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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을수록 풍요롭다 서평

포스트 자본주의를 위하여


들어가며


인류 종말을 다룬 영화가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재난 영화를 넘어 지구 종말 혹은 인류 종말을 다루는 영화들이 꽤나 많아졌다. 어두운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이런 영화들은 대부분 인류는 어떠한 역경을 겪더라도 극복할 수 있다는 의미를 전달한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소설을 극화한 우주전쟁과 같은 영화들은 외계인의 침공을 다루고 있다. 영화 초반에는 엄청나게 강력한 외계 생명체들이 인류를 말살하려 하지만 결국 인류는 의지력으로 승리를 일구어낸다. 자연재해 영화도 마찬가지다. 대표적인 재난영화 2012도 마찬가지다. 자연재해로 인하여 인류는 멸망에 이를뻔했지만 결국 '노아의 방주'와 같은 신기술로 인류는 생존한다. 인터스텔라는 여기서 더 나아간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능력 같은 신기술로 결국 인류는 재앙을 극복한다. 결국 재난 영화의 결론은 한 가지로 모인다. 인류는 위대하며 어떠한 역경이 와도 극복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극복할 수 없다면? 2021년에 개봉한 영화 '돈룩업(Don`t Look up)'은 앞선 영화와는 정반대의 이야기를 다룬다. 내용은 이렇다. 어느날 천문학자가 지구로 돌진하는 소행성을 발견했다. 이대로 지구가 맞이할 운명은 멸종이었다. 전세계가 힘을 합쳐 멸종을 막아내려 하였다. 하지만 소수 자본가들은 소행성이 지구에 풍요를 가져다 줄 수 있는 금속이라는 점에 착안한다. 그들은 행성을 파괴하지 않고 통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많은 사람들이 반대했지만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결국 인간의 과학기술은 결국 운석충돌을 막아내지 못했다. 행성은 지구와 충돌했고 멸망을 자초한 자본가들은 탈출했지만 나머지 인류는 모두 멸종을 맞이했다. 심지어 탈출한 자본가들조차도 수백년의 세월이 흘러 다른 행성에 정착했지만 살아남지 못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결론이 씁쓸한 이유는 현실을 매우 잘 그려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의 현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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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을수록 풍요롭다는 앞서 영화들이 던져준 두 가지 메시지에서 어떠한 선택을 해야하는가에 대한 답을 내려준다. 바로 지금 당장 모든 것을 중단하고 지구와의 공존을 시작하라고 한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지구로 달려오는 행성과 같은 자연재해 및 기후변화로 인하여 멸종을 맞이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그러면서 책은 어떻게 우리가 다시 시작해야 함을 차근차근 설명해준다. 1부에서는 왜 그리고 어떻게 우리가 지금의 위기에 이르게 되었는가? 2부에서는 우리는 어떻게 위기를 극복해야 하는가를 다룬다.


저자는 자본주의를 지금의 위기를 자초한 범인으로 지목한다. 1부의 1장에서는 자본주의가 어떻게 등장하게 되었는지를 다룬다. 저자는 자본주의에 대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편견을 비판하며 자본주의의 역사가 그렇게 길지 않다고 말한다. 2장에서는 자본주의가 끊임없이 증식하는 작동구조를 인도의 신화에 나오는 '저거너트'에 비유한다. 자본주의는 다른 세계를 끊임없이 수탈하면서 증식하였으며 이는 결국 소수의 행복을 위해 다수를 희생하게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3장에서는 자본주의가 이룩한 신기술이 지금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는 생각에 대한 일갈이다. 저자는 신기술은 어떠한 한 분야의 환경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진 몰라도 결과적으로 다른 분야의 문제를 심화시키게 한다고 경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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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자본주의: 탄생이야기


1부의 1장에서 저자는 지금의 상황을 인류세라는 용어 대신에 자본세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지금의 위기가 자본주의가 야기한 결과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본주의는 언제 등장했을까? 저자의 주장대로라면 자본주의는 500년의 짧은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 시작은 인클로저 운동이었다. 지배층은 1350년부터 1500년까지 '만성적인 비축적'의 위기를 겪었다. 이윤추구가 어려워진 이들은 평민들이 농촌 공동체의 지속가능성을 위해서 공동으로 관리하던 목초지·숲·강에 울타리를 치고 사유화했다.


2장 저거너트의 등장


2장은 자본의 성장을 재촉하는 더 깊은 동인을 탐구한다. 저자는 물건을 생산하고 판매하는 단 하나의 목적은 바로 이윤을 남기는 것이라고 한다. 교환가치에서 발생한 이윤은 자본이 되고 자본은 더 많은 자본을 만들어내기 위해 전부 재투자된다. 저자는 이를 저거너트라고 부른다. 이 과정에서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성장해야 한다는 정언명령을 수행한다.


3장 기술이 우리를 구원할 것인가?


