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한아의 소설은 단순한 기억 상실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 작품은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불안과, 삶과 기억의 경계에서 마주하는 진실을 끝까지 따라가며 독자를 깊은 자기성찰의 세계로 이끈다. 한 배우의 삶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정한아는 삶의 진정한 의미와 인간이 견뎌야 할 시간의 무게를 세밀하게 그려낸다.
이야기의 중심에는 **60세 생일날 아침, 자신의 몸무게가 이유 없이 늘어난 것을 목격한 배우 '이마치'**가 있다. 엄격하게 자신을 통제해온 배우로서의 정체성이 처음부터 흔들리기 시작하는 이 장면은, 앞으로 그녀가 마주할 혼란과 무너짐의 예고편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이상한 징후들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집 안에 울리는 괴이한 소리, 나타났다 사라지는 유령, 사라진 기억들. 이마치의 세계는 조금씩, 그러나 분명히, 무너져간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아파트라는 물리적 공간 안에서 펼쳐지는 이마치의 삶의 파노라마다. 한 층마다 다른 시절의 이마치가 살고 있다는 설정은 '인생을 걷는 여정' 그 자체를 시각화한 장치로, 각 층에서 그녀가 만나는 자신의 모습들은 독자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 **“한 층 한 층이 삶의 한 장면”**이라는 인상을 주며, 독자 역시 자신의 삶을 되짚어보게 한다.
이 과정에서 이마치는 아들의 실종, 배우로서의 성공과 몰락, 모친과의 불화, 사랑과 상실 등 인생의 모든 굴곡을 마주한다. 때로는 과거의 자신을 다정하게 위로하고, 때로는 복수하듯 쏟아내는 고통의 언어로서. 그러나 결국 그녀가 도달하는 깨달음은 단순하다. "사람은 그렇게 쉽게 자멸하지 않는다. 그 많은 절망 속에서도 살아간다." 이마치가 계단을 올라가며 터득한 삶의 교훈처럼, "목표를 보지 말고 그저 발끝만 보며" 살아내는 것. 그 하루하루의 발걸음이 모여 결국 인생이 된다.
또한, 작품 곳곳에 배치된 철학적 문장들은 깊은 인상을 남긴다.
"그냥 놔버려요. 당신이 가진 모든 기억. 당신이 인생이라고 붙들고 있는 것들."
이 한 문장은 이 소설이 전하려는 메시지를 집약한다. 기억과 과거에 얽매이지 말고, 현재의 감각과 고통, 즐거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
삶을 되짚는 방식도 흥미롭다. 과거의 기억이 때로는 왜곡되고, 때로는 누군가의 손에 의해 꾸며진다는 설정은 우리 모두가 믿고 있는 **"기억이라는 삶의 기록"**이 얼마나 불완전한지를 일깨운다. 진실로 믿었던 과거조차, 실제와는 다를 수 있다는 두려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기억조차 '나'를 만드는 요소임을 인정하게 되는 과정이 이마치의 여정이며, 독자의 여정이 된다.
마지막 장을 덮으며 남는 것은 고통과 상처, 환상과 망상의 시간을 지나온 한 인간이 "나"로서 존엄하게 서 있는 모습이다. **"과거의 내가 나를 이해하지 못했어도, 현재의 내가 과거의 나를 끌어안을 수 있다"**는 이 소설의 조용한 메시지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 깊이 와 닿는다.
정한아는 작가의 말에서 킬리만자로를 등반하며 얻은 통찰을 전한다. "정상에 오르기 위해서는 발끝만 보고 가야 한다"는 깨달음. 이는 이마치의 여정을 관통하는 가장 본질적인 문장이기도 하다. 아무리 먼 길도, 고통스러운 인생의 길도, 매 순간의 작은 발걸음으로 걷는 것. 결국 그 모든 순간의 합이 우리를 완성하는 것임을, 이 소설은 조용히 그러나 강렬하게 일깨운다.
이 책은 우리 모두에게 묻는다.
"당신이 붙들고 있는 것은 정말 당신의 삶인가?"
그리고 또 말한다.
"그렇지 않아도 괜찮다. 지금 여기, 당신이 서 있는 순간이 곧 삶이다."
인생을, 기억을, 존재를 진심으로 돌아보고 싶은 이들에게는 깊은 울림을 남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