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알기 전에는 시 없이도 잘 지냈습니다

ㅡ류시화의 시를 읽고

by 어린왕자


120미터 높이의 양산타워 북카페에서 시와 노닐다.

당신을 알기 전에는
시 없이도
잘 지냈습니다
시 없이도
하루를 살았고
시와 함께라도
하루를 살았습니다

안 생길 것 같죠?
생겨요
좋은 일

맞아요
안 생길 것 같은
좋은 일도
문득 오늘처럼 생길 수 있고
바라던 일도
오늘처럼 안 생길 수도 있죠
그래도 좋아요
희망은 늘 내게 희망 자체로 좋으니까요
당신을 알기 전에도
시가 없어도
하루를 넉넉히 살았습니다
그러나
당신을 알고
시와 함께 하니
더 넉넉한 하루가 되었네요

ㅡ어린왕자


ㅡ류시화 시인은 시를 통해 언어가 가진 힘을 실감하는 경험을 하게 한다. 그의 시에는 그리운 길 몇 번이고 돌아가게 만드는 마력이 있다. 그간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나의 상처는 돌 너의 상처는 꽃][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꽃샘바람에 흔들린다면 너는 꽃]을 펴냈고 인화지에 빛을 정착시키듯 단어들에 생의 감각을 담아낸다.

첫 문장은 시인이 쓰지만 그 뒤의 문장은 읽는 이들의 마음으로 써 내려가듯이, 시는 쓰는 이와 읽는 이 사이에서 오래 이야기한다. '당신을 만난 뒤 시를 알았네.라고 말할 수 있는 대상이 있는가? ㅡ책날개


류시화 시는 기도문에 가깝다. 담백해서 깊이 있고 진솔해서 간절한 낮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고개 들어 하늘을 우러르거나 무릎 꿇고 땅을 내려다보는 몸짓이 그려진다. 지평선을 향해 걷는 도보 고행승의 모습이 떠오를 때는 얼마나 많은가. 모든 기도가 시가 될 수 없지만 모든 좋은 시는 기도가 된다.


시 아니면 당신에 대해 얘기할 곳이 없어
내 안에서 당신은 은유가 되고
한 번도 밑줄 긋지 않았던 문장이 되고
불면의 행바꿈이 됩니다
당신을 알기 전에는
시 없이도 잘 지냈습니다
당신을 알기 전에는
당신 없이도 잘 지냈습니다
ㅡ당신을 알기 전에는 시 없이도 잘 지냈습니다. 류시화ㅡ

시에 관한 유일한 관점은 있을 수 없다. 좋은 시의 조건 중 하나가 모든 독자에게 열려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독자에 따라, 독자마다 다르게 음미하는 시, 또는 같은 독자라 해도 장소에 따라 매번 새롭게 읽히는 시가 좋은 시라고 말한다.


ㅡㅡ오늘의 바다

내가 사는 돌집에 오면
동쪽에 난 창으로
쇠오리 떼 엉덩이 차며 날아오르는
바다를 볼 수 있을 거요
내일의 바다가 아니라
오늘의 바다를
어제의 당신이나
내일의 당신이 아니라
오늘의 당신이
ㅡ류시화


ㅡㅡ 어제 만난 바다는
하늘빛 머금은 푸른 창공이었다
바람이 불었고
거센 물결에 휘청거리는 파도가 있었다면
오늘 만난 바다는
조용히 마주하는 인생이었다
낙엽 하나 띄워도 흔들림 없는
관조하는 바다였다 ㅡㅡ어린 왕자


류시화 시인이 자신의 산문집 <내가 생각한 인생이 아니야>에서 '인생의 가장 큰 선물은 다른 인생이다.'라고 이야기한다. '다른 인생'이 많은 인생이 좋은 인생이라고 말하며 시도 마찬가지로 시를 사랑하는 독자에게 가장 큰 선물은 '다른 시'라 말한다. 그리하여 이 시집 <당신을 알기 전에는 시 없이도 잘 지냈습니다>에서 선물과 같은 시, 내가 애장 하던 다른 시를 만날 수 있다고 말한다.

나는 그것을 살아 있음이라고 말하고 싶다.


ㅡㅡ살아 있다는 것

뭍에 잡혀 올라온 물고기가
온몸을 던져
바닥을 치듯이
그렇게 절망을 온몸으로
바닥을 친 적 있는지
그물에 걸린 새가
부리가 부러지도록
그물눈을 찢듯이
그렇게 슬픔이 온 존재의
눈금을 찢은 적이 있는지
살아 있다는 것은
그렇게 온 생애를 거는 일이다
실패해도 온몸을 내던져
실패하는 일이다
그렇게 되돌릴 겨를도 없이
두렵게 절실한 일이다
ㅡㅡ류시화


혹시 모르죠
오늘 지나간 줄도 모르고
좋은 일이 지나갔을 수도 있고
아직 좋은 일이 다가오지 않았을 수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훌쩍 뛰어넘었을 수도 있고요
내가 눈치를 채지 못하여
슬쩍 넘어갔다면
그것 또한 나의 일이고요
안 생길 것 같죠
생겨요
좋은 일
오늘도 좋은 일 생길 거예요

ㅡㅡ어린 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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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알기전에는시없이도잘지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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