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지질 시대가 우리에게 경고하는 묵직한 메시지
인류세라는 용어가 점차 자주 들리기 시작했다.
기후위기가 더 심해질수록 '인류세'라는 단어는 더욱 자주 언급될 것이다. 인류세란 무엇일까?
인류세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려면 지질학(층서학)과 관련된 약간의 배경이 필요하다.
지구의 탄생 이후, 많은 생물들이 탄생하고 소멸되었다. 여기에는 기후 변화가 주요했다. 그렇게 빙하기와 간빙기를 오가면서 지구상의 많은 생물들이 지층에 자신의 존재를 남겼다. 이를 토대로 지구 전체의 시간을 연구한 학문이 지질학(더 세부적으로 말하면 층서학)이다. 지질학은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시기를 홀로세(Holocene)이라고 부른다. 의미를 번역하면 완전히 새로운 시대다. 이전과는 달리 이제 빙하기가 없고 인류와 같은 새로운 생물이 나타났기에 이런 의미를 붙였다.
그러나 2002년, 국제 학술대회에서 노벨 화학상을 받은 대기 과학자 파울 크뤼천은 이런 용어에 이의를 제기했다. 크뤼천은 "우리는 홀로세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인류세에 살고 있습니다!" 라고 힘주어 말했다. 그러면서 인류가 지구에 등장하면서 지구의 환경은 완전히 새롭게 바뀌었다고 강조했다. 그는 인류가 자연을 변형시키고 활용하면서 결국에는 지구환경 전체를 완전히 바꾸어버렸다고 강조했다. 그렇기에 그리스어에 인간을 의미하는 안트로포스(Anthropos)와 새로운(cene)이라는 의미를 더해 인류세라는 용어를 만들어냈다. 그의 외침으로 순식간에 인류세는 지금의 인간이 바꿔버린 지구환경을 뜻하는 의미로 통용되기 시작했다. 여기에 힘을받아 2019년 인류세 실무그룹단(Anthropocene Working Group)이 만들어졌다. 인류세를 지금의 지질학계에 편입시킬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 하는 것을 심도 있게 논의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2024년 3월 부산에서 열린 국제 지질 학회에서 인류세를 새로운 지질학 시대로 인정할지를 놓고 투표가 진행됐다. 결론은 실패했다. 그러나 투표에 참여했던 연구자들은 하나같이 인류세라는 단어가 가지는 의미를 곱씹어 보면서 더 논의를 확장해야 한다고 말했다. 크뤼천의 외침으로 탄생한 인류세는 아직까지 학술적으로 인정받지 못했지만 전 세계에서 엄청난 파급효과를 일으켰다. 특히 인류가 변형한 지구 생태계로 인해 해를 거듭할수록 자연재해가 심해지면서 인류세는 더욱더 자주 등장하게 되었다. 이제는 국내에도 인류세를 다룬 책을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어느 책부터 봐야 할까? 글쓴이는 교유서가 첫 단추 시리즈에서 발간한 '인류세'를 추천한다. 책의 저자가 인류세 실무 그룹단에서 일했던 학자이기에 더욱 믿음직스럽다.
1장 기원들(Origins)
파울 크뤼천의 발언에 초점을 맞추며 1장은 '인간이 어떻게 환경을 변형시키는 존재가 되었을까?'라는 질문을 던져보는 장이다. 즉 지금의 위기 상황에 맞추어 시간을 재정렬 해보자는 저자의 생각을 담고 있다.
2장 지구 시스템(Earth system)
빅뱅부터 지구에 생물이 살면서 현재에 이르기까지를 다루고 있다. 지구 시스템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가 중점이다. 여기에는 가이아 가설(생물권이 마치 온도 조절 장치처럼 작동하면서 지구의 기후를 조절)을 중점으로 논의를 풀어나간다.
