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1/17
서너 가지의 색과 선과 면과 도형들을 늘어놓고 이리 돌리고 저리 돌리고 하며 하루 온종일을 보냈다. 구체적이지 않은 모양들 사이에 관계를 만들어 내는 연습을 하고 있다. 크기와 위치가 조금만 달라져도 형태들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쏟아내니 내가 중심을 잡고 있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하지만 매일매일 다른 곳으로 튀는 감정을 걸러내고 나면 건더기가 없는 날들이 많다. 그림을 그리고 싶지 않을 때도 그림을 그리고 글을 읽고 싶지 않을 때도 책을 읽어야 하는가 하는 고민을 할 때가 있는데 그럴 땐 그렇게 하는 것이 좋다는 결정을 한다.
뉴질랜드에서 다니던 직장을 그만둔 지 곧 일 년이 된다. 침대에 누워 바라보던 은하수와 보름달에 반사되어 호수에 비치던 설산은 런던 도심의 불빛과 줄지어 늘어선 벽돌건물들로 대체되었다. 내가 그토록 기다리던 강렬한 대조다. 자전거를 타고 달릴 때면 깨진 유리병을 밟지 않으려고 유리조각의 반짝임에 주의를 기울인다. 밤길을 걸을 때는 어둠 속의 그림자를 잘 주시해야 한다. 건더기는 그런 곳에서 가끔 발견된다.
돌볼 것이 있는 것은 중심을 잡는 데에 도움이 된다. 마트에서 사 온 뿌리가 잘린 고수와 대파와 허브를 물꽂이하고 하루에도 여러 번 물을 갈아준다. 고수는 반나절만 지나도 물에서 냄새가 난다. 이번 주말 안에 썩은 줄기는 솎아내고 살아남은 줄기만 골라 다시 물꽂이 해야 할 것이다. 그 밖에도 이 집에는 돌봐야 할 화분이 정말 많다. 대부분 손이 많이 가지 않는 식물들이지만 관심을 끊어서는 안 된다.
이 집에 살 수 있는 기간이 삼개월로 정해져 있다는 것은 딱 적당한 긴장을 유지하게 한다. 설거지를 하기 전에 그릇을 먼저 정리해 두어야 하는 것과 비슷하다.
오늘과 다른 선을 내일 그려내기 위해서 하루와 하루 사이의 경계에 촘촘한 거름망을 쳐두고 그 앞에 앉아 꼼꼼히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진다. 서로 다른 물질이 맞닿는 경계에서 관계가 생겨난다. 어떤 건 아주 쉽게 보이지만 어떤 건 아주 오래 노력해야 포착할 수 있는 가능성이라도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러니까 안 보이는 때라면 더 오래 기다리며 집중하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