억압된 자들과 억압하는 자들로 구분하는 것과 혁명 지도부가 민중을 계몽시켜 사회를 변혁시킬 것을 요구하는 그의 주장은 어딘지 모르게 사회주의 사상과 닮아있다. 뿐만 아니라, 책에 혁명 지도부의 예시를 들면서 인용한 인물들은 모두 사회주의 운동가 내지 혁명가다. 블라디미르 레닌, 마오쩌둥, 피델 카스트로 그리고 완전체라 불러도 손색없는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까지. 이들은 모두 프레이리가 말하는 변화를 이끈 ‘혁명지도부’의 좋은 예다.


그러나 이들하고 프레이리가 구별되는 점은 교육을 통한 혁명을 주창한다는 점이다. 교육학자답게 프레이리는 교육을 통해 대중들의 의식을 깨우고 자신의 처지를 자각하게 만들어 현실을 변화시키고자 한다. 그 방법은 대중과의 ‘대화’를 통해서다. 프레이리는 기존의 교육이 지배체제를 공고하게 하는 역할을 했다고 여긴다. 그렇기에 기존의 교육을 은행 저금식 교육이라고 비판하며, 그 대안으로 문제제기식 교육의 도입을 역설한다. 자신의 처지를 깨닫고 주변 환경에 문제기를 제기하는 것이야말로 기존의 사회구조를 변혁시키는 첫 단계라고 그는 힘주어 말한다. 또한 여기서 그는 더 나아가 이론과 실천의 균형을 함유한, 프락시스를 전반부에 걸쳐 재차 강조한다. 프레이리의 생각에 배우기만 하고 실천하지 않는 것, 배우지 않고 실천하는 것은 둘 다 위험해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책은 이런 내용을 어떻게 풀어내고 있는지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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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으로

1장은 프레이리가 바꾸고자 하는 현재 상황에 대한 분석을 담고 있다. 여기서 그는 인간을 억압자와 피억압자로 구분한다. 불평등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프레이리는 먼저 억압의 원인을 비판적으로 검토해야 한다고 힘주어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피억압된 현실이 주는 익숙함을 경고한다. 피억압자가 참된 동료애보다 집단성을 더 선호하게 되며, 자유가 만들어 주는 창조적인 친교, 혹은 자유 자체를 추구하는 것보다 현재의 부자유한 상태에 적응하고 안전을 도모하는 것을 더 선호하게 만든다는 지적은 바로 익숙함이 주는 위험함을 상징하는 문구인 셈이다. 프레이리는 이런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시작점으로 피억압자가 자신을 억압자의 숙주로 인식해야만 해방적인 교육학을 낳을 수 있다고 말한다. 즉, 피억압자 교육학의 첫 단계는 억압의 세계를 드러내고, 프락시스를 통해 그 세계의 변혁을 위하여 헌신하는 것이다. 억압의 현실이 변혁된 두 번째 단계에서는 더 이상 피억압자의 교육학이 아니라 영구적인 해방 과정에 참여하는 전 민중의 교육학으로 확장하는 것이다.


2장은 억압의 도구로 이용되는 ‘은행 저금식’ 교육 개념을 분석하여 비판하고 그 대안으로 문제제기식 교육 개념을 설명하는 부분이다. 프레이리는 은행이라는 비유법을 활용하여 기존의 교육을 비판한다. 그에 따르면, 기존의 교사와 학생 관계(설명적 성격)는 설명병을 앓고 있다고 힐난한다. 여기서 교사의 임무는 학생들에게 자기 설명의 내용을 주입하는 데 있으며 학생은 보관소, 교사는 예탁자다.


프레이리가 바라보기에, 탐구 정신과 프락시스가 없으면 진정한 인간이 되지 못한다. 지식은 창조와 재창조를 통해서만 생겨나며, 인간은 끊임없고 지속적인 탐구 정신을 통해 세계 속에서, 세계와 더불어, 또 타인과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것이 그가 기존의 교육을 비판하는 근거다. 반면 은행 저금식 교육관에서는 당연히 인간이란 유순하고 관리가 가능한 존재로 간주한다. 즉 세계가 학생의 안으로 들어가는 방식을 규제하는 것이 곧 교육자의 역할인 셈이다.


