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사실에서 관점으로
인공지능의 발전속도가 무섭다고 느껴질 만큼 빠르게 성장하고 있습니다. 알파고와 Chat GPT의 충격 이후, 인공지능은 빠르게 우리의 영역 깊숙이 들어왔습니다. 주변에서 인공지능을 쓰지 않는 사람이나 기관, 기업체가 없을 정도로 인공지능은 점차 우리 삶의 일부가 되었으며, 앞으로 그 비중은 압도적으로 커질 예정입니다. 굳이 논증하지 않아도 자명한 이 사실은 이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지능 또는 사고에 대해서 기존의 패러다임을 바꾸어야 함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특히 인간만의 영역이라고 여겨졌던 인문, 사회학의 분야를 향한 인공지능의 영역 확장은 상당히 매서운 수준입니다. 단순한 사실을 검색하는 수준에서부터 인간의 깊은 심리를 이해하는 수준에 이르기까지 인공지능은 과거 인간만이 수행할 수 있다는 영역까지 점령하고 있습니다. 일례로 인공지능에 자신의 특정 감정이나 상황을 입력하면, 평소 그 사람이 생각지 못했던 부분까지 파악하여 현재 자신이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뿐만 아니라 누적된 입력값을 토대로 인공지능은 앞으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다양한 방향에서 제공해주고 있습니다. 현재까지는 절대적으로 인공지능을 신뢰할 수준에 이른 것은 아니지만, 이제 인공지능이 제시하는 해결책은 여러 사람들이 수긍하고 따를만한 수준에 충분히 이르렀습니다.
"이제 책을 보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글쓴이가 이런 변화를 겪으면서 들었던 생각입니다. 인공지능은 단 몇 초 만에 그동안 글쓴이가 열심히 쌓아왔던 독서력을 간단히 돌파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우수한 결괏값을 얻을 수 있습니다. 게다가 그런 글을 읽고 나서 쓸 수 있는 독후감상문이나 서평의 영역도 인공지능은 우습게 넘나듭니다. 이제 줄거리 요약이나 핵심 요약은 인공지능이 훨씬 더 정갈하고 목적에 맞게 수행하고 있습니다. 괜히 대학가에서 학생들이 인공지능을 활용하여 과제를 제출하는 것이 유행이 된 것이 아닙니다. 가장 많이 책을 읽고 탐구해야 할 대학조차 이렇게 변해가는 시점에서 글쓴이는 한동안 독서의 의미를 찾지 못했습니다.
글쓴이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역사의 영역은 더욱 그렇습니다. 역사는 과거를 복원하고 과거를 현재에 전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역사학자들의 손을 거치긴 하지만, 역사는 어디까지나 과거의 일을 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습니다. 이를 두고 독일의 유명한 역사학자였던 랑케(Ranke)는 '사실로서의 역사' 또는'객관적 역사'를 목표로 역사에서의 엄정한 사료 비판을 중심으로 연구를 진행할 것을 주장했습니다. 그의 신조 아래, 역사는 역사학이라는 학문적 위치를 얻었고 오늘날까지 역사학의 기본은 과거의 자료를 분석하고 파악하여 우리가 알지 못했던 혹은 알려졌지만 부족한 사실을 보완하여 좀 더 완벽에 가까운 역사적 사실을 완성하는 것이 주요 목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인공지능의 시대가 열리면서 역사학이 약 200년간 추구했던 이런 학문적 목적은 점차 그 중요성을 잃어가고 있는 듯합니다. 과거에 수많은 역사학자가 달려들어 과거의 사실을 구성했던 작업을 이제는 인공지능이 단 몇 혹은 몇 분 안에 해결할 수도 있다는 우려를 고려해야 하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이런 변화는 역사를 소비하는 독자층에게도 허무감을 던져줍니다. 검색 몇 번으로 자신이 원하는 역사적 지식을 얻을 수 시대인데, 굳이 역사책을 볼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에서 시작된 허무감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렇다면, '정말 역사책은 더 이상 읽을 가치가 없을까?'라는 이 질문에 글쓴이는 아니라고 답변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물론 기본적인 역사지식을 알아야 검색도 할 수 있고 인공지능이 검색한 결과를 알 수 있지 않느냐라고 반문할 수 있지만, 그것은 부수적인 답변일 뿐, 인공지능이 수행하는 방대하고 정교한 역사적 사실의 종합과 분류 그리고 요약이라는 거대한 파도 앞에 연약한 답변이라고 생각합니다.
