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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제니 Sep 25. 2021

어떻게 캐나다에 가게 되었을까?

스물아홉의 워홀, 시작은 현실도피였다.



그냥 어디든 떠나고 싶어!


 싫증을 낸다. 일을 해도 오랫동안 꾸준히 하지 못하고 일이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 싶으면 금세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린다. 캐나다 워킹홀리데이를 결심했을 때도 그랬다. 나름 잘 다니고 있던 직장을 무작정 퇴사하고 캐나다 워킹홀리데이를 선택했다. 그냥 현실도피였다. 늘 반복되는 일상의 굴레가 지겨워 새로운 무언가가 필요했다. 게다가 '모 아니면 도' 같은 극단적인 성격 탓에 캐나다 워킹홀리데이가 완전히 확정이 나지 않았는데도 플랜 B 같은 건 없었다. 갑자기 코로나 터질 줄 알았던 사람 아무도 없잖아요.


2019년 캐나다 워킹홀리데이 접수가 거의 막바지일 무렵 서류를 접수했고 보기 좋게 떨어졌다. 당시 이미 총 모집 인원 중 90퍼센트가 선발된 상태였지만 캐나다 워킹홀리데이의 선발 방식이 랜덤이기 때문에 단 10퍼센트의 가능성만 있어도 어쩌면 내가 뽑힐 수도 있다는 희망이 있었다. 보기 좋게 좌절했지만 아무튼.


2020년 캐나다 워킹홀리데이 모집이 시작된 것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첫 시도에 쓴맛을 봤던지라 아무리 랜덤이라고 해도 일찍 접수하는 것이 선발될 확률이 더 높을 것 같아 이번에는 사이트가 열리자마자 접수할 작정이었다. 우선 네이버에 들어가 초시계를 켜놓고 접수 사이트를 열고 대기했다. 그래도 소싯적에 인기 아이돌 티켓팅 좀 해봤다고 덜 긴장되었다. 하지만 캐나다 내의 문제로 약속했던 시간에 사이트가 열리지 않았다. 하여튼 캐나다 양반들 미리미리 공지를 해줬으면 좀 좋았을까, 괜히 잠도 못 자고 몇 시간을 더 사이트를 들락날락 하며 버텼잖아. 결국 그날 밤은 다음날 동이 틀 때까지 못 자고 버티다가 잠이 들었다. 어차피 랜덤인데 꼭 열리자마자 서류를 넣어야 하는 건 아니잖아? 스스로를 다독이면서. 이후 나중에 사이트가 열리고 그리 늦지 않게 서류를 접수할 수 있었다. 이번에는 왠지 느낌이 좋았다. 내가 꼭 될 것 같았다.



심장이 쫄깃해지는 선발


첫 번째 인비테이션이 발행되고 워킹홀리데이 카페 내에 몇몇 사람들이 인비테이션을 받았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때부터 아침에 일어나면 제일 먼저 한 일이 메일함 체크였다. 첫 번째 선발이 시작됐을 때는 애초에 내가 첫 번째로 인비테이션을 받을 수 있을 거란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아서 그런지 크게 실망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두 번째부터는 상당히 초조해졌다. 두 번째 때도 여전히 내 메일함은 조용했다. 그때부터였을까요, 좋아했던 랜덤 선발 방식이 짜증 나기 시작한 게? 인간적으로다가 먼저 서류 접수한 사람들 내에서 랜덤 선발하라고!


로부터 약 일주일 후 세 번째 인비테이션이 발행되었다. 이번에도 받지 못한다면 더 크게 실망할 것 같아서 아예 기대를 하지 말자 싶었다. 하지만 그게 어디 마음먹은 대로 되는 일인가. 메일함에 떠 있는 New 표시를 보는데 어찌나 심장이 쫄깃한 지 기대를 안 하려야 안 할 수가 없었다. 두근 두근 두근. 됐다, 됐어! 두 눈으로 인비테이션을 확인했을 때 어찌나 좋던지 빨리 접수한 보람이 있었다. 세 번째만에 캐나다로부터 인비테이션을 받게 되었다. 그때 그 기분은 정말이지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이제 곧 나의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구나, 마음이 둥실둥실 하늘을 날았다.



최종 합격인가 아닌가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 싶었더니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문제가 발생했다. 마침내 최종 합격 레터를 받았지만 두 개 중 하나가 누락된 것이다. 