3장은 제목 그대로, 자본주의의 성장주의와 그로 인한 기술 발전이 지금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까에 대한 내용을 탐구한다. 바이오에너지 탄소 포집과 저장(BECCS)를 보자. 이 방법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매력적인, 일종의 감옥 탈출권이었으며, 녹색성장 낙관론자들에게 현실적인 희망을 주었다. 하지만 여기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는 BECCS는 규모의 실현 가능성이 입증된 적이 없다. 게다가 이 방법을 시행하기 위해서는 지구 경작지의 대략 3분의 2 면적에 해당하는 부지가 필요하다. 즉 식량 작물을 재배하던 땅을 전환해야 한다는 말이다. 결과적으로 탄소 수치는 줄일 수 있을지 모르나 생태계 파괴 등의 다른 문제점을 야기할 가능성이 크다.


4장 좋은 삶의 비밀


2부로 이어지는 4장의 주제는 좋은 삶의 비밀이다. 우리가 지난 수세기 동안 목도한 복지와 기대수명의 비약적인 향상이 성장 덕분이라는 것, 우리의 삶을 끝없이 향상시키기 위해서는 성장을 계속해야 한다. 성장을 포기하는 것은 인류의 진보자체를 포기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성장 자체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소득이 어떻게 분배되는지, 그것이 공공 서비스에 얼마나 투입되는지이다.


결국 인간복지에 관한한 중요한 것은 소득 그 자체가 아니다. 우리가 잘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들에 대한 접근권이라는 측면에서 무언가를 살수 있는 소득이다. 이를 복지 구매력이라고 한다. 하지만 극복해야 할 현실은 만만치 않다.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기란 쉽지 않다.


5장 포스트 자본주의 세계로 가는 길


5장은 자본주의를 넘어서 그 다음으로 가는 여정을 다루고 있다. 다른 종류의 경제를 상상함으로써, 그리고 우리가 기후 비상 상황에 어떻게 대응할지 보다 합리적으로 자유롭게 생각할 수 있게 됨으로써 가능해지는 시각이다. 탈성장은 전체적으로 다른 종류의 경제로 전환하는 것이다. 일단 탈성장 경제는 성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자본의 끝없는 축적 대신, 인간의 번영과 생태적 안정성을 중심으로 조직된 경제다.


6장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


책의 마지막 장인 6장은 애니미즘으로 돌아가는 주장을 다룬다. 인류는 놀랍도록 다양한 장소에서 생태적으로 존재하는 방식을 발전시켰다. 오늘날 우리와 가까이 살고 있는 공동체들을 잘 살펴본다면, 현실의 생태적 현명함이 무엇일지에 관한 풍부한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다. 애니미즘은 대안이 될 수 있다. 하비는 애니미즘을 세계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으되, 그중 일부만 사람이고, 생명은 언제나 다른 것들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것으로 정의했다. 이를 신봉하는 애니미스트들은 다른 종들을 주체, 즉 인간이 그러하듯이 자신만의 주체성을 갖고 있으며, 세계를 감각하고 경험하는 주체로 본다. 그들이 사람으로 간주되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그들이 주체이기 때문이다.


나가며


자본주의를 탈피하는 것이 가능할까? 라는 생각으로 필자는 자본주의 사회에 완전히 세뇌되어 있다. 그렇기에 사실상 저자의 생각에 심적으로 공감이 되지만 불안감과 두려움은 여전하다. 많이 가진자가 못 가진자에게 나누고 함께 쓰고 서로가 여유를 즐기는 삶. 누구나 머릿속으로는 이런 삶을 꿈꾼다. 사실 그렇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너무나도 경쟁과 승리에 도취되어 있다. 어떻게든 남을 이겨야 한다. 학교에서도 사회에서도 늘 공존하라고 하지만 실상은 목숨을 건 투쟁의 연속이다. 그렇기에 필자는 더욱더 저자의 의견에 공감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불안하다. 어떻게 저런 세상이 가능할까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이어서 떠오르는 생각은 카를 마르크스가 주장한 사회주의, 공산주의 혁명이었다. 소련의 붕괴로 실패했다고 여겨지는 공산주의가 추구하는 사회가 저자가 말하는 사회와 비슷해 보이는 것은 비단 기분 탓이 아닌 듯 하다. 그렇기에 더욱 우려가 든다. 저자의 좋은 생각이 신마르크스 주의 사상으로 오해받지 않길 바란다. 만약 오해받게 된다면 저자의 좋은 주장은 모두 사라지고 말테니.


마무리를 어떻게 지어야 할지 사실상 모르겠다. 지금의 풍요속에 우리는 과연 줄일 수 있을까하는 생각과 과연 자기 재산을 어느정도 내려놓고 가능할 것인가라는 생각과 함께 누가 그 역할을 담당할까라는 생각까지 머릿속이 복잡하다. 그럼에도 확실한 것은 하나다. 우리는 지금 행동해야 할 때라는 점. 이제 우리에게 삶의 목표는 좀 더 즐겁게 살아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아남기라는 수정하고 빠르게 실행에 옮겨야 한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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