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군 캠페인 2번째 연재다.
지난 번에 소개한 1번째 글은 한국전쟁 기간 동안 미국 공군의 작전 수행을 다뤘었다.
결론에서 미군은 한국 전쟁에서 얻은 교훈을 베트남 전쟁에서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고 마무리 지었다.
이 말은 옳은 말이기도 하지만 완전히 옳다고 할 수도 없다. 미군은 베트남 전쟁 기간 동안 공중 전력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도 나름의 변화를 꾀하기도 했다. 그런 변화의 노력이 가장 잘 드러난 전장이 일명 호치민 통로다. 글쓴이는 이번 기회를 통해 베트남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음에도 상대적으로 조명받지 못한 호치민 통로에 초점을 맞춰보았다. 책 소개로 들어가기 전에 베트남 전쟁을 잘 모르는 독자들을 위해 관련 내용을 아래에 요약하였다. 잘 아는 독자들은 이 부분은 건너뛰어도 좋다.
베트남 전쟁의 배경
베트남 전쟁은 흔히 미국과 북베트남과의 전쟁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단순히 미국과 북베트남과의 전쟁이라 하기에는 내부에 복잡한 사정이 있다. 최대한 간략하게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다.
1862년, 프랑스는 베트남을 식민지로 만들었다. 이를 시작으로 프랑스는 지금의 라오스, 캄보디아, 등을 모두 식민지로 만들어 프랑스가 지배하는 인도차이나 연방을 만들었다. 프랑스 지배 변화는 일본의 베트남 점령에서 시작되었다. 일본 제국은 1940년, 베트남을 프랑스에게서 빼앗았다가 항복하면서 다시 프랑스에 돌려주었다. 이 과정에서 베트남 독립영웅 호치민(Ho Chi Minh, 호지명)은 독립 선언을 하여 베트남 민주 공화국(Democratic of Republic of Vietnam, 북베트남)을 세웠다. 프랑스는 당연히 호치민 정부를 인정하지 않았고, 이어서 무력충돌이 발생했다. 일명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1946-54)이다. 전쟁 초반에는 프랑스가 유리했으나 끝에 가서는 북베트남이 승리했다.
전쟁을 끝내기 위해 제네바에서 회의가 열렸다. 북베트남은 북쪽에서 공식정부로 인정받았고 프랑스는 철수를 결정했다. 북위 17도 선을 임시 경계선으로 나눈 다음, 2년 이내에 총선거를 실시하기로 했다. 프랑스가 물러난 자리에 이제 미국이 들어왔다. 미국은 북위 17선 이남에서 자체적으로 총선을 실시하여 베트남 공화국(Republic of Vietnam, 남베트남)을 수립하였다. 공산주의 확산을 막기 위한 논리였다. 이런 행동은 많은 베트남인들의 반발을 초래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남베트남에서는 베트남 공화국을 몰아내기 위해 남베트남 민족 해방전선(Vietnamese National Liberation Front, 일명 베트콩)이 결성되어 저항을 시작했다.
북베트남은 적극적으로 베트콩을 지원했다. 각종 물자와 병력을 꾸준히 지원했다. 그러나 국경을 통과하기가 어려웠다. 해안을 통한 방법도 고려했으나, 안정적이지 않았다. 북베트남은 대안을 찾기 위해 노력했고 그 결과, '호치민 통로'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호치민 통로는 당시로서는 중립지대인 라오스와 캄보디아 국경을 가로질러 남베트남으로 통하도록 계획되었다.
호치민 통로
미국은 1964년, 정보기관을 통해 호치민 통로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그러나 군대를 개입하지는 않았다. 미국은 남베트남을 지키면서도 전쟁을 확대하고 싶지는 않았다. 한국 전쟁의 경험상, 북베트남으로 군대를 보내면 중국이 즉각 개입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미국은 북베트남 지역에는 공중 폭격만을 실시했고 군대를 직접 보내지는 않았다. 군대는 남베트남 지역에만 파견되었다. 이 점이 베트남 전쟁을 그토록 오래도록 지속되게 만든 원인이었다. 미국에게 베트남전쟁은 밑빠진 독에 물을 붓는 행위였다. 그 와중에 호치민 통로는 미국이 밑빠진 독에 물을 부을 때, 물을 밖으로 흘려보내도록 한 구멍 역할을 담당했다.
