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랗던 하늘이 짙은 회색으로 물들어갈 무렵 도시의 거리는 기다렸다는 듯이 저마다의 빛 밝히며 본색을 드러낸다. 그 수많은 빛들 사이사이로 사람들은 분주히 움직인다. 어떤 이는 귀가를 위해 어떤 이는 만남을 향해. 하지만 그 어느 쪽으로도 발길을 향하지 못하는 누군가도 있다.
호리호리한 체격에 군청색 정장을 위아래로 맞춰 입은 한 여성은 지금 횡단보도 앞에서 파란불이 켜지기를 기다리고 있다. 아니 사실 이미 파란불은 여러 차례 점멸하며 신호를 보내왔지만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성은 서류 가방을 든 채 멍한 눈으로 땅을 바라보며 그저 길가에 서있을 뿐이다.
가을 녘의 서늘한 바람이 목덜미까지 내려오는 양쪽 단발머리를 세차게 흔들어 놓자. 여성은 그제야 문득 고개를 들었다. 정신이 들자 외면하고 있었던 추위와 하루 종일 슬링백 힐 속에 짓눌려있던 발가락의 통증이 한 번에 몰려왔다.
"아.. 발 아파.. 추워..."
갑자기 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이 지긋지긋한 구두를 벗어던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수많은 기회를 알렸던 애먼 신호등을 원망 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아! 저쪽으로 가면 신호등이 없는 횡단보도가 있었지?"
그녀는 신호등을 기다리다 말고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더 이상 그렇게 바보처럼 서있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걸음을 재촉한 끝에 신호등이 없는 횡단보도에 도착하고 길을 건넌다. 번화가에서 불과 몇 분 거리인 이곳은 묘하게도 갑작스레 인적이 뚝 끊기는 곳이다.
도시의 소음과 빛들도 서서히 잦아들었다. 사실 그녀는 평소에 이 길로 다니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 어딘가 인위적인 적막함이 다소 무섭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은 두려움마저 망각시킬 정도로 그녀를 혼란스럽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고요한 골목에 울려 퍼지는 구두 발자국 소리와 그를 뒤따르는 메아리가 오늘 그녀의 기분처럼 서로 얽히고설킨다. 조금 더 들었다면 최면에라도 걸렸을 것 같았던 그 소리는 어느 낡은 건물 앞에 멈춰 선다.
"여기.. 이런 건물 있었던가?"
일반적인 건축 양식과는 거리가 있어 보이지만 크고 단단한 돌을 쌓아 올려 만든 이 반듯한 석조건물은 마치 시간에도 휩쓸리지 않을 것만 같은 영속성이 느껴진다.
그리고 입구에는 철제로 만들어진 녹이 슨 알파벳 세 개가 붙어있다.
"UMI"
간판이라고 하기엔 불도 들어오지 않고 유심히 보지 않으면 눈에 잘 띄지도 않는다. 창문을 통해 스며 나오는 은근한 불빛이 인기척을 느낄 수 있는 유일한 단서일 뿐이다.
"찻집일까?"
건물에서 느껴지는 묘한 분위기 느끼는 중에 여성의 찡그렸던 미간이 부드럽게 이완한다. 그리고 이끌리듯 문의 손잡이를 잡았다. 이렇게 무거운 문이 있을까 싶은 생각과 함께 낡고 고급스러운 문이 '그윽' 소리를 내며 열린다.
"어서 오세요. 어떤 용무로 오셨나요?"
힘 있으면서도 차분한 목소리가 마중을 나왔다.
"아.. 용무... 요? 여기 혹시 찻집 아닌가요?"
"찻.. 집?"
두 사람은 각자 의아한 표정으로 서로를 마주 보고 몇 초간 적막이 흐른다.
"아하하하!!"
"찻집이라뇨? 어지간히 수완이 없지 않고서야 누가 이런 으슥한 골목에 찻집을 차린답니까?"
백발에 가까운 은회색의 머리를 한 여성이 모습을 드러내며 크게 웃었다. 그 탓에 안경다리에 달려있던 금속 스트랫이 흔들리며 조명을 받아 반짝거린다. 그 모습이 귀가 드러날 만큼 짧은 머리와 맞물려 어딘지 지적인 느낌을 자아낸다. 큰 키와 매니쉬(mannish)한 분위기 때문에 멀리서 보면 늘씬한 남자로 오해받을지도 모르겠다.
점점 가까이 다가온 그녀의 얼굴이 생각보다 젊게 느껴진다. 그렇게 느낀 것은 아마도 은회색의 머리카락이 많은 나이를 짐작하도록 선입견을 갖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 두 요소가 만나 나이를 좀처럼 가늠할 수 없게 만들었다.
"아! 저.. 실례했습니다!"
