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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린왕자 Nov 09. 2023

 산을 오른다는 것은

삶을 돌아보는 시간



 산은 나에게 무한의 긍정도 주고 유한의 추억도 던져 준다.  인생을  백세로 본다면 그  반을 살면서 떼려야 뗄 수 없었던  지난한 삶과 무관하지 않다.  산은 언제든 오를 준비가 돼 있어야 했고 갈쿠리로 훑어 나뭇가지를 긁어모아야 했다.  한겨울 추위를 이겨내는  일용할 땔감을 구해야 했이다. 그때의 산은 오르는 개념이  아니라  집마당처럼 저으며 뛰어다녔다. 이맘때 가을에 느껴보는 단풍과 아름다운 낙엽은 그 시절 어린 나에게는 노동이었다. 삶을 살아내야 하는 불쏘시개였고 돈이었고 하루  안에 끝내야 하는 숙제였다.  


학교가 파하면 젤 먼저 갈쿠리를 집어 들었고 끝이 어디인지  보이지 않는 보따리를 챙겼다.  엄마는 떨어진 천을 잇대고 잇대어 얼마나 큰 보따리를 만드셨을까.  엄마의 바느질 솜씨는 대단했다. 같이 갈 친구가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나 혼자 산길을 들어섰다.  그 당시엔 산길이 그리 무섭지 않았다.  늘 다니던 길이었고 오빠를 따라 칡덩굴을 캐러 가던 제법 익숙했던 길이었다.


 넓지막한 보따리를 펼치고 깔비를 긁어모았다.  먼지가 풀풀 날려도 사뭇 가지에 생채기가 나도 대수롭지 않게 지나쳤다. 무적의 소녀가 되었다.  머리에 똬리도 필요 없다.  푹신한 깔비가 똬리를 대신했고 두 팔을 벌려 보따리를 잡고 만세 하는 모습으로 이고 내려왔다.  키 작은 내 몸뚱이가 눌릴 대로 눌려 보따리만큼이나 펑퍼짐했다.  살아내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훗날 친구는 기억한다. 내가 어릴 때 산에 가서 비를 해 이고 내려올 때 내 몸보다 많이 이고 져서 키가 자라지 않은 거라.  고등학교를 들어가기 전까지는 친구들 중에서  키가 젤 작았으니까. 몇십 년이 지난 후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들은 깜짝 놀란다.  이렇게나 컸냐고. 그때  갈비 때문에 키가 켜지 않았다고 다정스러운 우스갯소리도 건넨다.  깔비를 해놓지 않으면 일 갔다 오신 엄마가 밥을 할 수 없었고 따뜻한 아랫목을 점지할 군불을 땔 수 없었다.  우리에겐 공부보다 노는 것보다  산이 우선이었다. 솔방울을 주워오거나 나무장작을 주워다 놓는  게 하루 중 젤 큰 일과였다.


 지난했던 삶이 힘들었으나 먹고살 길을 제대로 파악할 만큼의 생활력을 배운 것 같다. 지금 이렇게나마 보통의 삶을 살고 있는 것도 크나큰 다행이다.  고맙게 다가온다.



억새가 무리 지어 하늘거린다.  굽이굽이 보이는 저 고갯길을 따라 아래로 아래로 내려다보면 마음보다 눈이 앞선다.  얼른 집에 가서 보따리 풀어놓고 놀러 나가고 싶었던 어릴 적 키 작은 꼬마의 마음이 보인다.  마을이 저기 어디쯤인데.  아직 친구들은 놀고 있을 텐데.  옹기종기 집들이 붙어 있다.  우리 집을 찾긴 어렵다.  가을이 앞서 온 동네를 물들였다.



산허리는 단풍으로 물들어 감탄을 짓게 만들건만 산을 오를 때는 언제나 힘들다. 눈을 돌릴 힘도 나지 않는다. 이런 고생을 하면서도 무엇하러 올라왔을까.  아래 단풍도 예쁘기만 한데. 분명 단풍 때문만은 아닐진대 딱히 이유를 찾기 어렵다. 인생이 그렇다.


산을 오른다는 것은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간직하고 있던 그리움을 발산하기 위함일까.  등에  무거운 삶의 짐을 내려놓기 위함일까.  대청봉을 오를 때나 동네 뒷산을 오를 때나  힘든 건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산이 좋다.  그저 좋다. 산 정상에 올라 고함  한 번 내지르면 온 산이 내게 답을 한다. 오르다 보면 의욕이 생기고 그 의욕 속에 삶의 희망이 생기는 거라고. 억새가 일렁이듯 밟고 있는 다리도 출렁거린다.  일렁이다 출렁이다 제자리로 돌아오듯 우리 삶도 그러하다고 귀를 간질인다. 가을의 속살거림이 마냥 아름답다.  


오늘도 신발 끈 동여매듯 삶의 끈을 단단히 동여맨다.  


가을 산을 걸으니 산 속의 내가 보이고 산 속의 삶이 보이고 산 속의 산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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