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월 8일
달력의 숫자를 확인하고는 나지막이 숨을 들이켰다. 벌써 8일이라니. 새해의 결심이 일주일이라는 시간의 파도에 씻겨 벌써 형체도 없이 닳아버린 기분이다.
나의 새해 다짐은 '매일 쓰는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작가라서 쓰는 게 아니라 쓰니까 작가라는, 어느 이름 모를 문장가에게 빌려온 말을 수첩 첫 장에 박아 넣으며 나는 꽤 비장했다. 하루 한두 시간, 오롯이 나만의 시간을 확보하는 게 뭐 그리 어려울까 싶었다. 산술적으로는 그렇다. 하지만 내 일상의 톱니바퀴는 이미 타인의 필요에 의해 촘촘하게 맞물려 돌아가고 있었다.
방해받지 않는 온전한 시간. 그것은 새벽 아니면 밤이다. 20대의 나였다면 고민할 가치도 없었을 것이다. 그때의 나는 오전 11시도 한밤중이라 여기던 지독한 저녁형 인간이었으니까. "우리 애는 야간 초등학교에 보내야 하는 거 아냐?"라며 남편과 낄낄거리던 시절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하지만 마흔 중반의 현실은 서늘했다. 세상에 야간 초등학교 따위는 없었고, 집안이라는 거대한 기계가 삐걱거리지 않고 굴러가려면 내가 가장 먼저 눈을 떠야만 했다. 아침 7시, 억지로 몸을 일으켜 세탁기를 돌리고 식탁을 차린다. 남편은 "도와줄까?"라고 묻지만, 내가 손가락으로 가리키기 전까지는 거실 구석의 먼지 하나 보지 못한다. 그 '도와준다'는 말에 담긴 수동성이 가끔은 매서운 칼날이 되어 내 마음을 긋고 지나간다. 결국 가사라는 배의 키를 쥐고 있는 건 나다.
밤 12시, 퇴근 후 간단히 허기를 채우고 하루의 때를 씻어내면 비로소 고요가 찾아온다. 예전 같으면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었을 골든아워인데, 지금의 나는 <흑백요리사>를 보며 꾸벅꾸벅 조는 반수면상태의 아줌마에 불과하다. 나는 이제 아침형도 저녁형도 아닌, 그저 피로에 절여진 애매한 인간이 되어버린 걸까.
오늘 아침, 눅눅한 수건을 개키다 문득 창가에 비친 내 모습을 보았다. 헝클어진 머리 위로 어제의 기억이 겹쳐진다. 어제는 딸아이의 중학교 졸업식 날이었다. 등교거부와 우울증으로 점철됐던 2025년. 출석일수를 겨우겨우 채워 이뤄낸 그 비루한 마침표 앞에 우리는 나란히 서지 않았다. 아이는 졸업식에 가지 않았고, 나 역시 권하지 않았다. 꽃다발 하나 없는 졸업이었지만, 더 이상 학교의 전화를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묘한 해방감이 밀려왔다. 남들에겐 당연한 의례가 우리에겐 가까스로 얻어낸 승전보였으니까.
식탁 위에 놓인 소설 <금지된 일기장>을 가만히 손바닥으로 문질러 본다. 1950년대 로마의 발레리아는 가족들 몰래 산 일기장을 여기저기 숨기며, 홀로 된 시간에 자신의 속마음을 비수처럼 적어 내려갔다. 70년 전의 그녀와 2026년의 내가 이토록 닮아 있다니. 엄마, 여보, 부인이라는 명사 뒤로 자신의 이름을 밀어 넣은 그녀의 비루한 일상이 내 가슴을 서늘하게 훑고 지나간다.
내 안에는 너무 많은 페르소나들이 아우성치고 있다. 학부모의 상담 문자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으며 학생의 등록일부터 확인하는 원장. 아이들의 숙제 상태를 확인하며 오늘 수업의 동선을 그리는 강사. 졸업식에 가지 못한 딸아이의 방 문 앞에서 혹시 내 탓은 아닐까 싶어 숨을 죽이는 엄마. 그리고 24시간 내내 동업자이자 남편의 기분을 살피는 아내.
이 촘촘한 역할의 그물망 사이에서 '쓰는 사람'으로서의 나는 늘 우선순위 밖으로 밀려난다. 이런 현실을 모두 나의 의지부족으로 자책했던 시간들. 그런데 이렇게 쓰고 보니, 내가 참 너무도 애틋하다. 대단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려는 것도 아닌데, 그저 진짜 내 속마음을 단 한 줄이라도 뱉고 싶다는 이 소박한 욕망을 지키려는 나는 이토록 처절하게 버티고 있었구나.
발레리아가 그 좁은 일기장 틈새로 숨을 쉬었듯, 나도 쪼개진 시간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야 한다. 새벽의 차가운 공기가 되었듯, 밤의 흐릿한 정신이 되었든 상관없다. 내가 나를 기록하지 않으면 나의 삶은 그저 타인의 필요를 채워주는 배경음악으로만 남을 테니까.
내일은 알람을 30분만 더 일찍 맞춰보려 한다. 빨래를 개키기 전, 쌀을 안치기 전, 오직 나만을 위한 문장 하나를 먼저 안치기 위해서. 나의 비루한 오늘이 글이 되는 순간, 비로소 나는 가장 애틋한 나를 만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