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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린왕자 Oct 31. 2023

비와 막걸리

언제부터였을까요.  막걸리가 좋아지던 때가.  

막걸리가 마시고 싶었어요. 운동 간  큰 녀석에게 부추 한 단 사오랬더니 돈을 안 가져 갔다네요.  알았다 해 놓고선 머리를 굴려봅니다.  어찌하면 막걸리 한 잔 먹을까 하구요.  평소 잘 먹는 스타일이었다면 그러구러  평소 사다 놓고 대충 먹겠다 했을텐데 그런 것도 아니거든요.  웬 막걸리 타령이냐고 숫제 한 마디 건넵니다. 큰녀석이 참 이상타, 하면서 말이죠.  엄마는 이상한 게 아니라 그냥 막걸리가 먹고 싶었을 뿐인데 말이죠.  


그러구는 조금 있다 문자가 옵니다.  어머이 오늘 무슨 안 좋은 일 있어요, 하면서.  아니라고,  아니 그냥 막걸리란 녀석이 나의 발목을 잡는다고, 아무 일 없다고. 솔직한 대답입니다.  왜 그러느냐 다시 묻는 녀석은  무척 신경이 쓰였나 봅니다.  나도 왜 그런지 모르겠는 일입니다.  가끔 있는 일도 아니고 진짜 처음 있는 일입니다.  그냥 막걸리가 땡깁니다. 한창 수업을 하고 있어 배가 고픈 이유도 있었겠지요.


비가 억수같이 쏟아집니다.  앞이 보이질 않네요.  20여 분을 달려 오늘 마지막 수업을 가야 하는데 막막합니다. 어떻게 이 비를 헤치고 갈까 걱정도 되지만 얼른 집에 가서 늦기 전에 막걸리를 먹고 싶은 맘이 컸나 보네요.  일단 문자를 넣습니다.  좀  늦겠다구요.  내심 오늘 안 오셔도 된다는 답을 기다렸나 봅니다.  마침 답이 없네요.  마음을 들켜버린 걸까요.  전화를 겁니다.  어머니도 빗속에 계시는지 전화 소리가 들리지 않으신지 받질 않습니다. 조금 있다 비를 뚫고 기다리고 있다고,  선생님 오시길 아이는 진즉부터  기다리고 있다고 빠른 답이 돌아옵니다.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는, 빗소리가 더 세차고 거세지는 밤입니다.   


한편으론 고맙죠.  어차피 비 맞으며 나온 이상 오늘 할 일을 끝내야 내일이 편하다는 걸 아니까요.  시험기간인데 빠지면 또 늦어지고 그러다보면 보강은 정말 쉽지 않은 일이거든요. 보강은 해도 해도  또 생깁니다.  아이들 시간을 다 맞춰줘야 하다보니 특별한 일이 아니고는 휴강을 하지 않아요.  그래서 맘을 다잡고 달립니다, 빗속을.  천천히 달리면서도 매섭게 퍼붇는 비는 실로 무섭습니다.   폭우에 갇혀 막걸리 생각이 싹 달아납니다.  그리고 비가 내리는 이 시간엔 집으로 가나 수업을 가나 어차피 움직이는 건 똑같습니다. 어쩜 수업 가는 길이 조금 빠를까요. 마음이 더 편한 까닭이겠죠.  


떡볶이 한 그릇을 먹었다며 배 두드리고 있는 중딩에게 부럽다 한 마디가 진심으로 튀어나옵니다.  헤헤 웃고 앉은 녀석이 귀엽습니다.  드시라며 시원한 후르츠 한 잔을 건넵니다.  어찌 반갑지 않을까요.  엔 네온사인이 환하게 비춰 주고 비는 내리는지 보이진 않네요.  철창 닫듯이 걸어 잠근 빗장에 빗소리도 들리지 않아요.  이거 마시면 막걸리 못 마시는데 고민하다가 냉큼 한 모금 빨아 넘깁니다.  목구멍을 시원히 적셔주는 이 맛,  막걸리보다 더 시원한 맛이 납니다.  


10시를 넘겨 아이의 집을 나섭니다. 다행히  비는 멎었구요.  촉촉한 밤길에 투벅투벅 걷는 발걸음이 가볍습니다.  밤하늘에 별은 보이지 않지만 내 마음엔 별이 가득합니다. 막걸리 한 병을 사서 허리춤에 차고 하늘을 보니 별 대신 문득 아버지가 떠오릅니다. 늦은 밤 혼자서 쓴 하루를 달래시며  막걸리를 비우시던 아버지. 가난한 살림에 소주보다 덜 비싼 막걸리로 지난한 고뇌를 푸셨던, 좋아서 마신 게 아니었던 걸 저는 늦게 알아차린 거지요.   돌아가실  동안 막걸리 몇 병을 드셨을까요.  하늘에 막걸리 공장이 있을까요.  엄마의 성화에 술도가가 문을 닫진 않았을까요. 별보다 막걸리  한 사발에 목이 멥니다.  


현관문 들어서는데 장성한 아들 녀석이 피곤에 지친 몸을 받아줍니다.  가끔 그럴 땐 그 녀석이 애인 같아요.  따뜻한 말 한 마디는 잘 하지 않지만 따뜻한 포옹은 가끔 표현해 주는 녀석이죠.  고맙더군요.  하루를 덧칠핫 피곤을 내던지며 김치전 한 조각으로 이 밤을 대신합니다.  큰 녀석과  제법 잘 차려진 식탁에 앉아 아주 오랜만에 술상을 벌입니다.  김치전을 뒤집으면서 인생이 이리 쉽게 뒤집어진다면 다시 아버지를 만나 소주 한 잔 사 드리며 꽃구경 시켜드리고 싶습니다. 막걸리는 덤으로요.  


   취한 모습을  남들에게 보이는 건 부끄러움이었어요. 온 동네 사람들이 당신의 취한 모습을 기억해도  나는 당신의 막걸리 냄새가 구수합니다.  아버지는 이승에서 몇 번 꽃구경 하셨을까요?  술 드신 기억보다 꽃구경 함께 한 기억이 손가락에 꼽힙니다.  


내 손가락이 아픕니다.


  꽃구경 시켜드린 기억이 없어서.

  굽힐 손가락이 없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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