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개월 전 넷플릭스 시리즈인 본작 '소년의 시간(원제'Adolescence')을 보고 주변에 추천을 했던 적이 있다. 포스터의 분위기와 제목으로 봐서는 별 재미가 없을 것 같은 작품이었는데 나는 왜 그것을 클릭했을까. 그러나 그것은 결과적으로 아주 훌륭한 클릭이었다.
이 작품은 총 4부작으로 구성되어 있다. 내용을 충분히 담을 수 있으면서도 너무 길지 않은 적당한 분량이다. 최근에 이 작품을 다시 한번 보면서 느꼈던 점을 적어볼까 한다.
사전 정보가 전혀 없이 1화를 보기 시작했을 때는 평범한 성장기를 담을 드라마가 아닐까 싶었다. 그러나 나처럼 생각하는 관객들이 많을 것을 예상했는지 초입부터 확실한 노선을 보여준다. 이른 아침 경찰이 13세 소년 제이미의 집에 난입해 그를 살해 혐의로 체포하는 것으로 내용이 시작된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듯한 아빠, 엄마, 누나, 제이미 그리고 그것을 지켜보는 관객까지 시작부터 어수선하다. 머지않아 본작이 원 테이크 기법으로 촬영되었다는 것을 알아채고 자세를 고쳐 잡았다.
제철의 별미는 날이면 날마다 맛볼 수 있는 것이 아니듯 원 테이크 촬영물도 그렇다. 카메라의 흐름만으로 신선한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원 테이크 작품은 가급적 봐둘 필요가 있다. (원 테이크 촬영은 컷을 자르지 않고 카메라 한 대가 등장인물들을 영상이 끝날 때까지 따라다니는 느낌으로 연출한다.)
촬영 기법 덕분에 제이미를 연행 중인 경찰차 안의 공기가 여실히 느껴진다. 긴급한 체포라는 소동 후의 허탈함, 마주 보고 앉은 경찰과 용의자의 뻘쭘함, 영화적인 대사 대신에 자리 잡은 침묵까지.. 걸러내거나 잘라내는 것 없이 상황을 통째로 지켜보게 한다.
따라서 경찰서에 도착하고 나서는 용의자가 어떤 처우를 받고 어떤 과정을 거치는지 낱낱이 보게 된다. 정말이지 낱낱이다. 혹시 조만간 경찰서에 끌려가서 취조를 받을 일이 있는 누군가가 있다면 본작의 1편을 집중해서 봐 둘 필요가 있다.
2편은 제이미가 왜 그런 짓을 했는지 그 원인을 밝혀내기 위해 그가 다니던 학교를 두 경찰이 조사하러 가는 것에서부터 상황을 시작한다. 학교는 정말이지 개판이다. 급우가 죽었지만 상황에 통감하는 시늉이라도 하는 학생조차 없다. 서로 시시덕거리고, 비난하고, 놀림거리로 만들 생각뿐이다. 경찰의 취조에도 그 태도는 무성의하고 엉망이다.
그러던 중 베스컴 경위와 함께 조사를 나온 여경 프랭크가 고개를 저으며 학교에서는 늘 여러 가지 역겨움이 섞인 냄새가 난다는 대사를 한다. 처음 그 대사를 듣고는 '아 성장기 학생들을 모아 놓은 교실에서는 냄새가 나곤 하지'라는 생각과 함께 넘어갔다.
그런데 조사를 마치고 학교를 나서는 장면에서 배스컴 경위가 '이런 냄새 나는 곳에 더 이상 머물고 싶지 않다.'라며 다시 한번 냄새에 대한 언급을 한다.
그 순간 여기서 말하는 냄새는 단순히 후각으로 느껴지는 악취만을 말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냄새가 상징하는 것은 학생답지 않은 학생들과 존경스럽지 않은 선생님들이 교육 붕괴의 현장에서 만들어내는 부패였다. 그리고 제이미는 학교라는 썩은 밭에서 맺어진 썩은 열매인 셈이다.
프랭크는 이런 대사도 한다. '늘 가해자만 기억되고 피해자는 잊혀진다.' 말대로 늘 화두는 가해자다. 가해자는 살아있고 피해자는 이 세상에 없기 때문이다. 군중들은 가해자의 행보를 주목하느라 피해자를 쉽게 잊는다.
물론 감독은 피해 여학생인 케이티를 지고지순한 캐릭터로 표현하지는 않았다. 행실이 그다지 좋지는 않았고 제이미의 도화선에 불을 지필만한 행동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프랭크의 저 대사는 사건에 대한 본질을 다시 생각해 보게 되는 대목이었다.
3화는 사건 후 7개월이 지난 시점에서 시작된다. 약 50분의 러닝 타임 동안 이 상담 장면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게 된다. 심리상담사 애리스턴은 제이미와의 5번째 상담을 시작한다. 그간 쌓인 시간들로 둘은 꽤 친숙해 보이고 농담도 주고받는다. 제이미에게 마시멜로를 잔뜩 넣은 핫초코도 건네며 분위기도 띄운다.
