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에서의 과학기술을 통해 본 과학기술과 법의 만남?!
01. 과학기술과 법: 서문
과학기술과 법은 상호적이고 복잡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과학기술이 다양한 분야에서 빠르게 발전함에 따라, 과학기술의 발전이 법적 규범과 절차, 제도에 미치는 영향을 탐구하는 일이 매우 중요해졌습니다. 급속한 기술 변화 속에서 법적 대응의 필연성이 제기된 것이죠. 또한, 공공 정책 결정 과정에서도 과학과 법의 관계는 중요합니다. 과학적 발견이 정책에 어떻게 통합되는지, 그리고 법적 틀 안에서 과학이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분석함으로써 과학 연구가 법률과 정책 발전에 미치는 영향을 알 수 있습니다. 나아가, 과학기술은 단순히 법률을 넘어 사회 전체에 영향을 미칩니다. 과학 기술의 발전은 법적 기준의 변화와 사회적 가치의 변화를 촉진합니다. 이는 과학기술이 사회적 요구와 필요에 따라 법의 형성과 조정에 참여하게 됨을 의미하며, 이러한 측면에서 과학기술과 법의 관계는 더욱 깊어질 수 있습니다.
이처럼 과학기술과 법의 관계는 다양한 분야에서 영향을 미치고, 상호작용합니다. 특히, 과학과 법의 관계는 과학이 법정에서 객관적인 증거로 활용되는 방식으로 규명될 때가 많습니다. 법률 시스템 내에서 과학적 증거의 의미와 가치는 사건의 결과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법정에서 구현되는 과학증거와 과학기술 지식의 양상을 살펴보기 위해, '가습기 살균제 유해성 소송'이라는 구체적 사례를 가져왔습니다. 이를 통해 과학기술과 법의 관계와 과학기술 증거의 채택 기준, 나아가 불확실성을 가진 과학기술 시대의 시민과학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고 포괄적인 논의를 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02. 가습기 살균제 소송 사례를 통해 본 과학기술의 법적 구현
‘세계 최초의 바이오사이드 사망사건’, ‘안방의 세월호 참사’라고 불리는 가습기 살균제 사건은 현대 과학의 발전과 함께 일상화된 생활화학제품의 사용이 어떠한 피해 및 참사를 가져올 수 있는지를 극명히 보여준 사건입니다. 2020년 7월 기준 가습기 살균제로 인한 피해 신고자 수는 6817명, 사망 신고 수는 1553명으로 집계되었습니다. 또한 연구진에 따르면 가습기살균제로 인한 알려지지 않은 피해자와 사망자는 각각 95만 명, 2만여 명에 이른다고 보고되기도 했습니다.
가습기 살균제이 개발부터 '가습기 메이트'의 제조사에 대한 무죄 판결까지, 다양한 사건들과 재판들이 있었습니다. 이 중, 가습기 살균제 사건과 관련된 2건의 형사재판 판결을 검토해보려 합니다. 첫 번째는 ‘옥시 사건’이라고도 알려져 있는 PHMG 사용 가습기 살균제 판결입니다. 동양화학그룹 계열사인 옥시의 책임자들이 형사재판에서 유죄 확정 판결을 받았으며, 그 과정에서 여러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두 번째는 CMIT/MIT 사용 가습기 살균제의 무죄판결입니다. ‘옥시 가습기 살균제’와 달리 ‘애경’, ‘SK케미컬’ 등의 ‘가습기 메이트’는 결과적으로 법정에서 질병과의 인과관계가 입증되지 않아 위해성이 인정되지 않았습니다. PHMG 가습기 살균제 사건과 비교할 때 CMIT/MIT 사례는 보다 불확실하고 불완전한 과학증거들이 법정에서 어떻게 구현되고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1) PHMG 가습기 살균제 판결: 법정에서의 인과관계 입증과 다층적 차원의 시민과학
2011년 정부가 가습기살균제에 대한 역학조사 결과를 발표한 뒤, 2016년 설립된 전담수사팀은 같은 해 5월 14일에 ‘옥시 가습기 살균제’ 제조책임자 4명을 업무상 과실치사 및 과실치상죄 등의 혐의를 적용하여 구속하였고, 2018년 대법원에서 최종 유죄 판결이 선고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형법상 제조물책임이 인정되기 위해서는 3단계의 증명이 필요합니다. 1단계로 사망 및 상해라는 침해결과와 화학물질 포함 제조물의 사용 사이에 인과관계가 있는지, 자연과학적 인과관계를 따집니다. 이를 전제로, 2단계로 주의의무 위반행위와 침해결과 사이에 인과관계 및 객관적 귀속(상당인과관계)을 판단합니다. 마지막 3단계로 그 제조물이 실제로 개개인에게 피해를 야기했다는 인과관계를 다른 원인에 대한 합리적 의심 없이 엄격히 증명하고(구체적, 개별적 인과관계), 이것이 증명될 때 과실범이 성립하게 됩니다.