인비테이션만 받았다고 해서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인비테이션을 받은 후 캐나다 내에서 요구하는 서류를 준비해 다시 심사를 받고 그 심사를 통과하게 되면 최종적으로 캐나다로부터 총 두 개의 레터를 받게 된다. 그래야 지만 캐나다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때문에 인비테이션을 받은 후로는 더욱 바쁘게 지냈다. 캐나다에서 요구하는 서류를 준비하기 위해 여기저기 뛰어다니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하루가 행복했다. 게다가 준비한 서류를 다 제출한 후 최종 합격 레터를 생각보다 일찍 받게 되었다. 하지만 뭔가 이상했다. 왜 나의 레터는 하나밖에 없는 거지? 불안해져서 애용하던 네이버 워킹홀리데이 카페에 들어가 정보를 얻었다. 어떤 사람은 처음에 한 개의 메일을 받은 후 다음날 또 다른 메일이 왔다고 한다. 나 또한 그런 경우가 아닐까 싶어서 괜스레 불안한 마음을 다독이며 하루를 더 기다렸다.


기다리는 메일은 오지 않았다. 마음이 더욱 불안해졌다. 결국 캐나다 CIC에 직접 문의를 해 보기로 했다. 나의 자초지종을 설명하며 이렇게 되어도 문제가 없는지 확실한 답변을 달라고 최대한 공손하게 물었다. 하지만 캐나다 양반들 내가 문의한 내용과는 전혀 다른 동문서답의 답변을 내놓았다. 답답해서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혹시나 나의 부족한 영어실력 탓에 그들이 내 의도를 파악하지 못했을까 싶어 영어를 잘하는 친구에게 재확인까지 받았다. 그 결과 나의 문의 내용에는 별 다른 이상이 없고 그들이 동문서답을 했다는 결론이 났다. 아이고 머리야.


다시 한번 문의를 해볼까도 했지만 그래 봤자 달라지는 것은 없을 것 같았다. 이 문제로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다가 나중에는 결국 그냥 될 대로 되라지 싶은 마음으로 캐나다행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결론적으로 캐나다로 입국하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전염병이라니요? 국경 폐쇄라니요?


하지만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한 건 캐나다행 티켓을 끊고 얼마 안 가서였다. 치료제가 없는 전염병이 전 세계에 돌기 시작한 것이다. 치사율은 그리 높지 않지만 전염성이 높은 바이러스였다. 처음 코로나가 발생했을 때는 이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한국과 달리 한국을 제외한 다른 나라들은 한국보다는 보다 가볍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치사율이 그리 높지 않아서 그랬을까 감기의 새로운 종이라고만 생각하는 듯했다. 하지만 당시 상황은 다소 심각하게 흘러갔다. 코로나 감염 환자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이로 인해 사망하는 인구의 수가 급격하게 늘어나면서 전 세계가 패닉 상태에 빠졌다. 때문에 내 주변의 모두가 이 시기에 캐나다를 갈 수 있는 것이 맞느냐며 걱정하는 소리가 점차 커졌다.


그래도 나는 캐나다로 갈 예정이었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캐나다에 갈 수 없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늘 내 뜻대로 이뤄지는 일은 하나도 없다. 2020년 3월, 캐나다가 국경을 폐쇄했다. 외부에서 들어오는 사람들로 인한 코로나 바이러스 전염 위험성을 줄이고자 했던 것이다. 나에게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리였다. 다행히 비행기 티켓은 환불받았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됐다.



백수만은 안 돼!


갑자기 계획이 틀어지면서 시간이 붕 뜨게 되었다. 캐나다를 갈 작정으로 쉬며 영어공부를 하고 있었던 나는 언제 다시 열릴지도 모를 캐나다 국경을 마냥 기다릴 수만은 없었다. 게다가 나이가 어린것도 아니고 곧 서른이 될 성인이 일도 하지 않고 집에서 놀고먹는 일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다시 일을 시작해야만 했다. 나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언제고 국경이 열리면 곧장 캐나다로 떠날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 시국에 이 나이에 아르바이트를 구하는 일은 정말이지 너무 힘들었다. 매일매일 틈만 나면 구인구직 사이트에 들어가 눈팅을 했다. 할 수 있겠다 싶은 일은 닥치는 대로 이력서를 넣고 기다렸다. 단 한 곳에서도 연락이 오지 않았다.


