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브레터> 영화와 음악과 기억으로 되돌아본 30주년

by 아포드


"친애하는 후지이 이츠키 님. 잘 지내시나요? 저는 잘 지냅니다." -와타나베 히로코-


고교 시절 초코파이를 사주겠다며 매점에 가자던 친구를 따라나섰다가 기독교 서클에 들어가게 됐던 적이 있다. 가면서도 매점으로 가는 방향이 아니다 싶었는데 친구는 초코파이를 미끼로 기독교의 교리를 선교하려던 것이었다. 서클방에 있던 간식 상자에서 초코파이를 하나 꺼내주긴 했으니 아주 거짓말을 아니었다. 아마 아슬아슬하게나마 예수님께 세이프 판정을 받아낼 생각이었나 보다.


그곳에 갈 때면 같은 학년의 키가 크고 빼빼 마른 여학생을 늘 볼 수 있었다. 말라서인지 눈은 좀 퀭했지만 상앗빛 피부와 자를 대고 자른 듯한 고운 단발머리가 차분하고 단정한 인상을 줬다. 그리고 그 애는 언제부터인가 나를 '형씨'라는 호칭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모두가 그렇지는 않지만 사춘기 학생들에겐 이성친구를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 낯간지럽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렇게 그녀는 형씨의 선상에 나를 두었다. 서클방 난로 주변에 쭈그리고 앉아 서로에게 시시한 핀잔이나 던지던 사이에겐 차라리 이름보다 어울리는 호칭일 수도 있겠다.


그렇게 지나가던 어느 겨울날 그녀가 물었다. "형씨. 내가 영화 보여주겠다고 하면 같이 갈래?" 무슨 영화냐고 물었더니 <러브레터>라는 일본 영화란다. 일본 문화가 개방된 지 얼마 안 된 시점이라 일본 영화를 극장에서 본다는 자체가 상당히 낯설었다. 그리고 별로 관심이 가지도 않았다.


그러나 영화를 보여준다는데 굳이 사양할 이유도 없었다. 그렇게 오후 수업이 없는 토요일 방과 후 우리는 강변역의 테크노마트라는 낭만적이지 못한 이름을 가진 건물에서 낭만 영화를 보게 된다.


영화의 시작을 알리는 소등과 침묵이 시작되고 큰 기대 없이 스크린을 바라보고 앉았던 고교생의 눈에 갑자기 순백의 설원이 펼쳐졌다. 그저 흔한 설경을 보고 있을 뿐이었지만 세상에 이런 곳이 있을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뒤이어 무겁고 아늑한 음악이 흐른다. 그리고 그 첫 장면은 마치 내가 영화 속으로 들어올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듯이 몇 분간이나 계속되었다.


이후에 펼쳐지는 것들은 아름다웠다. 완전무결한 계절의 표현은 물론 주인공이 쭈그려 앉은 계단, 도서관에 무질서하게 쌓여있는 책들, 낡아서 삐걱대는 현관문까지도.. 정말이지 아름다움이라는 이름의 필터를 카메라 렌즈 위에 내내 덧씌우고 촬영된 영상들인 것만 같았다.


지극히 평범한 풍경들로 지극히 비현실적인 느낌을 전달해 왔다. 함께 흘러나오는 음악들은 마치 뿌연 겨울날의 습한 안개처럼 피부에 감겼다. 고교생의 감수성에 그것들은 하나하나가 환상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리고 각인되었다. 영화가 끝나고 불이 켜지던 순간은 단잠을 깨우는 겨울 아침의 자명종처럼 가혹하게 느껴졌다.


그 뒤로 나는 지금까지 이 영화를 좋아해 왔다. 재관람을 하기도 하고 연말쯤에는 수록곡들을 연주하는 공연이 있는지도 확인한다. 물론 대개는 공연이 없다. 그래도 이맘때가 되면 나의 이 겨울 음반은 책상 위에 놓인다.


나온 지 30 년이나 되어서 더 이상 자세히 소개할 것도 없는 이 영화와 음악은 언제나 나를 고교 시절의 그날로 돌려보낸다. 그리고 떠오르게 한다. 분식집에서 떡볶이와 튀김을 나눠먹고 서먹하게 돌아서던 그 뒷모습을.











keyword
작가의 이전글스킨답서스는 대체 뭘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