즉, 해당 판결은 이와 같은 3단계의 증명이 이루어졌다고 판단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질병관리본부 및 안전성평가연구소 등에서 실시한 PHMG 및 PGH에 대한 흡입독성시험 결과, 제품 노출군에서 심각한 건강 상의 피해가 관찰되었다는 점을 받아들임으로써 자연과학적 인과관계가 성립한다고 보았습니다. 다음으로, 옥시 가습기 살균제에 대해 ‘부유물이 있다’는 소비자들의 민원이 제기되자 옥시는 주성분을 프리벤톨 R80에서 PHMG로 교체한 바 있는데, 프리벤톨 R80과 달리 PHMG에 대해서는 흡입독성시험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법원은 이처럼 가습기 살균제의 주원료를 변경하는 과정에서, 흡입 독성에 관한 자료를 검토하였다면 피해가 발생하지 않았을 것으로 판단하였고, 이에 따라 주의의무 위반과 침해결과 사이 상당인과관계가 성립한다고 보았습니다.
마지막 단계인 구체적 인과관계 증명에서는 피해자들의 역할과 참여가 주요했습니다. 당시 피고 측은 피해자들의 폐손상이 유전 등 선천적 요인이나 음주 및 흡연 등 후천적 요인 등의 복합적 작용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를 반박하는 개별적 인과관계의 입증 과정에서 2012년 한국환경보건학회의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의 노출 실태와 건강영향 조사’ 보고서 등의 실태조사 보고서가 크게 기여했습니다. 이는 전국 각지의 피해자들을 찾아 의료기록을 검토하고 설문 및 측정조사를 실시하여 작성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피해자들의 증상은 가습기 살균제에 대한 노출의 결과로써 재정의되었고, 의료기록을 기반으로 한 객관적 근거로서 제시될 수 있었습니다.
주목할 점은, 이러한 조사가 학자들의 자발적인 연구였으며, 학회 성금과 자원봉사를 통해 수행되었다는 점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후에도 환경보건시민센터와 민간 과학자들은 피해 사례를 접수하고 질병 기전에 대한 연구를 지속해 나갔고, 일반 대중의 자발적이고 주도적인 참여를 기반으로 많은 설문과 자료 수집이 이루어졌습니다. 나아가, 재판에서 피해자들의 증상 건수나 정도가 개별적 인과성을 입증해 주는 것이 아니며, 어떤 식으로든 증상들을 ‘구성’ 해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시민단체 활동가들은 피해자들의 증상 구성방식을 중간에서 조정해 주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노력과 활동들은 확장된 의미의 ‘시민과학’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시민과학은 최근 ‘시민이 수행하는 과학작업’으로서 통용되며, 이러한 시민의 범위에는 과학자도 포함됩니다. 다수의 과학의 민주화 사례에서 나타나듯이 전문가들이 자신의 전문성을 ‘시민지향적’으로 사용하는 경우 이는 그들의 시민성에 기반하는 것으로 보고, 시민과학의 사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시민과학 수행 주체 범위뿐 아니라 ‘과학작업’의 내용 역시 확장되는 추세입니다. 전통적으로 과학자들이 수행해 오던 연구주제 및 방법론의 수행에 한정되지 않고, 재정기부, 경험을 기반으로 한 참여 등도 시민과학의 영역에 포함되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이러한 확장된 시민과학은 가습기 살균제 소송에서 주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정부나 기업의 용역이 아니라, 시민의 의뢰로 시작된 연구에서 개별 피해사례의 인과성을 입증하는 근거가 생산되었고, 자발적 모금을 통한 재정 확보를 기반으로 시민지향적 연구활동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시민과학의 구현으로서 의미가 있습니다. 또한, 이때의 연구들에서 자원봉사 등의 형태로 자료수집 및 의료 기록 정리 등에 대중이 주도적으로 관여했다는 것은 데이터를 수집하는 연구플랫폼으로서의 시민과학이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나아가, 피해자들의 증상을 구성하고 조정하는 과정에서는 재판 과정 및 경과와 피해자들의 증상 및 의료기록에 대한 이해를 기반으로 보다 능동적인 주체로서 개입하는 시민 과학자의 양상을 확인할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이러한 활동의 결과물들이 구체적 인과관계의 입증에 기여하였다는 점에서 가습기 살균제 사건은 시민과학의 실현이라는 차원에서 의미를 가질 것입니다.
