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차인 화재 책임 묻기엔 “관리 영역 벗어나”… 법원, 구상금 청구 ‘기각’
중앙집진식 청소기에서 발생한 화재로 아파트 세대와 공용부에 피해가 발생했지만, 해당 세대 임차인에게 손해배상책임을 묻기 어렵다는 법원 판단이 나왔다. 임차인의 보존·관리의무는 임대인의 지배 영역을 넘어설 수 없다는 점에서, 이번 판결은 건물 설비의 유지책임에 관한 실무 기준을 제시했다.
서울중앙지방법원 민사단독은 2024년 8월 21일 선고한 2023가단5196944 판결에서, 보험금 구상금 청구 소송을 제기한 **A 주식회사(보험사)**의 청구를 기각했다. 이 사건은 서울 영등포구 소재 아파트 E호에서 발생한 화재에 대해 보험금을 지급한 원고 보험사가 임차인 B 및 그의 보험사인 C 주식회사를 상대로 7,700여만 원의 구상금을 청구하면서 시작되었다.
■ 사건의 경위
2020년 6월 17일 오전, 아파트 E호 실외기실에 설치된 중앙집진식 진공청소기에서 화재가 발생했고, 이로 인해 해당 세대와 인접 세대의 실내 및 공용부에 손해가 발생했다. A 보험사는 이 화재로 인한 피해에 대해 총 1억 원이 넘는 보험금을 지급했다. 이후 원고는 임차인 B가 보존·관리의무를 위반했다며 손해배상 책임을 청구했고, 해당 청소기의 사용을 계약한 보험사 C에게도 공동책임을 물었다.
■ 법원의 판단
재판부는 먼저 채무불이행 책임에 대해 판단하면서, “화재는 임대인의 지배·관리 영역에 있는 전원배선의 하자로부터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고 보았다. 이어 “임차인은 임대인의 지배하에 있는 설비에 대해 선량한 관리자의 의무를 다해야 할 책임은 없으며, 피고 B는 해당 청소기를 사용한 사실조차 없는 점 등을 고려하면 관리의무 위반으로 보기 어렵다”고 밝혔다.
이어 공작물책임이나 일반 불법행위 책임 주장에 대해서도, “해당 청소기는 약 13년 전부터 설치된 것으로, 임차인이 설치하거나 보수할 권한이 없었고, 화재 원인이 된 전원배선 또한 피고 B의 지배범위를 벗어나는 영역”이라며 원고 측 주장에 인정할 만한 증거 부족을 지적했다.
■ 판결의 의미
이번 판결은 건물 내부의 내장 설비에서 발생한 사고에 대해 임차인에게 무리하게 책임을 지울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면서, 실무상 임대차계약과 건물 설비 유지관리의 책임 주체를 명확히 구분해야 함을 시사한다. 특히 오랜 기간 사용되지 않았던 고정설비의 관리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판단함에 있어, 물리적 지배 범위와 계약상 의무를 기준으로 삼은 점이 주목된다.
보험사의 구상금 소송이 각종 화재사고 이후 빈번히 제기되는 가운데, 이번 판결은 보험사 측의 책임소재 판단과 위험분석 기준에도 일정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