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는 고향을 떠난 지 지금의 내 나이보다 많다. 아버진 당신 고향을 버렸다 하셨고 엄마는 당신 고향을 늘 그리워했다. 당신의 삶의 터전을 버렸을 때부터 고향이란 단어는 없었다. 서울살이를 시작했다. 아무 가진 것 없이 정착한 서울살이가 분명 쉽진 않았을 터. 고향을 버린 만큼 그만큼 잘 살아서 두고봐라, 새키들 너거 없어도 잘 산다 보여주고 싶었으리라. 무턱대고 덤빈 젊은 혈기인 줄 알았다. 꺾지 못한 고집인 줄 알았다.
아직도 부모의 삶은 고향에 머문다. 아버지 돌아가실 때 무덤 두지 마라 하셨다. 너희들 찾아오지 않는다, 당신이 부모를 찾지 않으니 그리하라셨다. 오빠는 아버지의 완고한 뜻을 받들어 화장을 하고 고향 바다에 뿌렸다. 마지막은 고향을 가슴에 두셨다. 산천이 아버지 무덤이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보고 싶을 땐 어디로 가야 하나 마음 아플 새도 없었다. 내 몸 챙기기 바쁜 스물 여덟의 나는 엄마가 되어가는 해였다.
산소 오르는 길에 알밤인 줄 알았다. 너무 실해서. 도토리가 꽤 크다. 몇 개만 주워 담아 와 사진만 찍을 마음이었다. 하나 둘 줍다보니 실로 몇 분만에 핸드백 가듬 담겼다. 좀 많으면 해마다 도토리 묵을 해 드시는 지인 어머님 드려야겠다 싶었다. 좋아하시는 모습이 마음에 꽉 찼다. 한편으론 위로랍시고 자꾸 몸이 숙여진다.
이렇게 많은 도토리를 주워오면 다람쥐는 올 겨울 무얼 먹고 살까. 아직 겨울 준비하긴 이른 계절인데, 한창 먹어야 할 텐데. 내가 과한 욕심을 부려 이토록 심란하다. 이리 많은 줄 몰랐다. 부모의 무덤 길이 밤 천지 도토리 천지다. 풍성한 마음 무덤 앞에 두고 왔다.
여기 어드메쯤 부모가 살던 집터다. 지금도 갈색 지붕이 그대로 보인다. 아버지 떠난 후 몇 해 전까진 어느 누가 살았으리라. 지금은 주인 없는 것처럼 파아란 하늘을 떠받치고 있다.
눈길이 간다. 자꾸만. 아버진 왜 저곳을 버렸을까. 감히 알지 못하지만 버렸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어른이 된 지금에야 알 수 있을까. 모르긴해도 지금도 알 수 없다. 다만 자식들 공부시킨다고 유학보내려 이 촌 땅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그 마음만 짐작한다. 그래서 택한 곳이 서울이었으리라.
서울살이는 만만했을까. 무일푼으로 몸뚱아리만 갖고 시작한 타향살이의 설움을 말해 무엇할까. 돌아돌아 이곳으로 내려와 정착할 때는 고향을 버리고 간 지 일곱 해 뒤였다. 가진 것 없으니 아는 사람의 정보가 전부였을 터. 그것마저 믿을 수 있었을까 내키진 않았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으리라.
귤 달린 나뭇가지를 쳐내느라 늙은이의 손길이 분주하다. 마실 다녀오시는 듯 인도인지 차도인지 모를 골목길을 힘겹게 걷고 계신다. 창문을 열어 어디 갔다오시느냐 불러도 모른다. 네가 누구냐, 나는 니 잘 모른다. 니 오빠는 안다. 맞아요, 나는 그 오빠의 동생이에요. 오는 귀도 먹고 가는 귀도 먹었지만 살아내는 데는 지장 없다.
꼬질꼬질한 손끝에 용돈 쥐어드리며 또 기약없는 내일을 약속한다. 자식들은 왔다 갔나요 뻔한 물음을 던진다. 내가 올라갔다 왔다 한 마디 뱉으시는 웃음이 멋쩍다. 그래요, 먼 곳에서 아버지 보고 싶어 오는 것보다 당신이 올라가셨겠지요, 아마요. 빈말인 듯 무엇하리요. 먼 데 자식보다 가까운 이웃이 어쩌면 나을 수도 있는 걸요.
칠천도 앞바다는 엄마의 고향이자 생활의 터전이다. 귤나무를 정돈하시는 늙은 외삼촌은 우리가 가면 늘 고기를 잡아 맛있는 회를 떠 주시고 매운탕을 끓어주셨다. 그때가 좋았다. 지금은 다리가 생기고 근사한 카페가 생기고 외지인들이 앞다퉈 들어와 생활의 터전을 바꾸어 놓았다. 이젠 고기를 잡진 않는다. 무얼 먹고 살까. 그 시절 떠올리며 무얼 추억하고 계실까 저 늙은이의 가슴은.
막걸리 한 잔에 고향 떠난 설움이 잊혀졌을까. 한 잔을 마시면 잊었던 고향이 더 떠올라 한 잔 더 들이켰으리라. 아버지는 그때 그랬다. 병이 아니라 깡그리 잊기 위해서 주전자로 드셨다. 이제 조금은 알 것 같다. 아버지 당신은 고향을 버린 게 아니라 잠시 떠나셨던 것이고 돌아갈 수 없었던 게 아니라 돌아가지 않았던 것임을. 이제사 당신을 누입니다. 당신이 그토록 그리워했던 터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