(2) CMIT/MIT 가습기 살균제 판결: 과학적 증거 수용의 기준
한편, PHMG와 달리 CMIT/MIT 사용 가습기 살균제의 경우 폐질환과의 인과성이 기각되어 1심에서 업무상 과실치사 등의 혐의에 무죄판결이 내려졌습니다. 이는 사법부의 과학적 증거의 수용에 대한 기준과 연관되어 있을 것입니다. 이전의 '프라이 기준'에 비해 상대적으로 유연한 기준의 필요성이 제기됨에 따라 등장한 '도버트 기준'은 특정 과학적 증거가 과학적 방법을 따랐는지를 따져 관련성과 신뢰성을 평가하는 방식입니다. 이를 판단하기 위해 도버트 기준이 제시하는 4가지 가이드라인은 각각 ‘반증가능성’, ‘동료 평가 및 출판 여부’, ‘측정 기법의 오류율’, ‘전문가 집단 내 일반적인 인정 여부’입니다. 이 4가지 가이드라인을 두루 고려하여 과학적 증거의 허용가능성을 판단하게 됩니다.
한국 법원 역시 도버트 기준의 가이드라인들을 채택하고 있습니다. CMIT/MIT 가습기 살균제 판결의 경우, 재판부가 검찰 측의 증거들이 이러한 도버트 기준을 만족하지 못한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로, 판결은 가습기 살균제와 피해자들의 질환 사이 인과관계가 입증되기 위해서는 “(1) CMIT/MIT가 폐질환 혹은 천식을 일으키거나 악화시킬 수 있는 물질이어야 하고, (2) 가습기 사용 환경과 동일하게 흡입을 통해 CMIT/MIT가 사람의 폐에 도달하는 것이 확인되어야 하며, (3) 폐에 도달하여 폐질환 혹은 천식을 일으키거나 악화시킬 정도의 양이 축적되어야”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 기관에서 수행한 동물 흡입독성시험 중 CMIT/MIT가 “이 사건 폐질환 혹은 천식을 유발하거나 악화시키는 것이 확인된 시험 혹은 CMIT/MIT 성분이 말단 세기관지 부근의 폐까지 도달한 사실을 입증한 시험은 없었다”라고 보았습니다. 이렇게 1단계로서의 자연과학적 인과관계를 부정함에 따라 나머지 쟁점에 대해서는 살펴볼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고, 피고인들에게 무죄를 선고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많은 반발과 이견을 샀습니다. 재판부가 과학적 증거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인과성의 입증 정도를 잘못 판단했다는 것이죠. 이러한 지적은 재판부가 채택한 도버트 기준과 연관 지어 판단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재판부의 세 가지 조건 중 첫 번째, CMIT/MIT 함유 가습기 살균제 제품의 위험성에 대해서는 지난 2020년 제출된 연구보고서 등에서 CMIT/MIT가 한 마우스종에서 천식과 유사한 증상과 폐섬유화 증상을 일으키는 것이 확인되었고, CMIT/MIT 흡입 노출 시 폐 질환을 악화시킬 가능성을 확인하였으나 증거로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형사재판에서의 경우 ‘엄격한 인과관계’를 증명해야 하기 때문에 재판부에서는 일부 실험에서는 유해성이 확인되고 일부에서는 확인되지 않는 동물실험 결과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도버트 기준의 4가지 가이드라인 중 하나인 오류율을 일정 수준으로 정해 놓고 이를 넘지 못하는 증거는 무조건 배제하는 태도와 연결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도버트 기준 확립 이후 유해물질 소송에서 증거 배제 등으로 인한 약식 판결의 비중은 2배나 늘었다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구성주의적 관점에서 오류와 오차는 과학의 보편적인 특성임에도 불구하고, 객관적 증거에 대한 완고한 기준을 배워 이에 합치하지 않는 증거를 인정하지 않은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재판부는 지난 10년간 이루어진 역학조사 및 피해자 임상연구 역시 무의미하다고 보았습니다. 일례로, 김재용 연세대 의대 연구교수팀의 ‘피해신고자 노출 DB 분석 결과’ 등의 증거는 CMIT/MIT 가습기 살균제 사용 후 천식 환자 발병 위험이 사용 전 대비 8.74배 높아졌다고 밝혔으나, 유의미한 증거로 인정되지 않았습니다. 재판부는 ‘호흡기 계통 질환에서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인과적 관련성이 의심된다’고 작성된 대목을 언급하며 “인과적 관련성이 있다고 볼 여지가 있는 정도의 연구결과에 불과하다”라고 보았습니다.
