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런 도감 : 봉북리 따발총 3화

by 아포드


오락실에서 만난 깡패들에게 동전을 모조리 빼앗긴 우리는 주차장 구석에서 무릎을 꿇은 채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억울함과 서러움이 어린 마음들을 적셔온다. 그 와중에 문득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이 있다.


"킥킥킥! 나 그래도 신발 깔창 밑에 숨겨둔 3천 원은 안 뺏겼어."


침묵을 깨는 나의 말에 얼어붙었던 민재와 동생의 표정이 녹아내린다. 그리고 우리 셋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서로를 마주 보고 낄낄댄다. 그야 당시에는 길 가다가 어처구니없이 깡패를 만나 돈을 뺏기는 일이 종종 있었기 때문에 돈을 많이 들고나가야 한다 싶은 날에는 돈을 꼭 여기저기 숨겨서 나가곤 했기 때문이다.


나는 둘에게 물었다.


"우리 이걸로 못다 한 게임 좀 더 하러 갈래?"


"놔둬야. 오늘 재수 옴 붙었구먼. 그러다 아까 그 깡패 놈들 또 만날라."


"그라지 말고 우리 집이나 놀러 갈래? 너 우리 집 한 번도 안 와봤재?"


"아 참 오늘 집에 부모님도 안 계신다고 했지? 그럼 모처럼 가볼까?"


우리는 주차장을 빠져나와 민재네 집으로 향했다. 친구네 집을 처음으로 방문할 생각에 아까 있었던 불미스러운 일은 이내 희미해져 가고 새로운 기대감이 마음을 채웠다.




그렇게 도착한 집은 빨간 벽돌로 지어진 주택이었고 민재네 집은 2층이었다. 2층이라고는 하지만 아랫집이 반지하였기 때문에 정확히는 1.5층이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르겠다. 민재가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문을 열었다.


"철컥.. 끼이.."


"자! 들어와."


낯선 현관에 발을 딛는 순간 그 집이 갖고 있는 생활감 넘치는 냄새가 마중을 나온다. 희미한 찌개 냄새, 빨래 냄새, 체취 등이 섞여 만들어내는 나름의 고유한 냄새다. 방 두 개와 부엌이 있는 조촐한 집이었다. 큰 방 안쪽으로 가자 책장에 꽤 많은 책들이 꽂혀있었다.


"와 너 공부 잘한다더니 책도 많이 읽는구나?"


"응 책도 많이 읽고 그래서 문예창작반에서 활동도 하고 그랬재."


"문..예.. 창작? 그게 뭔데?"


난생처음 듣는 단어였다.


"니 그것도 모르냐? 글짓기 잘하는 애들이 모여서 글 쓰고 발표하고 그러는 거여."


"문예창작반 애들이 나 서울로 이사 간다고 롤링 페이퍼 써준 거 있는데 한 번 볼래?"


민재는 의자를 밟고 올라가서 책장 높은 곳에 꽂혀있던 두툼한 바인더를 꺼낸다.


바인더를 열자 그간 받은 수많은 상장들이 쏟아져 나왔다. 경진대회, 글짓기 대회, 고무동력기 대회 등등 나는 받아본 적 없는 상장들이 즐비했다. 그 틈에 알록달록 여러 가지 색깔로 불규칙하게 여기저기 짧은 글들이 쓰인 도화지가 한 장 보였다.


"아 찾았다. 이거다 이거."


도화지에는 친구들의 아쉬움과 장난기가 뒤섞인 마지막 인사들이 빼곡히 적혀있다. 그중에 영문 모를 문장이 하나 눈에 띈다.


"봉북리 따발총! 민재 Good Bye!"


"봉북리 따발총? 이게 무슨 뜻이야?"


"아 그것은 수업 시간에 선생님이 발표할 사람? 하므는 내가 자꾸자꾸 손들고 발표를 했거든."


"그래서 반 친구들이 발표를 따발총같이 계속한다고 붙여준 별명이여."


지금 생각해도 참 총명한 학생이다. 따발총은커녕 자진해서 발표 한번 해본 적이 없었던 나는 민재가 참 대단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인자 요런 것은 그만 보고 재밌는 거 있는디 고것이나 보자."


민재는 바인더를 정리해서 제자리에 꽃아 둔 후 책장 맨 아래 서랍을 열더니 팔을 깊숙이 집어넣어 무언가를 뒤지기 시작했다.


"짜잔!! 요런 것도 있지롱."


민재는 책 3권과 비디오테이프 하나를 꺼내 방바닥에 내려놓는다. 처음엔 대체 뭔가 싶었지만 그것들의 표지를 찬찬히 보고 이내 깜짝 놀라고 말았다. 바로 성인 만화책과 청소년 관람불가 영화였던 것이다.


"헉!! 이런 건 대체 어디서 났대?"


"다 구하는 방법이 있재~"


사실 수위가 심한 내용들은 아니었지만 호기심이 왕성한 아이들에게는 늘 안된다고 금기시됐었던 금지된 방의 문을 여는 열쇠를 얻은 것 같은 충격적인 느낌이 있었다. 우리들은 모여서 그것들을 펼쳐보다가 부끄러움을 견디지 못하고 웃음 섞인 비명을 터뜨리며 서로를 마주 보지 못했다. 순수한 시절의 한때였다.


그렇게 민재의 집에 종종 놀러 가며 사이가 점점 돈독해져 가던 어느 날이었다.


"오늘 학교 끝나고 쩌어기~ 옆 동네 있는 서점 안 갈래? 거기 신간이 많든디."


우리 동네에도 서점은 많은데 굳이 옆 동네라니 게다 먼저 살고 있었던 나도 모르는 서점을 그 친구가 알고 있다는 사실이 조금은 의아했지만 어떤 서점인지 궁금해진 나는 따라나서 보기로 했다.


"그래 같이 가자."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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