책 속으로
호치민 통로: 1964-73 책표지, 출처: Osprey Publishing호치민 통로 1964-73: 베트남과 라오스에서 강철범, 배럴 롤, 비밀 공중전.
책의 목차는 이 시리즈의 목차를 충실히 따르고 있다. 도입, 양측의 전력 분석, 캠페인 목표, 실제 캠페인, 전투 후 분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도입부에는 호치민 통로를 둘러싼 양측의 대립 과정, 양측의 전력 분석은 무기와 전술 등을 다루고 있다. 캠페인 목표는 미국 공군의 전술 목표와 미국 사령부의 목표를 제시하고 있다. 캠페인은 실제 수행했던 작전들을 다루고 있으며, 전투 후 분석은 일종의 결론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책의 흥미로운 지점은 4가지로 선정할 수 있다.
첫번째는 호치민 통로와 관련된 세부 내용들이다. 북베트남은 15년 동안 꾸준히 이 통로를 유지 보수하고 확장하였다. 1969년에는 남베트남으로 공급되는 물자의 14%를 수송하는 역할을 했으며 갈수록 그 수치는 증가하였다. 이 통로는 오늘날 베트남의 대표적 관광지인 구찌 터널도 이 호치민 통로의 일부다. 미국 추산 200만명 정도가 이 땅굴을 사용했으리라 추측되며 10만명 정도의 일꾼들이 동원되었을 것이라 말하고 있다. 길이는 대략 3218km에 이른다고 한다. 이렇게 완성한 땅굴은 1975년 북베트남의 대공세 때, 남베트남을 몰락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두번째는 미국의 대응이다. 미국은 1965년부터 호치민 통로의 존재를 인식하게 되었다. 당시 베트남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 사령관 웨스트모어랜드 장군은 즉각적인 군사개입을 주장했으나, 라오스와 캄보디아까지 확전될 점을 염려한 미국 대통령 린든 존슨 대통령은 직접적인 군사 개입 보다는 공중 폭격 방법을 선호했다. 지상군을 투입할 때에도 매우 비밀리에 특수부대와 CIA 정도를 활용했다. 따라서 호치민 통로를 봉쇄하고 파괴하는 역할은 온전히 공군에게 맡겨졌다.
세번째는 미국의 새로운 전술이었다. 미국은 계절풍(몬순) 기후와 정글로 인해 호치민 통로를 찾고 수송 행열을 파괴하기 어렵다는 점을 즉각 알게 되었다. 특히 대부분의 수송대열은 야간에 이동하다보니, 더욱 발견이 어려웠다. 여기에는 6.25전쟁 이후에도 야간 공습 전술 개발에 투자하지 않은 미국 공군의 약점이 크게 작용했다. 미 공군은 이러한 단점을 해결하기 위해 당시로서는 매우 신기한 기술을 활용했다. 센서를 설치하는 것이었다. MIT 공대와 하버드 대학 교수의 자문을 받아 정글에 센서를 설치했다(물론 설치 방법은 대부분 공중 낙하였다.) 여기에 무려 8억달러를 투입하였다(센서 이름은 ADSID, ACOUSID다.) 센서는 30일 동안 리튬 배터리로 작동되며 움직임이 감지되면 데이터를 전송했다. 이렇게 전송된 데이터는 중앙관제실에서 모니터로 확인이 가능했다. 센서에 적의 움직임이 감지되면, 즉각 공군이 출동하여 폭격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센서는 오작동이 많았으며 동물이나 다른 움직임에 반응하는 경우도 있고, 전송 속도도 느려 매우 제한적인 성공만을 거두었다. 그럼에도 이러한 미국의 시도는 당시로서는 상당히 최신식 기술을 전쟁에 사용한 것이라 할 수 있다(미국의 이런 센서 투하는 기지를 방어하는 케산 전투 등에서는 적절한 효율을 발휘하였다).