그러나 살인 사건이라는 배경은 편안하고 느긋해 보이는 둘에게 이질감을 부여한다. 체포 당시 겁에 질려 눈물을 흘리던 소년 제이미는 온데간데없다. 어른인 상담사에게 능글맞은 소리를 하고 속마음을 떠보는 등의 심리전을 걸어온다. 살해 사실에 대해 후회 따위는 없다.
이 에피소드는 4부작 중에 가히 클라이맥스라 할 수 있는 부분이다. 기분이 좋았다가 화를 내기도 하고 두려워하다가도 냉소를 보내며 상담사를 조롱하는 제이미는 내면의 악마를 드러낸다. 그러면서 해석의 여지가 많은 대사들과 단서들을 쏟아낸다.
상담 장면 역시 원 테이크로 모든 내용을 고스란히 지켜보게 된다. 적막한 공간에서 펼쳐지는 두 사람의 대화는 긴장감이 팽팽하다. 애리스턴은 사실 제이미 안에 든 악마를 두려워한다. 그러면서도 이 상담을 마무리하기 위해 이 자리에 왔다. 무표정 뒤에 두려움을 숨기고 자칫 터질지도 모르는 제이미라는 폭탄을 처리하러 온 폭탄 해체 반 같았다.
개인적으로는 이 정적이면서도 격렬한 상담 장면을 보면서 신부와 악마의 싸움을 그린 영화 '엑소시스트'가 떠올랐다.
마지막 4화에서는 가해자 가족들의 모습들을 다룬다. 3화로부터 다시 13개월이 흐른 시점이다. 시작부터 분위기가 아주 좋다. 그리고 오늘은 아빠의 50번째 생일이다. 여느 평범한 가정처럼 엄마는 주방에서 즐겁게 생일 요리를 준비하고 아빠와 소소하고 다정한 대화도 나눈다. 가족들은 지극히 안녕을 표방하고 있다.
그러나 차고 앞에 주차해 뒀던 아빠의 차에 누군가가 스프레이로 NONSE(강간범)라고 크게 적어 놓은 것이 발견되면서 애써 행복을 연기하던 가족들의 앙상한 무대를 무너뜨리고 만다.
어떻게든 아무렇지 않게 살아보려던 모습 뒤에 숨겨뒀던 아빠의 분노, 엄마의 슬픔 등이 결국 쏟아져 나오며 결국 그들은 전혀 안녕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앞 내용을 모르고 4화를 봤다면 마치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의 가족들을 보여주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을 만큼의 상처 입은 모습으로 묘사된다.
울다가도 억지로 웃어 보이고 또 억지로 가족끼리 외출을 하며 가라앉는 기분을 추켜세워 본다. 그러나 살인자의 가족으로 낙인찍힌 채 주변의 따가운 시선을 받으며 살아가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결국 엄마는 다른 곳으로의 이사를 고려한다.
그런데 여기서 돋보이는 부분은 "그래도 우리는 여기 있을 거야"라고 말하는 딸 리사의 태도이다. 다른 곳으로 가봤자 결국은 소문은 나게 돼있고 더 힘들어질 수 있다. 힘들지만 지금의 상황을 받아들이고 감내하겠다고 말하는 리사는 놀랍도록 이성적이면서도 타인을 배려할 줄 알고 따뜻한 마음을 지녔다.
리사는 제이미의 누나이면서도 정반대의 성향을 띤다. 그렇게 가족은 원래대로 돌아갈 수 없는 서로를 부축하며 다시 살아가 보려 한다.
촬영 방식의 특성상 관람보다는 목격을 했다는 느낌을 준다. 컷이 없기 때문에 잘려나간 장면 없이 현장감과 몰입도가 올라가지만 자칫 지루해질 수도 있는 면이 있다. 그래서 긴장감을 놓치지 않도록 분위기를 몰아가는 연출과 배우들의 연기력이 절실한 방식이기도 하다.
결국 제이미를 연기한 '오언 쿠퍼(15)'는 데뷔작으로 그리고 최연소로 에미상을 수상했다. 그 밖에 다른 배우들도 수상했으며 본작으로 총 8관왕을 달성했다고 한다.
<소년의 시간>은 미성년자의 살인이라는 극적인 소재를 골랐다. 그러나 배경은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들로 구성했다. 평범해 보이는 마을과 가정 그리고 학교까지. 그러나 그런 배경에서도 소년은 살인범이 되었고 작품은 어쩌면 당신이 평화롭다고 믿고 있는 그 환경은 착각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질문을 던진다.
그 안의 부패를 보지 못한 채 이곳은 아름다운 곳이고 아이들은 늘 착하고 순수할 것이고 우리 애는 절대 그럴 리가 없을 거라는 착각에 대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