그가 대안으로 제시한 문제제기식 교육의 본질은 지향성에 답하기 위해 일방적 주입을 거부하고 의사소통을 추구한다. 해방 교육은 정보의 전달이 아니라 인식 행위로 구성된다. 문제제기식 교육자의 역할은 학생들과 함께 독사(doxa/ 낮은 차원의 주관적 지식) 수준의 지식이 로고스(logos/ 사색의 결과로 얻어지는 지식) 수준의 참된 지식으로 바뀌는 과정을 창출하는 데 있다고 프레이리는 말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민중은 문제제기식 교육을 통해 자신들이 세계 속에서 존재하는 방식을 비판적으로 인식하게 되며, 세계와 더불어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자신의 참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당연하게도 문제제기식 교육은 인간이 변화 과정 속에 있다고 본다. 또한 교육은 언제나 프락시스 속에서 재창조되며 존재하기 위해서는 변화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역설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런 탐구 운동은 민중의 역사적 소명인 인간화를 지향해야 한다. 따라서 프레이리는 혁명 과정에서 나중에 참된 혁명적 조치를 취하겠다는 의도에서 당장 편리하다는 이유로 지도부가 잠정적으로 은행 저금식 방법을 사용하는 것은 옳지 않다며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한다.


3장은 대화라는 행위를 통해 교육을 어떻게 변화시킬지에 관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프레이리는 문제제기식 교육을 행할 수 있는 수단으로 대화를 중시한다. 또한 그는 말에서 행동의 차원이 제거되면 성찰도 사라지고 말은 한가한 수다, 탁상공론, 소외적인 ‘허튼소리’가 되어버린다고 비판하며 대화와 실천이 일치해야 한다고 덧붙인다. 그렇기에 그는 인간 존재가 침묵 속에서 성장하는 게 아니라, 말과 일과 행동-성찰 속에서 성장한다고 파악한다.

프레이리가 말하는 대화는 상호 평등에 기반한다. 사랑의 토대는 대화인 동시에 대화 그 자체다. 또한 대화는 겸손한 태도가 아니면 성립하지 않는다. 나아가 대화는 인류에 대한 깊은 신념을 필요로 한다. 사랑과 겸손, 신념에 뿌리를 둔 대화가 만들어 내는 수평적 관계에서는 대화자들 간의 상호 신뢰가 싹트는 것이 논리적 필연성이다. 기억해야 할 점은 대화자가 비판적 사고를 하지 않으면 진정한 대화는 성립하지 않는다.


4장은 반(反)대화와 대화의 요소를 대비하면서 각각의 특징을 살피고 있다. 프레이리는 혁명 지도부가 진정으로 해방에 헌신하려면 그들의 행동과 성찰은 반드시 다른 사람들의 행동과 성찰을 필요로 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혁명적 프락시스는 지배 엘리트의 프락시스와 대립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여기서 그는 민중과의 대화는 모든 참된 혁명에 필수적이라고 언급한다. 그는 “무릇 역사란 오직 민중이 만들고 (마르크스) 거꾸로 민중을 만드는 인간성의 역사일 뿐이다”라고 말하며, 혁명 지도부는 민중 없이, 또는 민중을 위해 사고하는 게 아니라 민중과 더불어 사고하는 것에 밑줄을 긋는다.



책밖으로


프레이리의 『페다고지』는 구성적, 서사적 측면에서 플라톤의 동굴 비유와 많이 닮아있다. 그가 강조한 혁명지도부는 플라톤의 동굴에 등장하는 철인과 유사하며, 대중이 억압받는 현실은 아직 진실을 보지 못한 나머지 사람들의 처지와 비슷하다. 또한 혁명지도부가 대중을 지도하여 사회변혁을 이끌어내야 한다는 점에서도 플라톤이 강조한 철인정치와 맥을 같이 하는듯하다. 차이점이라면 플라톤의 철인정치는 진리로 이끌면서 민중과의 대화가 필수 과정이지 않지만, 프레이리의 교육에서는 민중과의 대화가 필수다. 그래야만 대중들이 대화를 통해 자신을 자각하고 사회를 변혁시킬 수 있는 힘을 얻게 되어 궁극적으로 사회가 변할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아무래도 조금 더 대중들의 힘을 강조한 측면이 강하다. 그렇기에 플라톤과 프레이리의 궁극적인 차이점은 누구나 철인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철인은 교사들로부터 탄생한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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