지구 시스템은 물리적, 화학적, 생물학적, 인간적 요소로 이루어진 하나의 자기 조절적 시스템으로서 작동한다. 지구의 지표면, 해양, 해안, 대기, 생물학적 다양성, 물의 순환 그리고 생물지구화학적 순환에서 인간이 초래한 변화는 자연적 변이를 넘어서는 수준이며, 이는 명백하게 확인할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렇기에 인간이 초래한 변화는 그 규모와 영향력에 있어서 몇몇 거대한 자연의 힘에 비견될 정도라고 강조하는 부분이다.
3장 지질시대(Geologic time)
층서학(stratigraphy), 우리 행성을 형성하는 지질학적 과정에 의해 암석에 물리적인 흔적이 남아야만 지질학적 연대표를 직접 구성해내는 장이다. 지구과학 시간에 들어봤을 법한 누대(eon), 대(era), 기(period), 세(epoch)와 같은 표현이 나온다. 이어서 층서학에 관한 짧은 소개가 나온다. 층서학의 역사, 방사성 연대 측정법이 그것이다.
이들은 황금못(GSSP, 국제표준층서구역)을 통해 지질학적 연대를 결정하는데, 이러한 표시가 되는 지역에 박아넣는 표시를 황금못이라고 통칭한다.
4장 거대한 가속(The Great Acceleration)
1950년부터 지구 환경 변화가 가속화 되었음을 강조한다. 모든 면에서 인간의 지구 환경 파괴가 가속화되었다는 점이 4장의 핵심내용이다. 실제로 '대가속'이라는 표현은 인류세의 역동적인 힘을 표현할 때와, 인류의 급격한 증가를 설명할 때 자주 쓰이는 표현이다.
5장 안트로포스(Anthropos)
정확히 언제 인간이 지구환경을 지배하게 되었는가? 라는 질문에 답하는 장이다. 저자는 그 시작점을 5가지 정도로 제시하고 있다.
첫째는 구석기 시대(도구와 불의 사용)-대형 포유류 멸종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둘째는 신석기 시대-탄소의 방출, 물길 변화, 토지의 변화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셋째는 3000년경 문명의 탄생(도시의 성장)으로 인류의 영향력이 비약적으로 증가했다고 말한다.
넷째는 콜럼버스의 교환이다. 이 주장은 꽤나 흥미롭다.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도착으로 인해 아메리카 원주민 95%(6천만명에서 8천만명 정도로 추산)이 멸종하였다. 이로 인해 아메리카 대륙에서의 농경은 사실상 중지되었다. 농경지의 축소는 탄소 배출의 감소로 이어졌고 이는 대기중에 탄소농도가 줄어듦을 의미했다. 이는 결국 1600년대 소빙하기로 이어졌다. (한국에서는 1600년대 조선시대 유독 기근이 많다는 기록이 있다, 전세계에서는 이 기간동안 전쟁이 엄청나게 발생했다)
다섯째는 1950년대 이후 인간의 시대(산업혁명, 핵실험)다. 앞서 설명했던 것처럼 대가속이라는 현상과 핵실험으로 인해 인류는 스스로를 멸망시킬 힘을 가지게 되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6장 오이코스(Oikos)
자연의 가치가 무엇인지, 점점 더 인간에 의해 변화되는 생물권의 생태학을 형성하고 조직하는 데 있어 인간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재정의하는 장이다.
기존 생태관에서 인간과 자연은 구분되었다. (뷔퐁, 훔볼트가 주장함)
하지만, 우리가 돌아가고자 하는 자연은 존재하지 않고 있다. 인간은 새로운 형태의 자연을 공동으로 창조하는 중이다. 그렇기에 사실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은 없는 셈이다. 그렇다면 남은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를 어떻게든 유지시켜야 한다. 따라서 저자는 행성적 경계라는 표를 활용해 지금이 어떤 위기에 처해있는지를 가늠해본다.
여기에는 기후변화, 해양 산성화, 성층권 오존 고갈, 질소 순환, 인순환, 담수 이용, 토지 이용 변화, 생물 다양성 손실, 에어로졸 유입, 화학적 오염이 포함되어 있다.
