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봉서원은 조선시대는 조광조와 송시열의 영향으로 안동의 도산서원(陶山書院) 만큼이나 학맥(學脈)의 종심(從心) 이었다. 도봉산의 도봉서원은 1573년(선조 6년) 조광조의 영향으로 사액(賜額)을 받는 서원이 된다. 조선 후기 남발된 사액 증원에 비해 빠른 시기이며 유림의 영수 조광조가 배향되었기에 한양 근방 상당히 입지가 높은 서원이었다.
사실 도봉산은 조광조가 휴가 때 일대를 관람하며 업무로 생긴 스트레스를 풀던 곳이다. 이런 행적으로 유림들이 그를 이곳에 배향(配享) 시킨 것이다. 이후 조광조의 후학을 자처한 우암 송시열도 이곳에 여러 차례 방문과 더불어 입향까지 했었다 한다. 이곳에서 인근 유생들에게 강학까지 펼쳤을 정도로 도봉서원과 연을 쌓았다. 그래서 조광조와 더불어 그도 배향(配享) 된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홰철되었으며, 이후 다시 복원하였지만 6.25 전쟁으로 소멸되었다. 1970년대 지자체에서 자체적으로 복원하였지만, 현재는 예전의 모습으로 복원하기 위해 건물을 헐었다. 다행히 조선후기에 도봉서원을 주제로 그려진 그림들이 많아 그림에 남겨진 양식을 토대로 복원을 추진하고 있다고 한다.
학문의 성지였기에 조선 후기 한양 외곽 중 도봉산(道峰山)과 도봉서원(道峰書院)이 그림의 주제로 많이 애용되었다. 현재 남아있는 도봉산과 서원 그림을 보면 각자의 다른 화법과 개성으로 그려져있다. 그러나 서원 방향의 배치와 도봉산의 자운봉은 공통된 양식으로 보인다.
도봉산 도봉사원 터
2. 정선이 남긴 도봉산과 서원의 경관.
겸재 정선(鄭敾, 1676∼1759)은 금강산과 인왕산 서촌 일대 못지않게 도봉산 주변도 많이 그렸다. 당시 양주 땅으로 분류된 도봉산 일대는 한양 근교 양반 또는 나들이객들이 많은 찾은 관광명소였다. 겸재 정선 역시 도봉산 일대를 유람(遊覽)하며 도봉산과 도봉서원을 그림으로 남겼다.
1, 2번 그림 모두 도봉산과 도봉서원의 유람(遊覽)을 기억하고자 혹은 상기하기 위해 지도식으로 자세히 그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 1번의 <도봉추색도>는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점인 심원(深遠)의 구도로 그렸다. 그의 대표적인 <금강전도>와 비슷한 구도의 지도식이다. 도봉서원을 화면의 중심으로 도봉산의 자운봉과 오봉을 자세히 그려내었다. 자운봉과 오봉은 파묵(破墨)으로 <인왕제색도>의 인왕산처럼 바위산의 무게감을 나타내었다. 그 외 능선은 수목(樹木)과 미점(米點)을 적절히 배치함으로 토산의 울창함이 느껴진다. 도봉서원의 배치를 보면 건물 하나하나 자세히 나타나 있어 실제 서원의 형태가 어떤지 쉽게 인식할 수 있다. 더불어 서원 초입에 계곡까지 흐르고 있어 배산임수가 시각적으로 보인다.
2번의 <도봉서원도>는 고원(高遠)의 형식으로 그렸다. 앞서 본 <도봉추색도>는 세세히 주변 경관을 그렸지만 <도봉서원도>는 간결하고 도봉서원도 수목에 가려져 있다. <도봉추색도>는 도봉서원과 도봉산의 생생함 등 산수의 기술적 측량을 선묘였다면, <도봉서원도>는 명산에 자리 잡은 고요한 서원과 같이 산수의 아취(雅趣)를 담았다. 한 사람이 한 장소를 그렸지만, 각기 다른 맛이 느껴진다. 그만큼 정선은 필의(筆意)가 출중한 화가인 것을 알 수 있는 그림들이었다.
3. 스승과 제자의 도봉서원.
겸재 정선을 필두로 동시대 혹은 후대 화가들도 조선의 산천과 더불어 도봉산과 도봉서원을 그렸다. 겸재와 동시대 인물로는 심사정(沈師正, 1707~1769)이 있으며, 후대로 대표되는 작가는 김홍도의 친구이자 왕실 화가인 유춘 이인문(李寅文, 1745~1824)이 있다. 심사정은 10대 어린 시절 정선의 문하에서 짧은 시간 그림을 배운 적이 있다. 집안과 당파의 문제로 심사정은 문하에서 떠날 수밖에 없었으며 홀로서기로 화법(畫法)을 쌓았다고 한다.
