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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린왕자 Dec 05. 2023

우리는 늘 엄마의 손님이었다


아무도 모르게, 모두가 잠든 새벽녘에 엄마는 현관문을 열고 가셨. 잠든 에게  인기척을 내야 하는 것도 예의를 몰라서가 아니다.  간다고  서성대면 서운한 거 있냐는 물음에 이야기가 길어지는 탓을 알고 계시리라.  엄마는 늘 문 밖에 계셨다.  



엄마는 우리 집을 불편해하셨다. 눈짓으로도 눈치를 준 게 아니었는데 엄마는  어쩌면 당신 스스로 남의 자식 배려랍시고 조심스러워하시며 눈치를 보았으리라.  딸이 혼자 있는 도 아니고 딸이 아닌 다른 이는 가족이라는 울타리에 들어 있어도 그 울타리를 넘기가 쉽지 않았을까. 온 날을 주무시고 간 적 손꼽아보니 늘 딸의 집은 당신의 편한  안식처가 아니었나 보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기르면서 경단녀가 되었다. 마음 한구석엔 일이 하고 싶었고 일을 해야만 했다. 아이를 기르는 것도 일을 하는 것도 내겐 버거웠다.  그런 딸을 위해 엄마는 자주 우리 집을 드나들었다.  


첫아이를 낳고 엄마는 우리 집에서 거의 한 달을 함께 했다. 몸조리를 해 주신다고 자처하신 것이다.  그해 여름, 지구가 탄생한 이후 젤 덥다고 했던 무더위에 딸은 자기보다 더 큰  4 킬로그램의 거구를 낳고 정신을 잃었다. 출산 과정을 지켜보았던 어떤 이는 대를 이었다며  쾌재를 불렀고 어떤 이는 하나밖에 없는 딸 죽이는 일이라며 눈물을 쏟고 안타까워했다.


그렇게 한 아이의 엄마를 대하는 태도는 같은 공간에서도 극명하게 달랐다.  




 아버지는 내가 엄마가 되기 전 추운 겨울에 돌아가셨다. 아버지를 하늘나라로 보내드리던 날 나는 차마 목놓아 울 수 없었다.  내 뱃속의 아이가 서러워 울면서 태어날 것 같아서, 내  아이에게 눈물을 흘리게 할 것 같아서였다.  옆에 앉았던 동네 아주머니들이 '울지 마라' 하셨다.


그때는 상을 당하면 장례식장이 아닌 집에서 치르는 게 일상이었다.  우리 집은 비좁아서 바로 옆 마을회관을  빌려   손님을 맞았다. 아버지 가시는 길 함께 하는 손님이 얼마나 많았던지 내가 놀랐던 기억이 다. 술만 드시면 고래고래 고함치시던 분도 마지막 가는 길에 친구를 두셨구나 안심이었다. 아버지의 유골을 산에 뿌리고 난 뒤 목놓아 울었다. 무덤 만들지 말라는 아버지의 유언이셨다.


아버지는 내게 아이를 선물로 주고 가셨다.  엄마는 울지 않으셨다. 지금의 내 나이보다 젊은 나이였던 엄마는 한동안 멍하니 정신  잃은 사람처럼 앉았다가 또 한 번은 미지근한 국을 데워 게걸스레 드시기도 했다. 마음이 허했을까. 살 만큼 살았다고, 지금보다 더 일찍 갔어도 하나도 원망스럽지 않다며 안도하시던 분이셨다.


엄마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일절 않으셨다.  내 꿈에 그리 보이더라고 말하면 아버지가 너를 좋아했다 툭 던지시는 게 전부다. 아버지가 계시지 않은 삶이 적적해서 우리 집을 더 싫다 하셨다.  갑갑하다, 창살에 갇힌 것 같다. 아이를 봐주러 오셨다가 내가 들어서면 곧장 일어나셨다.  저녁 드시고 가시라는 투박스러운 남자의 손도 뿌리치며 엉덩이 먼저 치켜세웠다. 몇 해를 반복하다 그러셔요, 어머니 들어가셔요. 이쪽에서 먼저 인사를 자청했다.


허물어져가는 집이라도 당신 집이 편하다 하셨다.  먹고 싶으면 먹고 자고 싶으면 자고 하는, 누구 하나 간섭하지 않는 하꼬방 집이라도 좋으셨다. 아버지는 그 집을 엄마에게 선물하고 가셨다. 니네 아버지 어제 대문 고치시던데 했던 친구의 말이 빈말은 아니었나 보다.  나는 그것을 부모 간의 사랑이라 꾹꾹 눌러 앉혔다.  




일흔이 조금 넘었을 때 엄마는 쓰러지셨다. 정신력이 강했던 덕분인지 왼쪽이 마비된 상태로 걷지도 못하고 사실 수도 있다는 의사의 말에 반박하듯  또랑또랑한 얼굴로 하루에 두 번 자식들을 맞았다.  중환자실에 계신 엄마는 오른 다리 왼 다리를 보란 듯이 번갈아 쭉쭉 뻗어 올렸다.  의사요, 보소. 나 움직이요.


이름 있는 부산의 병원으로 옮겨 재활을 하시면서, 재활 후 집으로 가신다는 걸 요양병원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당신이 많이 우셨다. 당신 집에 가고 싶다고. 내 집이 있는데, 여긴 내 집이 아니라고.  나도 일을 하느라 엄마를 모실 수 없었다.  그렇게 엄마의 집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그래도 다행인 건 당신 스스로 화장실 가고 먹고 자고 싸는 일을 다 하셨다.  당신의 몸을 씻기는 게 자존심 상한다 하셨지만 눌러앉은 곳에서 평생을 살아야 다는 자존심을 이겨버렸다. 씻고 나면 밖을 나가셨다.  갑갑하다 하셨다.  새벽을 걷고 아침을 먹은 후 걷고 점심을 먹고 걷고 저녁을 먹고 걷다가 간호사가 찾으러 다니기 일쑤였다.  


그것마저 묶어놓으면 안 되겠다 싶었다.

늦게까지 안 들어오시면 전화 주셔요, 하고는 우리도 병원에서도 느슨하게 엄마를 놓아주었다.


무엇이 당신을 그리 갑갑하게 만들었을까.


엄마는 병원옷을 입은 채로 그 먼 이십 리 길을 걸어 걸어 당신 집으로 향하셨다.  새벽에 몰래 아파트를 벗어나평생을 걷고 걸었던 당신의 집을 찾아,  비록 문 밖에 서서 대문을 열어줄 자식을 만나지 못하더라도 그곳을 홀린 듯 찾으셨다. 오빠가 그런 엄마를 도중에 만나지 않았더라면 평생 몰랐을 일이다.


다시 돌아 돌아

당신이 있어야 할, 당신이 거부하던 그 병원을 찾아 눈물을 뒤로 하고 안착하셨다.

십 년의 세월을  병원에 계시다 아버지를 만나러 가시 날.


아버진 그 커다란 하늘의 문을 냅다 열어 주시던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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