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과 후 나는 민재가 새로 발견했다는 옆 동네 책방을 따라가게 되었다.
"울 동네 책방은 5권까지 밖에 없는디 거그는 10권까지 다 있드라니까?"
"만화책 종류도 훨씬 더 많아야?"
책방으로 발길을 향하면서도 어딘지 평소보다 들뜬 모습의 민재는 마치 자랑거리를 늘어놓듯이 말이 많았다. 그리고 그렇게 재잘대던 사이에 우리는 어느덧 책방 앞에 도착해 있었다.
"여거가 거거여."
도로변에 있었던 큼지막한 그 책방은 우리 동네에 있는 곳 보다 확실히 구미가 당기는 책들이 많았다. 아직 출간이 안된 줄로만 알았던 책들도 보란 듯이 진열대에 놓여있었다.
"와 진짜 여기는 다 있네. 우리 동네 책방이 신간을 안 들여놓은 거였구나..."
"아 근다니까는. 나는 저 안쪽에서 책 좀 찾아 볼랑께 너는 여그서 구경하고 있어."
민재는 따로 찾을 책이 있는지 책장들 사이를 두리번거리며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 뒤로 나는 다시 신간들로 눈을 돌렸지만 그것들을 편하게 꺼내보지는 못했다. 교보문고 같은 대형서점이 아니고서는 책을 오래 펼쳐보고 있으면 서점 주인들이 서서 다 읽고 간다고 혼을 내곤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책을 살 만큼 돈을 가져온 것도 아니라 더욱 눈치가 보이기도 했다.
그래도 신간 소식을 알게 된 것과 표지를 보는 것만으로도 재미는 충분했다. 그렇게 책장을 바라보고 있는데 어느새 돌아온 민재가 어깨를 툭 치며 소곤거린다.
"내가 살라고 했던 그 책은 마침 없는 거 같구마. 너도 볼 것 다 봤으믄 그만 가자."
그렇게나 서점 자랑을 하던 것치고는 별로 구경도 하지 않고 벌써 돌아가자는 말에 좀 의아하긴 했지만 나 역시 꼭 사야 할 책도 돈도 없었기에 더 이상 머물러야 할 이유 또한 없었다. 우리는 좌우로 늘어선 책장들 사이를 지나 출입구로 향했다.
나가려고 문을 열자 출입문에 달린 싸구려 풍경이 요란한 소리를 낸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 우리를 불렀다.
"야 너네 잠깐 이리 와봐."
뒤를 돌아보자 카운터에 있던 서점 주인이 보고 있던 신문을 접어 놓으며 손짓을 하고 있었다. 이유야 알 수 없었지만 와보라고 하니 우리는 쭈뼛거리며 카운터 앞에 섰다.
"너희들 무슨 책 사러 왔니?"
"찾는 책이 있어서 온건 아니고 그냥 구경하러 왔어요."
라고 나는 대답했다.
"그럼 너는?"
주인이 이번엔 민재를 바라보며 묻는다. 하지만 민재는 뭔가 주저하는 표정으로 대답이 없다.
"너. 거기 지퍼 열어봐."
주인은 민재의 점퍼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나 민재는 반응이 없다.
"글쎄 열어보라니까?!"
주인이 언성을 높이자 민재는 마지못해 지퍼를 내렸다.
"투두둑!"
그리고 지퍼 속에서는 서너 권쯤의 책들이 흘러나와 바닥에 떨어졌다.
"이 새끼들이! 내가 이럴 줄 알았지!"
"여기가 어디라고 도둑질을 해 도둑질을!"
충격적인 전개에 나는 할 말을 잃었고 민재는 눈물을 글썽이며 주인에게 빌었다.
"아저씨 잘못했어요.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진짜 다음부턴 안 그럴게요."
민재는 울며 매달렸지만 그에게 자비란 없었다.
"내가 니들 같은 애들 한두 번 보는 줄 알아?"
"아저씨! 저 아빠가 알면 죽어요. 한 번만 봐주세요! 네?!"
"봐주기는 뭘 봐줘? 혼이 나봐야 정신을 차리지!"
"저기 구석에서 무릎 꿇고 있어!"
그리고 씩씩대며 전화기를 들더니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거기 경찰서죠? 여기 서점인데 애 둘이서 책을 도둑질했지 뭡니까?"