민망함을 감지한 환영받지 못한 손님은 황급히 인사를 건네고 다시 밖으로 나가기 위해 뒤로 돌아섰다. 그런데 부드럽게 덜미를 잡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마침 심심하기도 하고 또.. 차 한잔 못 드릴 건 없겠지만요."
목소리에 다시 뒤를 돌아봤을 때 주인은 이미 익숙한 손놀림으로 어디에선가 벌써 찻잔 한 쌍을 꺼내고 티백을 무심하게 툭툭 던져 넣고 있었다. 그리고 전기 포트에 전원을 켜며 말을 이어나갔다.
"여기는 작품을 사고파는 곳이에요."
"작품이요?"
"네. 그림이라던가 그 외 작품이라 부를 수 있는 것들이요."
"이곳에 몇 년이나 살았지만 이런 곳이 있는 줄 몰랐어요."
"아.. 그게 여기가 도시의 등잔 밑 같은 곳이라.. 하지만 유명한 작품은 잘 거래하지 않는 이곳의 특성상 오히려 어울리는 곳일지도 모르겠군요."
"왜인지 물어봐도 될까요?"
이미 전혀 예상치 못한 곳임에 적지 않게 당황한 와중에도 호기심이 발동했다.
"유명한 작품들은 이미 충분히 그 가치를 인정받았잖아요? 그래서 저는 아직 인정받지 못한 작품들의 가치를 찾아내고 싶어요."
"작품이 태어나면 그것을 필요로 하는 누군가가 반드시 존재한다고 믿거든요. 그래서 아직 형용받지 못한 작품이 주인을 만나 가치를 가질 수 있도록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있답니다."
그 말대로 벽에는 이름 모를 화가들의 그림들이 걸려있었고 바닥 곳곳에는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한 예술품들이 벽에 기대어 있었다. 마치 묵은 책 더미에서 날 것 같은 은은한 향기가 퍼진 이 공간은 다소 갑작스러운 두 사람의 조우를 자연스럽게 착색시킨다.
머지않아 주인이 손님 앞에 찻잔을 내려놓고는 맞은편에 앉는다.
"늦었지만 인사 나눌까요? 반가워요. 저는 '우미'라고 해요."
"아!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지안'이라고 해요."
서로 간단하게 통성명을 마친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티백을 건져내고 입가로 찻잔을 가져간다. 별생각 없이 가볍게 한 모금을 들이켰던 지안의 동공이 놀아움에 의해 미세하게 확장되며 떨렸다. 향기로운 꽃을 훈연한듯한 향의 이 매혹적인 선홍색 찻물은 부드러우면서도 호방하게 지안의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두 번째 모금을 마시자 추웠던 몸이 풀어지면서 마치 기분 좋은 나무 향이 느껴지는 아늑한 오두막에 앉아있는 느낌마저 든다.
"와... 너무 향기롭고 따뜻해요.."
지안은 찻잔을 두 손으로 꼭 움켜쥐고는 미소를 띤다.
"좋죠? 그래 봬도 최상급 기문(祁門)이랍니다. 귀찮아서 바로바로 마실 수 있게 티백 미리 담아놔서 모양새가 싸구려처럼 보일 수는 있지만 절대 만만하게 구할 수 있는 차는 아니죠."
우미는 흐뭇한 표정으로 찻잔을 기울이다가 지안을 향해 넌지시 묻는다.
"그래서 차마 그대로 돌려보내기 힘들 만큼 지친 모습을 하고 있는 이유나 들어볼까요?"
"앗! 지금 제가 그래 보여요?"
"엄청 너덜너덜해 보이는데요? 아.. 지금 한말은 못 들은 걸로 하시고요."
"큭큭큭.. "
지안은 당황스러운 표정의 었다가 이내 바람 빠지는 풍선처럼 실소를 뱉는다. 표정을 쉽게 숨기지 못하는 기질은 본인도 잘 알고 있었고 이번에도 어쩔 수 없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맞아요.. 오늘은 정말이지 너덜너덜한 하루였어요. 오늘을 위해 그동안 열심히 해왔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저만의 생각이었나 봐요."
"회사에서 2년간 준비하고 밀어붙였던 저의 기획이 막바지에 치명적인 결점이 드러나서 회사는 회사대로 손해를 입고 저는 그 책임으로 일을 그만두게 되었거든요."
"그동안 잘한다 잘한다 하는 소리에 우쭐해서 오만했던 거죠."
"오늘은 사실 그간의 노력으로 맺어진 열매들을 수확하는 날이었어야 했어요. 그런데 그러기는커녕 저는 모든 것을 잃고 말았어요. 마치 다시는 일어설 수 없을 것만 같은 기분이에요."
풀어졌던 지안의 표정에 다시 울상이 드리워졌다.
