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에 부모님 댁에 들렸다가 책장에 먼지 쌓인 시집들 몇 권을 데려왔다. 그중에 김광규 시인의 시집을 읽었다. 이 시집의 초판은 1979년, 가격은 1,200원이다. 때로 이런 것이 참 신기하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누군가 시를 쓰고 있었다는 것. 나와 똑같이, 사람에 대해 세상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고 때로 부끄러워했다는 것. 시인이란 직업인이 존재했고 존재하고 존재할 것이라는 것. 그것은 참으로 희귀하면서 고귀한 희망이다.
제법 알려진 그의 시 중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라는 시가 있다. 4.19가 나던 해 세밑에 만나 열띤 토론을 벌이고 노래를 부르고 세상을 개탄하던 젊은 누구누구들이 18년 만에 기성세대가 되어 만나는 장면이 그려진다. 마지막 장면은 이러하다.
부끄럽지 않은가
부끄럽지 않은가
바람의 속삭임 귓전으로 흘리며
우리는 짐짓 중년기의 건강을 이야기했고
또 한 반짝 깊숙이 늪으로 발을 옮겼다.
-김광규,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중
'부끄럽지 않은가'라는 문장에서 가슴이 쿵. 했다. 하늘에서 땅으로 무언가가 쿵 떨어졌다. 그게 내 양심 비슷한 것이라는 것은 조금 지나고 깨달았다. 요즘 내가 느끼는 불편한 감정이 있었다. 딱 이름 붙여주지 못했는데 그것이었다. '부끄러움'. 작금의 나라 상황에 개탄하고 화를 내다가 어느 순간 내 살 길을 고민하고 지금의 현실을 잊고 싶어 하는 나, 가 있다. 뉴스를 보다가도 슬그머니 채널을 돌리고 싶어 하는 나, 가 있다. 등장인물이 너무 많아진 정치 드라마 같다는 누군가의 이야기에 속으로 조용히 동조하고 싶어 하는 나, 가 있다. 나라 걱정이 되어서 계속 유튜브를 본다는 25살 청년과의 상담에서 '나라 걱정은 살살하고 너는 곧 있을 자격증 시험공부에 매진해."라고 말하며 이게 맞나, 이렇게 말하는 게 아주 조금 더 산 어른인 내가 그 애에게 전할 가장 지혜로운 말인가..라는 생각에 씁쓸해하는 나, 가 있다.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를 다시 읽으면서 비슷한 감정을 경험했었다. 책을 읽을 때 정독 하며 등장인물에 깊이 빠져드는 내가, 이상하게 자꾸만 속독해서 읽으려 했다. 나는 읽으면서도 잊고 싶어 했다. 아픈 장면에서는 눈물을 줄줄 흘리다가 덮어버렸다. 완전히 외면하지 못하면서 완전히 끌어안지도 못하는 나,를 마주하고 나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러다 다시 심호흡하고 펼치면 새로운 책. 읽으면서 빨리 잊으려 한 대가로, 매번 새로 마주하는 책처럼 읽어야 했다.내 의식이 지워버린 '동호'를, 저만치 걸어오는 소년을 다시 만나야 했다. 그리고 그 반복은 내 안에 늘 잠복해 있는 '타인을 향하는 마음'을 잊지 않게 해 줄 것이라는 점에서 안도했다. 외면해서는 안 되는 누군가의 죽음을, 그리고 살았다면 찬란했을 그의 삶을, 다시 책을 펼칠 때마다 생생하게 지금 여기에 살아있게 할 것임을.
문학을 읽으며 숨겨진 내 감정과 수많은 나를 만난다. 그 '나'는 늘 내가 자랑스러워하는 나, 가 아닐 때가 많다. 그 또한 나의 한 모습임을 인정하는 자리에 가만 앉아본다. 나라를 걱정하는 나와 나의 안위를 걱정하는 나, 내담자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줘야 할지 갈등하는 나, 아픔을 반복하고 싶어 하지 않는 나, 고통을 외면하고 잊고 싶어 하는 나, 부끄러워하는 나, 그럼에도 다시 용기를 내어 계속 내게 오는 소년을 마주하려는 나, 이 모든 '나'를 끌어안아주기로 한다. 희미하게... 계속 소년이 올때마다 아파하면서도 환대하는 나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