그 후 심사정은 여러 화보(畫譜)와 여러 문인(文人)과 견습(見習) 및 교류 등 다양한 그림을 그렸으며 산수에도 일가를 이루었다. 이인문은 심사정의 제자로 스승처럼 당대 산수로 일가를 이룬 화가이자 김홍도처럼 시대를 대표하는 국수(國手)였다. 초기에는 심사정과 유사한 화풍으로 그림을 그렸지만 중년기 이후로는 남북종화(南北宗畵) 화풍을 절충한 양식으로 산수를 그렸다.
3. 현재 심사정, <도봉서원도>, 17세기, 비단에 채색 / 4. 유춘 이인문, <도봉원장도>, 18세기 종이에 채색.
심사정이 그린 <도봉서원도>는 도봉서원을 중점으로 심원구도로 나타내었다. 정선과 달리 채색으로 그려내어 도봉산 일대의 푸른 산세가 느껴진다. 담채로 그렸기에 맑고 담촐해보인다. 하단은 언덕을 미점으로 나타내었고 서원(書院) 윗부분의 선으로 바위와 악산을 그리고 나무를 올렸다. 그래서 그림은 작지만 토산과 악산이 어울려진 깊은 도봉산과 도봉서원이 경치가 느껴지는 것 같다.
반면 이인문은 평원(平遠)으로 도봉산과 서원을 그렸다. 오른편 서원을 중심으로 자운봉과 오봉 그리고 북한산의 삼악을 그리는 등 평원구도에 심산유곡(深山幽谷)의 삼원이다. 산수의 유장함이 돋보이는 그림이다. 능선에 필선의 힘을 주어 산세의 웅장함도 느껴진다. 그리고 서원 부근에 마을이 자리 잡고 있어 시골의 정겨운과 더불어 자연과 인간의 조화 등 다채로움이 느껴진다. 스승과 제자 사이에 비슷하면서 각기 다른 관점으로 도봉서원을 그려내어 비교하는 재미가 있다.
4. 19세기의 도봉서원.
문화가 꽃피운 18세기에 비해 19세기는 한풀 꺾인 듯한 느낌이 든다. 쇠퇴기에 접어들었음에도 선대 문인의 영향을 받은 화가들은 있다. 그중 김석신(金碩臣, 1758~미상)과 이방운(李昉運, 1761~1815)도 앞 세대들처럼 도봉산과 도봉서원을 그리는 등 도봉서원을 그리는 명맥을 이어왔다. 김석신은 화원 화가로 정선과 김홍도의 화풍을 이어받았고, 화원 집안이자 화원 화가 출신 김응환과 친척 관계로서 화풍을 계승하였다. 이방운은 몰락한 양반가 출신으로 직업화가와 비슷한 삶을 살았다고 한다. 조선 후기 문신으로 서화에 조예가 깊었던 남공철과 문신 성대중과 교류하는 등 당대 문화인사이자 걸출한 화가이다.
김석신이 그린이 그린 <도봉도>를 보면 정선과 이인문의 화풍을 본받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다른 그림과 달리 계곡과 주변 경관을 중점으로 화면에 담았다. 이렇듯 계절감은 여름으로 단정 지울 수 있을 정도로 시원함이 느껴진다. 더불어 수목이 다소 거칠어 보이지만 계곡 덕분에 울창한 숲으로 인식된다. 보는 그것만으로도 청량해지는 그림이다.
이방운이 그린 <도봉서원도>는 도봉산이라는 경관보다는 서원이 중심이다. 다른 그림과 달리 도봉서원을 주제로 잡았다. 앞 시대의 그림과 비교하면 화력이 다소 부족해 보일 수 있지만, 학문을 숭고한 서원이라는 경건함이 돋보인다. 도봉산의 봉우리도 수직의 세필로 그려내어 실제로 가파른 산세가 느껴진다. 다채롭고 청량한 도봉산과 계곡이라는 이미지보다는 서원이라는 숭고함을 우선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아마 서원에 특별한 의미가 있고 그린 것이 아닐까 싶다.
5. 다양한 시대의 도봉산과 도봉서원.
겸재 정선을 시작으로 17~19세기 도봉산과 도봉서원을 그림으로 살펴보았다. 정선은 본인의 수묵을 활용하여 사실적으로 도봉산과 도봉서원을 나타내었다. 심사정과 이인문은 다채롭고 유려하게 경관을 화면에 담았다. 김석신과 이방운은 문화의 쇠퇴기라 할 수 있는 19세기 활동하였지만, 앞 세대의 화풍을 토대로 계절감과 경건함을 묘사하였다. 이렇듯 시대마다 도봉산과 도봉서원은 많은 사람의 애정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