고민을 거듭하던 차에 글쓴이는 최근에 한 줄기 실낱같은 희망의 빛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서사의 재구성이라는 것입니다. 역사는 수없는 과거의 사실들로 이루어져 있지만, 사실 그것을 이어서 하나의 서사로 만든 것은 바로 인간의 역할이라는 점이었습니다. 즉 여러 사건을 하나의 이야기로 만든 것이 인간의 역할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중요한 사고 과정을 담당하는 부분은 인간의 상상력과 서사 재구성 그리고 의미를 재부여하는 행위입니다.
1904년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한국에게 1904년은 비극적인 해입니다. 일본이 러일전쟁을 일으키면서 한국을 본격적으로 식민지로 바꾸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일본에게는 1904년이 자랑스러운 해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일본이 당시 강대국이었던 러시아를 상대로 승리한 전쟁의 시작점이기 때문입니다. 전쟁사 측면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의 서막이기도 합니다. 강력한 포병과 기관총 앞에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하는 장면을 미리 보여줬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모두 훗날의 역사가들이 현재의 입장에서 의미를 부여하면서 생긴 격차입니다. 이런 점들을 근거로 본다면, 이제 우리가 역사책을 본다는 의미는 작가의 상상력을 토대로 현재의 관점에서 시간의 재편성 혹은 과거를 재편성하는 과정을 들여다보는 과정이 아닐까 합니다.
그렇다면 현재의 위치에서 역사를 재구성하고 평가하는 것이 문제가 없을까요? 그렇진 않습니다. 전문 역사가들은 이를 역사의 오용이나 남용이라고 하면서 크게 경계하고 있습니다. 이 말이 틀린 말도 아닙니다. 사실 과거의 역사 일부분을 가지고 와서 현재의 자기 위치를 정당화하는 행위는 역사학자들이 말하는 반역사적인(ahistorical) 행위가 맞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현재의 위치에서 과거를 조망하는 일이 무조건 잘못된 일은 아닙니다. 인간은 그런 과거의 사건을 이야기라는 형태로 재구성을 통해 오늘날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기억을 형성했습니다. 그리고 그 기억을 토대로 미래로 나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그렇기에 현재를 중심으로 과거를 재편성하여 미래를 전망하는 것은 위험하면서도 해야 할 과정입니다. 특히나 지금과 같이 사회의 변화속도가 매우 빠른 과정에서는요. 저는 여기서 역사책을 읽고 사고하는 행위의 희망을 보았습니다.
주어진 사실을 현재에 맞춰 재편성하고 미래를 대비한다는 점. 그러나 여기에는 많은 공든 작업과 주의와 경계가 필요합니다. 앞으로 이런 신선한 자극을 줄 수 있는 몇 가지 관점을 가진 책이나 학자를 소개하려 합니다.
두서없는 글이었지만, 저의 생각으로는 인공지능 시대에 서사를 파악하고 새로운 서사를 구성해 내는 역량이 매우 중요해지지 않을까 합니다. 그리고 각자만의 서사방식으로 역사를 구성해 보는 방법이 역사학의 주요 연구방법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조심스레 해봅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예상되는 지점은 바로 현재의 자기 위치를 파악하는 것과 무한한 상상력으로 역사를 재구성하는 능력이 아닐까 합니다. 다음 글에서는 이와 관련된 역사학의 논쟁을 살펴볼까 합니다. 바로 현재의 시대에서 역사를 바라보는 것이 과연 정당 한가 아닌가의 문제를 다룬 현재의 관점에서 역사를 파악하는 현재주의(presentism)의 논쟁에 관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