7장 폴리티코스(Politikos)
인류세를 둘러싼 각정 정치학, 인류세 용어 자체에 대한 부정적 의견부터 인류세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가?라는 질문에 답하는 장이다. 자본세(Capitalocene, 자본주의가 지금의 위기를 만들었다), 툴루세(Chthulucene, 탈인간중심화 인간이 애초에 지구흘 변화시킬 권리를 과연 가졌는지에 의문을 제기함), 대농장세(Plantationcene, 플랜테이션 농업으로 인해 지금의 위기가 초래되었다는 주장)와 같은 용어를 주장한다. 그리스어 폴리티코스는 영어의 폴리틱(Politics, 정치학)이다. 인류세를 둘러싸고 책임이 어디에 있는지를 찾는 장이라고 할 수 있다.
8장 프로메테우스(Prometheus)
기술권Technosphere, 기술을 활용한 지금의 인류세를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이 잠시 나온다. 예를 들어 지구공학 탄소포집, 나무심기, 숯 묻기, 에어로졸 주입이 그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태양을 향해 날았던 이카루스의 비유를 들며 부정적 인류세 미래와 자만심을 경계한다.
결론적으로 저자는 인류세는 개개인의 삶보다 더 큰 것을 생각하라고 요구한다. 또한 인류세는 인간 사회의 시간보다 더 긴 시간 단위 속에서 태초부터, 종말까지 행성 전체의 작동과 변화를 상상하라고 요구한다고 말한다. 이런 방식의 사고는 ‘거대 역사(Big HIstory)’의 관점을 통해 교육을 재구성하려는 광범위한 노력과 잘 어울린다며 끝을 맺는다.
사실 마지막 장은 저자의 바람이 들어가 있는 장으로 생각해볼 여지가 많다.
인류세가 우리에게 던져주는 의미는 3가지다. 첫째는 분과학문 체계의 위험성이다. 우리는 세부적으로 나뉘어진 전문지식인들이 지식을 생산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최근에는 이런 경계가 무너지고 있긴 하지만 여전히 강력한 분과학문의 시대에 살고 있다. 이런 체계가 그 분야에 한정되는 문제를 분석하고 해결하는 데에는 좋으나, 대부분의 문제는 여러 학문분야에 걸쳐있다. 그래서 최근에는 다시 융합적 사고력이 중요시되고 있다. 그런 능력을 가장 필요로 하는 분야가 글쓴이가 보기에는 환경문제가 아닌가 싶다. 자연과학적 지식이 문제해결을 위해서 필수라면, 인문 사회과학적 지식은 그러한 문제해결을 위한 에너지 공급 역할에 필수적이다. 따라서 인류세는 우리에게 인문학적 소양과 자연과학적 소양의 결합을 요구하는 단어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언제까지 나와 관련이 없다고 외면할 수는 없다.
둘째는 기후위기의 심각성이다. 이제 기후위기는 기후 재앙이라고 부른다. 그동안 우리는 진보와 발전을 최고의 미덕으로 여겼다. 많이 생산하고 많이 소비하고 그렇게 하는 것이 경제발전을 위한 최고의 가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인류세 시대에 이런 사고방식은 지구를 소모하기만 할 뿐, 유지할 수 없게 만든다. 유난히 길었고 더웠던 이번 여름을 생각한다면, 더 이상 기후위기는 지구의 일정지역, 국가만의 문제는 아니다. 모두에게 해당하는 문제다.
셋째, 인식에서 실천이다. 남은 건 실천만이 남았다. 기후위기 소식을 들으면 혹자는 기피하고 다른 사람들은 냉대한다. 또한 어떤 사람들은 종말론적 세계를 꿈꾸며 모든 것을 포기한다. 그럼에도 모두가 내려놓고 있을수만은 없다. 조금이라도 실천을 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분리수거를 하지 않고 그냥 쓰레기를 버리거나 소비를 할 때 조금이라도 마음에 걸리는 것을 만드는 것이 바로 인류세가 우리에게 기여하고자 하는 바가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