이는 도버트 기준이 판사에게 요구하는 역할과 연결됩니다. 도버트 기준 하에서 판사는 ‘아마추어 과학자’로서 증거를 해석하고 종합적인 판단을 내려야 합니다. CMIT/MIT 판결의 경우 이러한 과정에서 법적 언어와 과학의 언어 사이로 인한 번역의 왜곡이 발생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새로운 반례가 나올 가능성을 고려해 확정적인 표현을 사용하지 않을 뿐, 연구자로서 명백하게 인과적 관련성이 있다는 주장을 판사가 해석하는 과정에서 왜곡이 일어난 것입니다. 또한, CMIT/MIT 가습기 살균제 1심 재판부는 각각의 증거를 개별적으로 인과관계를 평가한 후, 가이드라인 기준에 미치치 못한다고 생각되는 증거는 채택하지 않는 식으로 증거들을 ‘각개격파’ 해 나갔습니다. 그러나, 도버트 기준의 도입 취지를 고려할 때 ‘종합적 판단’은 개별 증거와 관련된 근거들의 판단뿐 아니라 증거들 사이 유기성도 고려하는 것을 말할 것입니다. 가습기 살균제 사건은 임상, 역학, 독성 등 다양한 과학 분야의 증거들이 연관되어 있고, 각각이 상호 보완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재판부는 여러 가지 실험 결과를 보고 가중치를 둬서 결과를 추론하거나 인과관계를 판단해야 했다는 지적이 가능할 것입니다.
이와 같은 개별 증거들에 대한 일률적이고 고정된 가이드라인 적용과, 각 증거에 대한 분절적 판정은 주요한 과학적 증거를 배제시킬 위험성이 있습니다. 나아가, 이러한 법원의 태도로 인해 다양한 방법으로 얻어진 과학적 사실이 법정에 수용되기 점점 더 어려워져 도버트 기준의 도입 취지와 배치되는 결과가 발생하게 되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검토가 필요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CMIT/MIT 가습기 살균제 판결은 도버트 기준을 적용하는 재판부의 역할뿐 아니라 이러한 기준을 충족하는 증거를 제시해야 하는 검찰의 역할에도 경종을 울립니다. 재판부가 제시한 3가지 조건 중 두 번째 조건, CMIT/MIT의 유의미한 발생과 호흡기 노출 정도를 입증하기 위해 검찰이 제시한 증거에는 질병관리본부 및 환경부가 실시한 '가습기 살균제 원료물질 노출 재현 실험' 결과가 있었습니다. 재판부는 실험에서 나타난 CMIT/MIT 농도가 미국 EPA에서 제시한 NOEL(no observable effect level) 보다 낮기 때문에 안전하다고 판단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호흡기 노출 위험을 누적 노출 용량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점을 파악하지 못한 것이며, NOEL은 인간, 특히 소아에게 적용할 경우 적절한 안전계수를 곱해 평가해야 함을 고려하지 않은 것입니다. 마지막 조건인 CMIT/MIT의 호흡기 하기도 도달가능성의 경우에도 재판부는 CMIT/MIT가 수용성 물질이며 반감기가 매우 짧고 채내분해성이 높아 기관지나 폐 등 하기도에 도달하기 어려운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하였는데, 실제로 이를 반박하는 연구 결과 및 실험 보고들이 다수 존재함에도 재판에서 충분히 제시되지 못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는 과학적 증거를 제시하는 검찰의 역할에 부족함이 있었다는 방증이기도 합니다. 형사재판 과정에서 재판부는 중립적인 판단자로서 역할을 해야 하므로 검찰과 변호인 측의 입증, 방어 등의 절차에 개입할 수 없고, 과학 전문가가 아닌 판사 개개인에게 이러한 허점들을 재량껏 채우는 것을 기대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따라서, 검찰 및 변호인단은 ‘엄격한 인과관계’를 입증하는 과정에서 해당 과학적 증거들이 도버트 기준의 가이드라인을 기준으로 의심이나 배격의 여지가 없도록 이를 법정의 언어로 번역해 판사에게 전달할 의무가 있습니다. 이는 형사재판에서 도버트 기준 채택으로 인해 발생하는 판사의 의무 및 부담을 완화하는 방법으로서, 과학적 증거의 적절한 수용을 위해 필수적일 것입니다.
