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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와 자식 그리고 나

자식은 부모를 뛰어넘을 수 없을까

by 수야

어린 시절, 부모님은 술을 좋아하셨다.


특히 아버지가 술을 좋아하셨는데, 술에 취해 들어오는 것은 십중팔구였다.

본인의 자식 또한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들어오신 적도 있었고

어머니에게 흔히 말하는 꼬장을 부리기 일 수 였다.


그렇기에 아버지가 술을 드시고 들어오신다면 나는 긴장했다.

2남 중 막내로 친형은 먼저 가족을 손절하고 갈 길을 갔고,

나는 그렇게 하기엔 너무 어리고 나약했다.


그렇기에 가정의 평화를 위해 내가 아버지를 여자인 어머니를 대신해 챙기러 다녔다.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그런 과정이 지속되고

남자인 나는 아버지께서 취해 들어오시고 그 다음 날 카카오톡으로 상태메시지로 내가 술을 마시면 콱 죽어버리겠다.

그렇게 마시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표현을 과격하게 해서 게재했다.


아버지는 그 모습에 적잖게 충격을 받으셨고 어머니가 내 카카오톡 상메를 보여드리며 술 좀 자제해달라고 아버지한테 말씀드렸다.

분명히 사람이 살아가면서 그런 순간이 오는 것 같다.

자식과 부모 간의 힘의 균형이 교차하는 순간이 말이다.


부모는 노쇠해지고, 자식은 초승달처럼 힘이 차오른다.

서로가 반달의 순간을 맞이해 그런 역전되는 시각 말이다.


아마 그 떄가 그 순간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런 기억 때문에 술냄새에 예민하다.

비염 수술을 하고 나서 후각의 대부분을 잃어버렸지만 술냄새 하나만큼은 기가 막히게 맡는다.


글이 너무 화가 차있는 것 같아 잠깐 설명하자면

나는 부모에게서 충분하게 사랑을 받고 자랐다.


술에 대한 예민함을 이제 연인에게 표현하는 것을 느꼇다.

여자친구에게 술에 취해 들어올 때마다, 화가 나기 시작하고 술에 취한 아버지에게서 느꼈던 동일한 감정을 말이다.


다시 과거로 휘릭하여 생각해보자면 대학생 때 처음으로 술을 마셨다.


빠른 년생으로 학교를 들어가 친구들 없이는 술을 마실 수 없는 피동적인 존재였다만 마셨던 술은 나를 옥죄였다.

술을 통해 친구를 사귀기도 했고, 누군가의 진심을 들어보기도 했다.

아버지를 통해 혐오했던 음주가 생각보다 삶의 더 많은 기회를 주는 것 같아서 뭔가 웃기지 않나 싶기도 하다.

술이 없으면 대화가 안 되는 걸까라고 생각을 하기도 했다.

술이라는게 고작 뭐라고 말이다.


그러다 인사불성이 나또한 되어보고 술먹고 별 짓을 다 해보더니 아버지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성인의 증표인 민증 딱지를 통해 얘기를 나누는 그런 허브인 술이라는게 참 웃기다.

과하지만 않으면 즐겁고, 과하다면 자신과 주변을 갉아먹는 암세포가 되는 것 같다.


그럼에도 음주를 통해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던 배경은 현실이 괴로웠다.

아무 밑천 없이 전라도에서 경상도로 건너가 나 혼자서 맨 바닥에 헤딩하기란 힘에 부쳤다.

그리고 술이 적잖아 위안을 주었다.


혼자 마시는 술, 친한 친구들과 마시는 술, 모르는 사람과 마시는 술

다양한 종류가 있겠지만, 주로 첫 번쨰와 두 번째가 내 음주 유형이었다.


친구들과 마시는 술은 술이 약해 인사불성이 되기 일쑤였고,

혼자 마시는 술은 적잖아 즐거웠다.


내 내면과 대화하고 그리고 그 대화의 결론은 술에 취해 자고 일어나면 잊어버렸다.

시간이 지나고 회사에 취업하여 회식을 진행하면 내 의지와 상관 없이 내 주량을 넘기기 일 쑤였다.


그리고 나는 기억을 잃어 버린적도 있었고 그런 상황에 우울감에 휩쓸려 죽고 싶은 적도 많았다.

사는 것에서 차곡차곡 적립해왔던 행복이라는 모래성을 음주 한 번에 날려먹는 그런 것 말이다.


그리고 매 번 생각했다.

'아버지를 이해하게 되는 나이가 온다는데 정말이구나'

동시에 '아버지를 뛰어 넘을 수는 없을까'

를 생각했다.


어린 시절에 내가 늘 원망했던 것은 술냄새였다.

그 술냄새에 치기 어린 원망으로 대못을 부모 가슴에 박아보기도 했고

자제하려고 노력했지만 어느 순간 느낀 것은 나도 결국 그렇게 됬다는 것이다.


여자친구에게 표현한 음주에 대한 원망이 반대로 보면 내로남불 같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나는 그렇지 않으려고 하려 한다.


오랜만에 쓰는 브런치 글이 그렇게 좋은 주제는 아닐 수도 있지만 말이다.


미국 드라마 "더 보이즈"라는 미디어에서 홈랜더라는 주인공이 있다.

슈퍼 히어로로서 악역들을 퇴치하지만, 부모에게서 받은 고통을 벗어나려고 한다.

하지만 드라마의 후반에는 홈랜더는 자신의 자식에게 받은 짓 그대로를 하며 드라마는

"부모를 넘는 자식은 없다"를 보여준다.


과연 나도 그렇게 될 것인가...라는 물음에

나는 진지하게 고민해본다.


브런치라는 하나의 웹에 내 생각들을 적어나가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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