우미는 그런 지안을 잠시 말없이 바라보다 몸을 일으켰다.
"마침 그쪽에게 필요해 보이는 그림이 한 점 있어요."
그러더니 안쪽 벽에 걸려있던 액자 하나를 꺼내 들고 나왔다.
"자 이 그림 어때요?, '완벽한 도약'이라는 제목의 그림이랍니다."
그림 속에는 양팔을 벌린 채 꼿꼿하고 바른 자세로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한 남자가 서 있었다. 그뿐이었다. 특이사항이라고는 배경이 어느 운동장이라는 것과 남자의 복장이 마치 육상대회라도 나갈 것 같은 운동복 차림이라는 것 정도였다.
"완벽한... 도약?"
생각을 조금 굴려보던 지안은 결국 아리송한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 우미는 설명을 이어나간다.
"이 그림을 그린 화가는 멀리뛰기 선수 출신이었어요. 굉장한 유망주로 주목을 받았던 시기도 있었지만 경기 도중 무리한 기록을 내려다 발을 헛디뎌서 돌이킬 수 없이 큰 부상을 당하고 말았죠."
"그 뒤로 절망에 휩싸여 수년을 보낸 끝에 화가가 되겠다는 결심을 했다더군요. 그리고 그가 화가로서 그린 첫 작품이 바로 이 그림이죠."
"아..."
그림이 그려진 뒷 배경을 들은 지안은 그림에 대한 의문이 한 꺼풀 벗겨진 느낌이 들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그림에 지어진 제목에는 쉽게 납득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의중을 눈치챈 우미가 말했다.
"그래서 왜 그림의 제목이 완벽한 도약이라는 이름으로 지어졌느냐 그 말이죠?"
"맞아요. 조금 생각을 해보긴 했지만 떠오르는 게 없었어요. 저랑 어떤 연관이 있는지도 잘 모르겠고요. 제가 그림을 잘 모르긴 하지만요."
지안은 멋쩍다는 듯이 머리를 긁적인다. 우미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싱긋 웃어 보인 후 질문을 던진다.
"지안 씨는 도약을 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게 뭐라고 생각하죠?"
"음.. 가능한 멀리? 높게? 도약하는 거 아닐까요?"
우미는 이번에도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이다.
"도약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착지'하는 것이랍니다."
"그럴 수가..."
답을 들은 지안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린다.
"지안 씨는 멀리 그리고 높게 뛰는 것에만 너무 집중했던 나머지 착지하는 법을 간과한 것 같은데요?"
"안전하게 착지할 수 있어야 그다음 도약이 존재한다고 생각해요. 한 번만 뛰고 말 것은 아니잖아요?"
그 말대로였다. 지안은 일에 몰두하는 동안 다른 것들에 대해서는 신경을 쓰지 못했고 그 일이 목표점에 달하면 마치 인생도 완성을 맞이하고 마무리될 것만 같은 착각에 빠져 살고 있었다. 그 결과 수면과 식사도 소홀해져서 안색은 점점 나빠졌다. 일 이후에도 삶이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만 것이다.
"화가는 부상으로 선수 생활을 마감한 후에서야 이것을 뼈저리게 느꼈다고 했어요."
"그리고 이것은 자신이 해왔던 스포츠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림으로 표현해 많은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기를 바랐죠."
우미는 한동안 진지하던 말투를 잠시 거두고 장난스럽게 액자를 흔들며 말했다.
"화가로서의 재능은 그다지 좋지 않아서 많은 이들에게 전해지고자 했던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지만요. 하하."
둘은 서로를 마주 보고 웃었다. 그리고 우미는 액자를 고쳐 잡고 지안을 향해 내민다.
"그래도 한 사람에게 전해지는 것 정도는 가능하죠."
"하지만 저는..."
지안은 그림이 좋았다. 영문 모를 낯섦으로 다가왔던 이 그림은 이제 삶의 그늘져 보이지 않았던 부분을 은은하게 비춰주는 가로등처럼 따뜻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보통 미술품의 가격은 예측불허한 면이 있고 그 가격은 선뜻 낼 수 없는 가격일지도 모른다. 혹시 이 모든 것은 세일즈의 일환은 아니었을까 하는 의심 들려던 찰나였다.
"괜찮아요.", "화가는 필요한 이에게 그림을 무료로 전해 달라는 조건으로 보관료를 지불하면서까지 이곳에 의뢰했어요. 이 그림이 지안 씨의 마음에 닿았다면 그의 소박한 두 번째 바람은 이뤄진 셈이죠."
지안은 어색하고 머뭇거리는 동작으로 팔을 뻗어 액자를 잡는다. 조금은 거칠지만 따뜻한 나무 액자의 촉감이 양손에 전해져 온다. 마치 만난 적도 없는 화가의 손을 맞잡은 것처럼.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