과학기술 관련 소송은 일반소송보다도 정보의 비대칭성으로 인해 최소한의 대등한 법적 다툼이 보장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유로운 논쟁을 통해 실체적 진실에 보다 가깝게 다가가기 위해서는 과학기술 증거의 평가에 있어서의 제도적 보완이 필요할 것입니다. PHMG 가습기 살균제 사건을 통해 가능성을 확인한 시민과학, 그중 전문가들이 주체적으로 참여하는 과학 민주화를 통한 인적 네트워크의 구축은 제도적 보완의 한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실제로, 재판부 등은 전문심리위원 제도를 시험 도입해 본 바가 있습니다. 재판부가 구성한, 과학자들로 구성된 전문심리위원단이 과학자들의 증언과 검사가 제출한 과학 증거를 종합적으로 평가해 법원에 제출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법원 주도 시스템에서 나아가, 학계의 주도적인 참여 및 전문가들의 민주적 의사 교환을 기반으로 한 상시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이는 일반인에게 공개되고, 전문가 누구나 협조 가능한 플랫폼 내에서 관련 전문가들이 검찰 및 변호인단이 제시하는 개별 증거들에 대한 자유로운 토의와 의견교환을 진행하는 과정을 말합니다. 이러한 시스템을 통해 증거의 중요성, 신뢰성, 타당성에 대한 정보가 형성될 것이고, 이를 과학적 증거 및 증언 평가에 활용한다면 다수의 전문가를 통해 확인된만큼 보다 정확한 검증이 가능할 것입니다. 특히 형사소송에서 검찰과 변호인 양 측 모두에게 공개된 정보원으로서 전문가 참여 플랫폼을 이용한다면 재판의 공정성에도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03. 마치며
가습기 살균제 사건이라는 구체적 사례를 통해 과학기술이 법정에서 어떻게 구현되는지, 그리고 이러한 과정에서 어떤 제도적 보완이 유효할지에 대해 짧게나마 이야기해 보았습니다. 사실, '과학기술과 법'이라는 분야가 너무 넓고 관련된 내용이 방대해서 어떤 부분에 초점을 맞춰야 할지 고민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논점들을 복합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단일 사례를 가져와봤는데 괜찮은 시도였을까요?
지금까지 다양한 주제로 글을 연재하면서 줄곧 비슷한 고민을 해왔습니다. 어떤 주제를 선정해야 할지, 관련된 내용 중에서는 어떤 것들을 이야기해야 할지, 또 어느 정도로 자세하게 다뤄야 할지.. 많은 고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과학기술스러운' 내용과 '인문사회스러운' 내용 사이에 어느 정도의 비율을 가져가는 것이 좋을지도 생각했습니다. 연재를 시작할 때부터 과학기술이 그 자체로 동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며, 여러 사회적 요소들 및 행위자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기술적인 이야기와 사회적인 이야기를 적절한 비율로 섞어보려고 했는데 성공적이었을지 모르겠습니다. 독자 분들의 판단에 맡겨야겠죠.
처음 시작할 때 말씀드렸던 것처럼 제 글을 통해 과학기술에 흥미와 재미를 느끼고, 조금이라도 무언가를 얻어가는 분이 계시다면 저 스스로는 충분히 만족합니다. 지금까지 제 독자가 되어주셔서 감사하고, 앞으로도 이 목표 아래에서 다양하게 활동하려고 하니까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