그래서 방법을 바꿨다. 내가 직접 전화를 해서 면접을 요청해야겠다 싶었다. 그것마저도 쉽지 않았다. 동네에 있는 한 카페에 전화를 했다가 '스물아홉이면 시집갈 나이 아닌가? 우리는 오래 일 할 사람 구해요.' 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인터넷에서만 보던 사연이 내 일이 되어 마주한 순간이었다. 정말로 이런 일이 있구나. 그냥 카페 아르바이트하는 건데 나이가 무슨 상관이며 나이와 오래 일 할 사람은 왜 같이 엮이는 건데? 나이가 많으면 오래 일을 못하나? 아니면 내 나이가 시집갈 나이라서 일을 하다 시집가겠다고 하고서는 금방 그만둘 것 같아서? 내 나이가 시집갈 나이라고는 도대체 누가 정해놓은 건데? 그 카페는 평소 엄마와 내가 자주 들렀던 카페였고 그 일 이후 다시는 그 카페에 가지 않았다.



하고자 하는 마음만 있다면 못 할 것도 없다.


아르바이트를 구하지 못했다고 마냥 손 놓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내가 선택한 마지막 방법은 가사원이었다. 가사원은 여성 인력소로 주로 주부들이 이용하는 곳이다. 일정한 가입비를 내고 등록을 해 놓으면 소장이 식당을 통해 일을 받아 가사원 회원들에게 개인적으로 연락을 돌려 출근 여부를 확인하고 출근을 할 수 있게 되면 길면 하루 짧으면 반나절 식당에 가서 서빙을 하거나 주방일을 해서 일당을 벌 수 있었다. 하지만 할 수 있는 일의 99퍼센트가 식당일이다 보니 주 연령대도 높았고 그 당시 나는 최연소 가사원 회원이었다. 최연소라... 왠지 특별해진 기분.


시간이 지나 담담하게 글로 써서 그렇지 당시에 나는 걸어 다니는 절망 수준이었다. 원래 긍정적인 사람이 아니기도 했고 매사 부정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에 하루하루가 지긋지긋했다. 그래도 캐나다에 가겠다는 목적 하나로 버티고 버텼다. 가사원에서 일을 시작하게 되면서 우리 지역에 있는 많은 식당들을 돌아다녔다. 심지어는 이런 식당이 있었나 싶었던 곳도 갔다. 그렇게 약 3개월이라는 시간을 식당 이곳저곳을 다니며 서빙을 하고 설거지를 했다. 간혹 식당에 일을 하러 가면 '우리 일은 아줌마들이 하는 거다.' 하고 그냥 일을 하러 갔을 뿐인데 혼이 나기도 하고 '네가 이런 일을 할 수 있겠니?' 같은 무시를 당하기도 하고 '한국 여자 아니죠?' 하는 인종차별적인 아저씨들의 발언을 듣기도 하고 '왜 아가씨가 이런 일을...' 같은 걱정 가득한 말을 듣기도 했다. 그럴 때면 대답은 늘 웃으며 긍정적으로 했다. '아, 이거는 그냥 잠깐 하는 거고요. 저는 곧 캐나다에 갈 거라서요.'


최대한 자괴감에 빠지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억지로 긍정적인 사고를 하려고 노력했고 할 수 있는 일이 있음에 감사하려고도 했다. 하지만 문득문득 찾아오는 우울함은 나를 다시 바닥으로 끌어내렸고 서른 날 중 스무날을 눈물로 보내게 했다. 나는 도대체 왜 이렇게 살고 있는 걸까. 분명 어쩔 수 없는, 예상할 수 없었던 일들이 생겨 계획이 틀어진 것임에도 불구하고 불쑥 나타나는 부정적인 감정은 모든 것을 스스로의 탓으로 돌리게 만들었다. 네가 그때 성급하게 퇴사만 하지 않았어도 이럴 일은 없었잖아.



존버는 승리한다!


여태까지 살면서 많은 것들을 포기했고 포기로 인해 다시 일어서기 힘들었던 날들을 떠올렸다. 포기하면 순간 마음은 편해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미련만 커지는 순간순간을 생각했다. 이번에는 물러설 곳이 없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불편한 일들로 한편으로는 이 정도면 나 캐나다에 가지 말라는 소리인가 하고 포기할까도 싶었다. 


그러던 중 이미 캐나다에서 살고 있는 지인 언니로부터 좋은 소식을 받게 되었다. 언니가 일하고 있는 식당에서 사람을 구하고 있고 어쩌면 잡 오퍼를 받아줄 수도 있다는 이야기였다. 나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무슨 일이든 좋으니 캐나다에 가고 싶다고 했다. 당시 캐나다의 국경은 여전히 막혀 있었지만 필수 직군에 한해 잡 오퍼가 있으면 예외로 입국을 허가해주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드디어 언니를 통해 잡 오퍼를 받았다. 참고 기다리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존버는 승리한다더니 결국은 캐나다로 갈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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