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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ct 31. 2023
말표 고무신
꽃이 그려진 검정 고무신을 들여다 본다. 검정 고무신이 화려한 사치를 부렸다. 엄마가 그토록 신고 싶어하셨던 것은 꽃신이다. 그러나 하얀색 고무신을 살 돈도 항상 모자랐다. 엄마는 하얀색 고무신 한 켤레 값으로 검정 고무신을 사고 나머지는 아버지 막걸리를 받아다 드렸다. 고무신이 빨리 닳았으면 했다. 막걸리는 금세 동이 나는데 질기고 힘든 삶만큼 시커먼 고무신은 질기고도 질겼다. 고래힘줄이라 했다. 고래힘줄이든 낛싯줄이든 철없던 시절 나는 검정 고무신이 부끄러웠다.
댓돌 위에 나란하다. 알고 보면 검정 고무신도 정갈한데 그 색깔이 싫었다. 가난한 삶을 보여주기 싫었다. 다른 사람이 아는 게 부끄러웠다. 검정 고무신은 좀 더 가난함의 표현이었다. 검정 신발도 엄마는 오징어 껍데기 벗기듯 수세미로 하얗게 박박 문지르고 닦았다. 하얀 고무신보다 더 정갈했다. 엄마는 그랬다. 검정 고무신에 때가 끼면 더럽고 주접스러워 못 본다고. 당신의 성격 만큼이나 깔끔하고 빛나는 검정 고무신이었다. 엄마는 가난함이 부끄럽지 않았고 부러 숨기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그래도 싫었다. 하얀 고무신을 신고 싶었다. 검정 고무신을 내던질 수 있는 기회가 왔다. 신발 멀리 던지기를 하는 것이다. 수채 고랑으로 빠지면 건지기 힘드니까 새로 살 수 있을 거라 여겼다. 정말로 그랬다.
오빠가 미꾸라지를 잡으러 갈 때 나는 고무통을 들고 따라나섰다. 아버지는 고무통 양 옆으로 구멍을 내 얇은 철사를 끼워 손잡이를 해 주었다. 나는 검정 고무신을 신고 오빠는 목이 긴 검정 장화를 신었다.
아버지는 검정 고무신을 끌지 마라 하셨다. 질질 끄는 소리도 싫었거니와 못 배우고 무식한 사람들이 신발 끌고 다닌다 하셨다. 질질 끌고 다니면 밑창이 빨리 닳아서였다는 것을 어른이 되고나서야 알았지만 분명 신발 질질 끄는 소리는 사실 듣기 좋은 소리는 아니다. 우리집 녀석들도 신발 끌고 다니는 걸 보면 그때 아버지 생각이 나서 한 마디 하곤 한다. 난 왜 그소리가 거슬릴까. 절약 정신 보다도 무식한 사람들 하는 행동인 것 같아 보여 그럴지도 모른다. 아버지를 닮아가는 것 같다. 아버지 당신은 검정 고무신을 평생 끌지 않으셨다.
가을 볕이 따뜻하다. 나들이랍시고 통도사를 찾았다. 약간 선선한 바람이 불어주지만 그래도 볕은 따사롭다. 불교 축제를 하고 있다. 엄청난 사람들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절터를 꾹꾹 밟으며 지나간다.
묵묵히 인사건네며 지나는 사람들 가슴에 웃음이 번지고 행복이 번진다. 이른 아침부터 분주한 모습으로 꽃단장하고 젤 예쁜 옷으로 치장하고 격식을 갖추었다. 같이 외출해주는 동반자와 함께 있으면 바라보는 시선은 더 곱다. 우리 엄마와 아버지는 어땠을까. 고무신 한 켤레 선물로 받고 손잡고 나들이 가 보셨을까.
꽃을 입힌 검정 고무신이 그리 이쁜 건 아니지만 젤 호사를 누릴 수 있는 청춘 시절일 것 같다. 누가 가져가 주면 더없이 고마울테지만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눈은 즐겁다. 누가 사 갈까 마음은 조려보지도 않는다. 사지 않으면 어떠랴. 그저 호기심으로 사는 것 자체가 요즘 사람들에겐 사치이지 싶다. 장식용으론 더할나위 없이 좋다.
질기고 질긴 그 많던 검정 고무신은 어디로 갔을까. 칼로 잘라 불속에 던져 버렸을까. 보따리 속에 고이 간직해 두셨을까.
언제부터 고무신을 신지 않았을까. 팍팍한 살림살이에 자식들에겐 아식~운동화나 까~로 운동화를 사 신겼을텐데 도무지 그 검정 고무신이 다 어디로 갔는지 기억엔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