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마을에 살고 있다는 감각.

by 서은

‘마을’, ‘고향’이라는 말에는 안정적이고 포근한 느낌이 있다.


사람은 태어나고 싶은 곳을 선택해서 태어나지 않는다. 어쩌다 보니 태어난 곳에서 내가 선택하지 않는 사람들과 중요한 관계를 맺으며 자라게 된다. 어렸을 때 자란 곳과 부모님의 집은 이제 내게 익숙하고 편안한 공간이 아니게 된 지 오래되었다. 어렸을 때 자란 곳보다 지금 살고 있는 지역을 더 ‘고향’ 같이 여기고 있다. 이곳에서 살기 시작한 지는 거의 10 년째가 되었다. 마을에 들어와 처음으로 만나고 엮어 온 여러 갈래의 관계들도 10 년이라는 시간 동안 다양하게 변하였다.


지난 7월에 알고 지내던 이웃이 갑작스럽게 돌아가셨다. 언제나 예전처럼 데면데면하게 마을에서 스치듯 만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던 분이었다. 부고를 접하고 처음에는 고인보다 나와 더 가까운 관계라고 느끼는 고인의 반려인이 겪을 충격과 슬픔에 더 마음이 쓰였다.


‘아이고, 우리 회장님 어쩌지.’


그러다 점점 시간이 지나면서 고인과 나의 관계에서 비롯된 상실감과 허망함이 겹쳐졌다. 고인은 나에게 상당히 큰 존재감으로 이 마을살이에 든든한 기반이 되어주던 존재였다. 나는 이 사실을 그가 고인이 되자 알아차렸다.

이 지역의 장례문화는 다른 지역과는 다르다고 하는데 나는 장례식에 드나들 나이를 이 지역으로 이주한 후에 맞이하여 다른 장례식 문화는 경험하지 못했다. 장례식 때 어떻게 해야 예의에 어긋나지 않는지 잘 모르기 때문에 보통 꼭 가야 할 명분이 있지 않다면 장례식장에 직접 가기보다 계좌이체로 소정의 부조를 전달하고 소임을 다하였다고 여기었다. 30대니까 3만 원으로 통일해서.

그러나 이번에는 온 마음으로 고인을 보내는 의식에 되도록 많은 시간을 함께 하고 싶었다. 그 애도의 시간이 나에게도 꼭 필요했다. 10 년이 가까운 시간 동안 언제나 한결같이 묵묵한 미소로 대해 준 그에게, 그가 살아있는 동안 왜 더 다정하지 못하였을까. 왜 조금 더 그를 위해 생각하고 마음 쓰지 못했을까. 하는 후회가 올라왔다.

그를 보내는 의식에 많은 아는 얼굴들을 만났고 오랜만에 목소리를 나누고, 멀찍이서 서로의 존재를 의식하기도 하며 그 장소에 함께하기에는 의외로 여겨지는 사람이면서도 그곳에 기꺼이 있음으로써 나도 마을의 일원임을 단단하게 주장하는 것만 같았다. 늦었지만, 실천하지 못한 사랑으로 당당하게.

그가 살아생전에 그려온 선한 인생의 곡선과 부드러운 마주함이, 더 좋은 세상을 꿈꾸는 열정이 얼마나 소중했는지. 그를 보내는 그 자리는 그의 다정했던 묵묵함이 열매가 되는 자리인 것도 같았다. 덕분에 오랜만에 만난 아는 얼굴들과의 지난 서운함을 뒤로하고 만날 수 있게 했다. 그처럼 모두가 든든하고 소중한, 나의 마을살이에 정서적 기반이 되어 주는 존재들이라는 것을 되새길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이미 이 마을을 떠나 옆 마을, 혹은 먼 마을로 이사한 이웃들과 여전히 한 마을에 살고 있다는 감각을 가지고 있다. 분명히 다른 마을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나는 어느 마을 길을 걷다가 ‘여기는 우리 여성위원장님네 집.’, ‘여기는 농부시인 삼촌네.’ 하며 속엣말을 하고 지나곤 한다. 날 좋은 저녁 즈음에 옥상에 올라가는 계단에 앉아 핸드폰으로 영상을 보는 어르신을 매번 못 본 척 지나치면서도 그 골목을 지날 때는 ‘우리 윤ㅇㅇ어르신네.’ 하며 지나곤 한다. 이 모든 이들과 돌아가신 고인과도 여전히 앞으로도 함께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나는 지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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