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 밴쿠버에 가을이 왔다. 나무들은 빨갛고 노랗게 잎을 물들이고 사람들은 다가오는 큰 국경절을 맞이할 준비를 하며 모두 저마다의 방식으로 밴쿠버의 가을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 시기에 마트는 추수감사절을 위한 터키와 할로윈을 위한 노란 호박을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진열을 해놓고 사람들을 기다렸다. 그리고 길을 걷다 보면 흔하게 할로윈 장식을 볼 수 있었다.
이렇게 설렘 가득한 10월, 나도 그 속에 있었다.
Happy Thanksgiving Day!
국경절 중에서도 큰 국경절에 속하는 북미의 Thanksgiving Day. 일명 추수감사절로 한국의 추석과도 같은 개념이다. 그날엔 자주 만나지 못했던 가족들이 다 같이 모여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먹고 함께 시간을 보낸다. 생각해보면 나는 성인이 된 이후 집을 나와 쭉 혼자 살아왔고 한국의 큰 명절일 때에도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친척들 모임에서 줄곧 빠졌기 때문에 추수감사절이라고 하더라도 그다지 큰 감흥은 없었다. 나에게는 그저 그런 평범한 날 중 하루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추수감사절 D-2
하지만 추수감사절을 앞두고 냉장고가 텅텅 비어 먹을 것이 없어져서 마트에 갔다가 가족단위로 장을 보고 있는 사람들을 보고 침울해졌다. 나만 혼자라는 사실이 외롭게 느껴졌다. 가족도 없이 혼자라는 외로움과 동양인이 거의 안 보이는 노스 밴쿠버의 어느 마트 안에서 혼자 동양인이라는 외로움. 그 외로움 속에서 나는 그래도 꿋꿋하게 사야 할 물건들을 카트에 담으며 마트 안을 돌아다녔다.
그날의 카트
추수감사절 D-1
추수감사절을 하루 앞두고 출근을 하는 길이었다. 쓸데없이 날씨는 좋아서 나만 일하나 싶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일찍부터 야외에 나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놈의 롱위캔드. 나만 못 즐기는 롱위캔드.
추수감사절 D-1 출근길
서글픈 마음을 뒤로하고 이뻐 보이는 풍경을 카메라에 담았다. 타이밍 좋게 딱 홀로 서 있는 갈매기를 보면서 동질감을 느꼈던 것도 같다. 너도 혼자니? 나도 혼자야.
추수감사절 D-day
추수감사절 당일에도 나는 어김없이 출근을 했다. 남의 나라 국경절인데 외국인인 내가 쉬어서 뭐 하겠는가. 또 집에서 음식을 만들어 먹고 있을 사람들을 생각하면 가게가 바쁘지 않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어차피 쉬어도 혼자서 보내게 될 날 출근해서 사람들과 함께 보내는 편이 훨씬 나을 것 같았다.
역시나 가게는 그렇게 바쁘지 않았고 나는 코워커들과 함께 매니저님이 사 온 펌킨 파이를 먹으며 내 나름대로의 추수감사절을 보냈다. 생각했던 것보다 나쁘지 않았던 날이었다.
Happy Halloween!
추수감사절에 일을 했으니 할로윈 데이에는 쉬고 싶었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냥 나에게는 그게 당연한 일이었다. 한국에서 일을 할 때 이처럼 중요한 휴일이 여러 번 있는 달이면 직장 동료들과 번갈아가며 일을 하고 쉬었기 때문에 추수감사절에 일을 했으니 할로윈 데이에는 내가 쉴 차례라고 마음대로 생각했던 것 같다. 게다가 아직 일이 숙련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할로윈이라는 특성상 가게가 매우 바쁠 것으로 예상되었고 그렇다면 내가 과연 해낼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두려움도 컸다.
결론적으로 나는 할로윈 데이에 출근을 했고 다행히 가게는 바쁘지 않았다. 코로나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모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엄청난 인파가 밴쿠버 다운타운으로 몰렸다. 주 고객층이 모두 밴쿠버 다운타운으로 몰렸으니 그날 노스밴쿠버의 모든 가게들이 평소보다 더 한가했다. 덕분에 나는 여유롭게 노스밴쿠버에서 할로윈 데이를 보낼 수 있었다.
휴식시간에 즐기는 할로윈 데이
밥을 먹고 쉬는 시간에 또래의 코워커들과 함께 노스밴쿠버를 구경 다녔다. 짧지만 즐거운 시간이었다. 그렇게 구경을 하고 돌아다니다 보니 쉬는 시간은 금방 지나갔다. 이전까지 주방일 특성상 외부와 접촉할 일이 거의 없어 가끔 내가 캐나다 밴쿠버에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곤 했는데 그 짧은 휴식이 나에게 다시금 이곳이 캐나다 밴쿠버라는 사실을 잊지 말라는 것 같았다.
할로윈 데이에 출근을 하긴 했지만 예상외로 한가했기 때문에 조금 일찍 퇴근할 수 있었다. 늦었지만 나도 밴쿠버 다운타운으로 가볼까? 오늘이 아니면 또 언제 외국에서 할로윈 데이를 직접 경험해볼 수 있겠어? 잠깐 그런 마음이 들었지만 이내 집으로 가기 버스를 타기 위해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첫 번째로 귀찮음이 컸고 두 번째로 밤에 돌아올 자신이 없었으며 세 번째로 코로나가 걱정이었다. '그래, 그냥 다음번을 기약하자.'
그렇게 끝이난 줄 알았던 나의 할로윈 데이는 집에 와서도 여전히 끝이 아니었다. 배가 고파 라면을 끓여 방에 앉아 넷플릭스를 보고 있었는데 난데없이 창문 밖으로 폭죽이 펑펑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동네 주민들이 모여 아직 끝나지 않은 할로윈 데이를 즐기고 있었다. 밴쿠버는 2020년 11월 1일부로 폭죽 사용 금지 법이 통과되어 2020년 10월 31일 할로윈 데이가 합법적으로 폭죽을 사용할 수 있는 마지막 날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시끄럽고 짜증이 나는 반면 마지막이니 실컷 즐겨라 하는 마음이 동시에 들었다.
나에게 밴쿠버에서 보내는 첫 할로윈 데이는 그래도 생각했던 것보다 괜찮은 날이었다. 쉬고 싶었지만 출근을 했고 출근을 했기 때문에 또래 코워커들과 할로윈 장식 구경을 다녔으며 나름대로의 추억을 쌓을 수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