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랄발광 아리랑

창을 열며(삶이 보이는 창 140호 발행인 글)

by 이호동

최근에 느닷없는 12.3비상계엄에 대해 ‘지랄 발광’이라는 표현을 천주교 대전교구 김용태 신부님이 쓰셔서 시쳇말로 대히트를 쳤습니다. 이분은 이 나라 최초의 천주교 신부이자 순교자이신 김대건 신부님의 후손이라고 하네요. 지랄발광은 ‘개지랄’의 경북 방언이라는 친절한 소개까지 하셨네요.


제 고향은 영일만입니다. 해맞이 동네지요. 경북의 동남쪽 바다를 곁에 둔 산골이에요. 영일만의 100호가 넘는 나름 지역에서는 학문을 숭상하고 오랜 전통이 있는 집성촌입니다. 경주 양동마을을 중심으로 저희 집안에는 몇 개의 집성촌이 있는 데 그중의 하나입니다. 경북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공동 등재된 안동의 하회마을과 경주 양동마을이 있습니다. 학문적으로도 성리학 주리파의 선구자 회재 이언적 선생과 집대성한 퇴계 이황 선생의 학문적 관계를 고려해서 ‘회퇴학파’로 불리며, 각각 도산서원과 옥산서원을 포함해 학문적 맥을 이어온 대표적인 문화유산입니다. 저는 외람되지만 회재 이언적 선생의 후손으로 몇 집성촌 중의 한 군데서 태어나 엄한 가풍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굳이 이렇게 소개하는 것은 이 글의 제목에 상당히 맹랑한 표현을 썼기 때문입니다. ‘지랄발광’을 포함한 제목을 선택한 것에 대해 독자들께 사전 양해를 구하는 차원입니다. 고향 어르신들이 자주 쓰시던 표현이라 제 주변 분들도 한 번씩 들었을 법한 말입니다. 잘못하면 늘 그리운 제 고향을 욕되게 할 수도 있고 학문과 예의를 숭상하는 집안 망신을 초래할 수도 있어서 방어기제가 작동했음을 고백합니다.


한겨울의 광풍처럼 몰아쳐 온 국민의 마음을 얼어붙게 만든 비상계엄과 후폭풍! 구구절절한 표현과 미사여구 없이 제 고향식으로 표현하면 ‘지랄발광’ 사태가 맞습니다. 표준어로는 ‘개지랄’ 사태가 맞습니다. 사전적 의미로 ‘지랄발광’은 지랄(‘간질’의 속된 표현, 뇌전증은 간질로도 불리며 뇌 신경세포가 일시적으로 이상을 일으켜 과도한 흥분 상태를 유발함으로써 나타나는 의식 소실, 발작, 행동 변화 등과 같은 뇌 기능의 일시적 마비 증상이 만성적,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뇌 질환)에 발광(發狂, 미친 듯이 날뜀)을 더한 것입니다. 다른 무엇으로 21세기에 민주화되었다는 한국에서 벌어진 이 야만적인 사태를 적확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싶습니다. 이 사태가 조기 종식되고 평화로운 일상을 회복하고 싶은 마음은 온 국민의 염원이 아닐까 싶습니다.


하여튼 이 문제의 지랄발광은 고향 동네의 아이들 중 질풍노도의 시기 통제되지 않은 언행을 가족이나 이웃에게 터트릴 때 입이 거한 어르신들이 어이없어서 혼내실 때 쓰는 표현입니다. “지랄발광을 해대네”. 그럴 때는 반드시 주변에서 점잖은 어르신들이 그런 심한 말을 쓰지 말라는 지청구를 주며 어지간한 경우에는 자제하도록 했지요. 대체로 고향에서는 광인을 ‘미친개이’라는 ‘미치광이’의 방언으로 불렀습니다. 그 시대의 표현으로 지랄발광은 ‘미친개이의 미친 듯이 날뛰는 난동’으로도 불리었던 것이지요. 요즈음은 이렇게 부르지도 않고 불러서도 안 되지요. 하여튼 언행이 이해 불가, 통제 불가 상태로 공동체의 안녕을 해칠 지경에 이르면 통상적으로 고향 어르신들이 깊은 한숨과 함께 “지랄발광을 해대네”라고 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삶의 질곡을 담은 민요 ‘정선아리랑‘ 가사에도 “지랄에 발광이 났구나”라는 소절이 있습니다. 상상 초월의 언행에 대해 아리랑으로도 불리었던 기억이 나서 이 광란의 사태가 고요해지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글 제목을 ’지랄발광 아리랑‘으로 붙여 보았습니다. 다시 한번 옛날의 기억을 소환해서 다소 거친 제목을 쓰게 된 점 혜량을 바라겠습니다.


그 옛날 “지랄에 발광이 났구나”로 당면 현실의 슬픔을 노래하며 극복하고 승화시키려는 노력을 했듯이, 이 광란의 폭풍 같은 웃픈 현실이 신속하게 마무리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제 고향을 대변하는 현대 가요 ‘영일만 친구’의 한 소절인 “갈매기 나래 위에 시를 적어 띄우는~” 평화가 현실이 슬픈 국민 모두에게 하루빨리 찾아오기를 고대합니다.

창을 열기 어려울 정도의 폭풍이 몰아치는 미친 바람의 시절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다시 평온한 일상 회복으로 ‘삶이 보이는 창’을 활짝 열어도 좋은 새해 되시기를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2025년 1월 1일

발행인 이호동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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