"일단 제가 붙잡아 놨으니 와서 조치 좀 취해주세요."
경찰서라니! 책 구경을 갔다가 경찰에 연행되는 전개를 맞이한 나는 이 상황이 도저히 믿기질 않았다. 혹시 꿈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경찰서행이라는 것은 어린아이가 감당하기에는 충격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현실이라는 것을 입증하듯 5분쯤 뒤에 서점 앞에 경찰차가 멈춰 섰다.
"이름이 뭐야?"
"나이는?"
"학교는?"
"그리고 여기에 집 전화번호랑 부모님 성함 적어라."
우리는 그대로 경찰차에 태워져 이송되었고 TV에서나 보던 경찰 아저씨들의 취조를 직접 받고 있었다. 너무나 무서웠다. 경찰서 기록이 남아 나는 범죄자가 되는 것일까 등등의 생각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그리고 이 사실이 부모님과 학교에 알려진다면 대체 나는 어떤 처분을 받게 될까도 극도로 두려웠다.
대체 민재는 어째서 그런 행동을 한 것일까에 대해서는 오히려 생각할 겨를이 없을 정도였다.
신원 파악을 마친 경찰 아저씨는 각각 우리들의 부모님께 전화를 걸었고 이 상황을 알렸다. 그리고 전화를 끊고 한숨을 쉬며 일어섰다.
"에휴.. 어린 것들이 벌써 책이나 훔치고 말이야.."
그리고 증거물로 입수한 훔친 책들을 하나씩 펴서 훑어본다. 그리고 책을 덮고 우리를 힐끗 쳐다본다.
"거기다가 여자 만화네? 요것들 봐라.."
그렇다. 나는 도대체 뭘 훔쳤는지 알 겨를도 없었지만 그것은 야릇한 여자 캐릭터가 표지에 그려진 만화책이었다. 그동안 우리가 보고 낄낄댔던 만화책들도 설마 이렇게 구해졌던 것일까 하는 의심도 들었다.
"어쨌든 너희들 부모님 곧 오신다니까. 그전까지 여기 진술서 다 쓸 수 있도록 해라."
그렇게 진술서를 다 쓸 무렵 우리의 부모님들은 당황한 표정으로 경찰서를 찾았고 간단한 절차 후 부모님을 동반한 귀가 조치가 취해졌다. 나는 귀가해 부모님께 사실을 알리며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진위야 어쨌든 방과 후 집에 오지 않고 쓸데없는 곳에 싸돌아다니며 그런 친구들과 어울렸다는 사실에 혼나야 했다.
"어휴~ 새로 이사 온 집 아들이 뭘 잘못했는지 즈그 아빠한테 디지게 맞았대요. 글쎄~"
"그게 또 무슨 일이래요? 못된 짓이라도 했나?"
"나도 옆집 수진이 엄마한테 전해 들은 거라 잘 모르지만 어디서 뭘 훔쳤대나 뭐래나."
"어머 어머!!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더니 별일이네요."
"누가 아니래요. 글쎄가.. 요즘 애들 참 걱정이네요. 그 집 아들도 단속 잘하슈."
"어머? 우리 주영이가 얼마나 착실한 애인 데요. 잘 알지도 못하면서!"
사건이 있은 후 며칠이 지났고 나는 골목 아줌마들의 수다를 통해 민재의 근황을 들을 수 있었다. 학교에서 같은 반이지만 그 일이 있은 후 우리는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 응어리는 어린 초등학생들이 풀어내기에는 다소 어려운 부분이 있었다. 책을 훔치는 동안 주의를 끌 누군가가 필요했지만 실패했을 때 친구에게 돌아갈 불상사까지는 미처 생각이 닿지 않았던 것일까?
그 짧은 생각은 결국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이어졌고 두 어린이에게는 그 후의 서로를 마주하고 이야기를 풀어낼 성숙함은 아직 부족했다.
그렇게 상황은 결렬된 채 시간은 흘러 우리는 졸업을 하고 그 뒤로는 그야말로 볼일이 없게 되었다. 그리고 도대체 왜 그랬었는지 물어볼 마음이 생긴 것도 그맘때의 일이었다.
하지만 되돌아봐도 왠지 밉거나 원망스러운 감정의 흔적은 없다. 싹트는 도중에 굳어서 화석이 되어버린 우정이 조금 아쉬울 뿐.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