이와는 달리 미국이 성공을 거둬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는 전술은 건쉽(gunship)의 도입과 활용이었다. 처음에는 C-47에 중기관총을 달아 사용하였다가 나중에는 C-131B, 최종적으로 AC-130을 도입하여 작전에 활용하였다. 무기도 점차 개량되어 중기관총에서 나중에는 벌컨, 미니건 심지어 105미리 곡사포도 장착되어 강력한 화력을 내뿜었다. (지상 900m에서 포탄과 총알이 날아오는 공포는 엄청났다) 공중에서 선회하며 탐조등과 야간투시경을 활용하여 적의 수송 행렬을 파괴하는 건쉽은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였다. 예를 들어 AC-47은 1965년 16번 의 작전으로 300명을 사살했으며, 1969년부터 도입된 AC-130건쉽은 반년동안 2000여대의 트럭을 파괴하고 하루에만 300여명이 넘는 적을 쓰러뜨렸다. 이런 효율성으로 인해 건쉽은 지금도 미국에서 지상지원용으로 무기로 활용되고 있다.
AC-130 건쉽, 플레어를 발사하고 있는 장면, 별명이 죽음의 천사다.물론 북베트남도 당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소련으로부터 지대공 미사일(SA-2, 7)을 수입하여 공중 공격을 최
대한 줄이려고 했으며, 미 공군에게 상당한 위협을 주었다.
한편, 미 공군은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화학전도 수행했다. 정글을 제거하기 위해 화약약품을 사용했으며 고엽제도 여기에 포함되었다. 1965년부터 살포된 고엽제는 275 제곱킬로미터의 작물을 초토화 시켰다. 심지어 이런 효과는 40년 동안 지속되었다.
넷째는 저자의 냉철한 평가다. 저자는 호치민 통로 봉쇄를 위한 강철 호랑이 작전이나 배럴 롤, 롤링 썬더 작전들을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저자의 추산으로 이들의 공격은 30% 정도의 수송물자를 파괴했을 뿐이다. 여기에는 숲의 제약과 제한된 항공운용 전력도 한 몫했으며 결과적으로 공군력에 의해서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는 가르침을 줬다고 저자는 말한다. 물론 긍정적인 측면도 없잖아 있다. 호치민 통로를 수송되는 자원에 압박을 가해 상대방의 전쟁 비용을 증가시켰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이러한 작전의 가장 큰 유산은 불발탄이라고 한다. 투하된 115만톤의 폭탄 중 터지지 않은 폭탄들이 지금도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의 숲에 도사리고 있다며 책을 마무리 한다.
이외에도 부가적으로 미국의 공습이 결과적으로 캄보디아 크메르 루주(붉은 크메르)의 성장을 부추겼다는 점과 조종사들을 구하려는 여러 특수부대의 힘겨운 노력들이 기억에 남아 잠시 언급해본다.
책 밖으로
베트남 전쟁으로 인해 미공군은 기존의 전략폭격기 중심의 공군력 증강을 전술폭격기로 방향으로 선회하였다. 핵폭탄 투하 대신, 국지전 공습의 중요성을 새삼 깨달은 것이다. 그러면서 여러 전자전 장비를 도입했고, 이런 노력은 걸프전에서 빛을 발했다. 이라크군은 전투를 시작하기도 전에 대부분의 전력이 손실되어 저항조차 하지 못했다. 게다가 베트남 전쟁 당시, 도입된 건쉽은 이제 미공군의 육상지원의 상징이 되었다. 영화에서도 그 모습이 종종 보일정도니 말이다(트랜스포머 1에 건쉽이 나온다).
이 글이 전쟁사에 관심있는 독자 및 베트남 전쟁에 조금이나마 관심있는 독자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